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따뜻한 온기와 가장 닮은 책이 있다면 분명 김려령작가가 쓴 책일 것이다. 분명 나보다 세상을 살아온 시간도 적었을테고 그 고운 얼굴에 어떤 슬픔도 느껴지지 않건만 왜 그녀는 빛의 반대편에 서있는 어둠속의 슬픔을 그토록 잘 헤아리는 것일까. 뜨거운 연애이야기도 아니고 파란만장의 대하소설도 아니건만 그녀의 글에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과 깊은 연민이 느껴진다. 어느 날, 아리랑 아파트 후문 앞 건널목도 없는 길에 한 남자가 노란 안전모 앞뒤에 빨간 동그라미와 초록색 동그라미가 그려진 괴상한 모자를 쓰고 교통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천에 흰색 페인트로 칠을 한 카펫을 길에 깔아 재밌는 건널목을 만들어 학교에 오가는 아이들이 무사히 길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남자에게 아리랑아파트 사람들은 쓰지않는 경비실 하나를 내어준다. '참 이상하지? 근사하게 생긴 사람도 아닌데, 가진 게 많아서 듬뿍듬뿍 퍼 주는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은 건널목 씨를 좋아했어.(중략) 좋은 사람이란 그런 거야. 가만히 있어도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중략)그런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참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78p 건널목 씨라고 불리는 남자와 엄마 아빠의 싸움때문에 번번히 도망을 다녀야하는 도희와 도망간 엄마와 병으로 죽은 아빠때문에 지하셋방에 버려진 태석,태희 남매의 아름다운 만남이 시작된다. 고물을 주워 두 남매의 방세를 내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건널목 씨와 도망다니다가 건널목 씨의 경비실에 찾아들어온 도희는 자연스럽게 가족이 된다. 건널목 씨의 에너지는 상처뿐인 아이들을 치유하고 희망을 키워가는 싹을 키워주었다. 정말 자신들이 받은 상처만큼 남에게 베풀면서 그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난 이 소설이 허구가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문밖동네'라는 엄청 큰 출판사에서 '내 가슴에 낙타가 산다'라는 동화로 백만 명 중에 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명이 모르는 상을 받은 '오명랑'이란 애송이 작가가 분명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절대 허구로 남아서는 안된다. '오명랑'이 실제 하므로. 아리랑아파트가 있는 어느 동네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널목 씨를 찾을 수 있을테니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혹시 검은색 카펫에 흰색 페인트로 건널목을 그려 돌돌 말아 가지고 다니는 아저씨를 보면 꼭 알려주시길..부탁한다. 꼭. 결코 무겁지 않고 탱글탱글 발랄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큭큭 거리는 웃음이 나온다. 박장대소보다는 개구장이같은 킬킬거림. 그리고 살아온 세월 동안 물기는 날아가고 진액만 남아 버린, 한 때 남매를 버리고 떠났다가 돌아와 이제는 늙어버린 어머니의 뜨거운 눈물처럼 농이 짙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울어 버렸어야 할 때를 놓쳐 아직 눈물이 몸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눈물을 아낌없이 덜어내도록 작가는 단단히 맘을 먹은 모양이다. 그리고 비어 버린 곳에는 따뜻한 감동이 차오른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나도 어딘가에 있을 건널목 아저씨에게 꼭 하고 싶은 말. 고맙습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랑의 실체를 보여주셔서.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 여전히 몸안에 남아있던 눈물을 아낌없이 덜어내게 해주어 정화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어서. 아직 세상에는 건널목 씨같은 희망이 있어 살만 하다는 걸 잊을만 하면 한번 씩 깨닫게 해주어서. 그래서 고맙습니다. 진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