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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다 - 우리시대 시인 서른다섯 명의 내밀한 고백
이재훈 지음 / 팬덤북스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시인은 병을 앓는 자들이다. 대개의 병이 그렇듯 병의 형태와 증세도 각각일 텐데, 유독 시인들이 앓는
병이 의미화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148p
무당이 무병을 앓듯 시인은 시병을 앓는가보다. 병명이 어떠하든 뭔가를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병을
앓았던 어느 시인은 평생 잘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시를 쓴 것이고 평생 잘못한 것도 시를 쓰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시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를 보면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고 한다.
정의조차도 쉽지 않은 단어가 바로 詩이다. 자연과 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글이라니..그 방대함을
어찌 함축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장문의 글로 써내려도 시원치 않을 분량이 나올 주제 아니던가.
얼핏 몇 자 안되는 글을 써야 하는 시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문학은 실패한 자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진실이거든요. 실패한 자에겐 실패의 변명이 있습니다.
오히려 크게 실패한 자가 큰 시, 위대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86p 유안진
실패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작품을 내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은 처절하게 다가온다.
하긴 배부른 자가 예술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못견뎌서 쓰긴 했지만 자신에게 혹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일까. 시는.
시인이 말하는 시는 무엇인가. 이 책은 이 어려운 작업을 하는 시인들의 고행의 자서전이다.
설사 자라온 환경이 조금 부유했다해도 결국은 세상과 그리고 자기자신과 투쟁하고 협박하고
때로는 협상해서 내어놓은 목숨같은 작품들을 스스로 평가하는 재판대인 셈이다.
어줍잖은 시를 쓴적이 있다. 어찌보면 채 200여자가 안되는 글 몇자 쓰는 것이 쉬워보이기도 한다.
수 십장 수 백장 원고지를 메워야 하는 작업보다는 훨씬 가볍게 느껴지지 않은가.
정해진 규격도 없기 때문에 느낌 그대로 끄적 끄적 적어 놓아도 시라고 우기면 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결코 그게 아닌 모양이다. 박목월이나 황순원은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았다고 한다.
시를 제대로 평생 쓸 것 같은 사람이 그만큼 많아 보이지 않았다는 뜻일게다.
존경하는 스승앞에서 소금그릇을 옮겨 제 그릇에 넣은 용기가 없어 맹탕으로 먹는 모습을 보고서야
'저렇게 숙맥인 걸 보니까 시는 제대로 쓰겠구나' 하셨다던가.
그런점에서 보면 더더욱 나같은 속물은 시를 제대로 쓰기는 틀린셈이다. 아마 나는 소금에 다데기에
국수사리쯤 하나 더 시켜서 양껏 먹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줄 사람이니까.
세상일에는 숙맥이어서 시 밖에는 못 쓴건지 시 쓰는 일 밖에는 할 줄 아는게 없어서 세상일에는
숙맥이었는지 모를 서른 다섯 명의 시인이 은밀한 고백이 펼쳐져 있다.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를 모른다는 사람들도 다 아는 '꽃'의 김춘수가 국회의원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은 퍽이나 놀라운 일이다. 정치와 시가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더 묻고 싶었지만 나중에 자서전에 자세히 밝히신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이 대담후 얼마만에 영면을
하셨다니 영원히 들어볼 일이 없어진 셈이다.
이렇게 우리가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아름답고 처절한 시를 쓴
시인들이 그들의 인생에 어떻게 시가 다가갔고 어떤 의미였는지를 솔직하게 담아낸 책이다.
10여년에 걸쳐 시인들을 만나고 혹은 소통한 기록을 담아낸 이재훈저자 역시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시인이다. 시인과 시인이 만나 시를 이야기하고 시를 끌어안다 보니 비가 오는 오늘 나도
뭔가를 쓰지 않으면 병이 될것 같이 가슴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