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꽃집 주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가 다음엔 외교관이 꿈이었다가 결국 시인이 되는 것으로 꿈을 정리한 여자는

결국 시인이 되지 못하고 내성적인 쌍둥이와 말 못하는 자폐아의 엄마가 되었다.

'어떤 여중생이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내성적인 쌍둥이와 말 못하는 자폐아의 엄마가 되려는 꿈을 꾸겠는가.' -24p

김연수의 '깊은밤, 기린의 말'은 의도치 않은 삶으로 휘청거리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자폐아를 가진 가정의 아픔은 짐작만으로도 벅차다.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자폐아 아들이 자신과 처지가

같은 강아지 '기린'과 나누는 동병상련의 교감이 눈물겹기만 하다. 결국 또 사랑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아! 박완서라는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온다. 사진속의 모습은 여전히 소녀같건만 이제 생전에 남기신

작품으로나마 위안을 삼을 뿐이다.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지치고 고단한 일상속에서 갱년기를 맞은 여인의

'샌드위치팔자'에 대한 넋두리다. 아마 선생이 살았던 시대가 딱 그러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대를 나온

지성의 시어머니와 결혼도 이혼도 쿨한 며느리 세대에 끼인 허탈함 같은 것.

결국 시어머니로도 며느리도로 성공하지 못한 한 여인의 비애가 당신의 겪어낸 역사의 비극과 겹쳐지고 비참하게

사그러져간 수많은 '시대의 갱년기'의 여인들과 겹쳐져 나역시 자꾸 속에서 열불이 나려고 한다.

이제 저 윗 세대와 쿨한 세대를 이어주던 막중의 임무를 누가 대신할 것인가. 눈물겹게 선생님이 그리워진다.

 



 

역시 3년전 작고하신 이청준작가의 '이상한 선물'은 비만 오면 날궂이를 하는 미친년이나 불운한 노름꾼,

작고 깡마른 몸집에도 힘이 너무 센 바람에 아무도 대적하는 자가 없어 실력한번 제대로 발휘해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는 천재 씨름꾼에 대한 괴기한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는 선바위골의 '동네전설' 기태씨의 이야기이다.

기근이 심하면 부자집 창고를 털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그림자 의적'이나 밤새 도깨비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는 '도깨비 할배'의 이야기는 사실 어느 동네든 조금씩 색깔만 다를 뿐 동네 입구의 서낭당이나 장승처럼

흔한 수호신이 아니던가. 진실여부과 상관없이 막연한 '우상'하나쯤 세워놓고 기대고 싶은 것이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의 바람일터...기태씨, 선바위골의 자존심을 지키는데 벼루면 어떻고 숫돌이면 어떻소.

먹을 갈았든 낫이나 칼을 갈았든 다 미래의 희망을 갈았던 물건은 사실인데..그냥 받아 두시게.

 

어린시절 다친 상처로 청각을 잃은 여자의 절망을 그린 이나미의 '마디'는 잔가지를 쳐내면 더욱 튼실해지는

나무처럼 자신의 머리를 삭발하는 것으로 인생의 전지작업을 마친 여자가 늙은 소년의 모습으로

'그러나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나이 마흔 아닌가. 봐주기로 한다.'라는 마지막말에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마흔 조차도 여전히 빛바랜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게된 반세기를 살아낸 여인은.

 

뭔가를 잊고 몰두하기에 퍼즐만큼 훌륭한 것도 없다. 100피스 1000피스 퍼즐을 맞추는 일은 때로는 숭고해 보이기도 한다.

5대독자인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해 딸로 잉태된 태아를 세번이나 죽여야 했던 여자는 전처소생의 되바라진 딸과 딴여자의

향을 묻히고 돌아오는 남편과 무심해지기 위해 퍼즐을 한다. 간혹 없어지는 퍼즐 몇조각은 병적으로 퍼즐에 집착하는

아내를 포기시키기 위한 남편의 술책같았다. 죽어간 아이들에 뼈조각을 발견하는 악몽에 시달리는 여자는 스스로 빠진 퍼즐의

한조각이 되고 만다. 권지예의 '퍼즐'은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여전히 이빠진 퍼즐조각처럼 버려지는 여자가 있음을 고발한다.

 



 

이명랑의 '제삿날'과 최일남의 '국화 밑에서'는 자신의 죽음이든 타인의 죽음이든 '죽음'이란

명제를 만나면 이기적인 인간들은 뒷처리와 번거로움으로 도망가려 하거나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보는 사람들은 지나온 시간들과 스쳐갔던 인간들을 기억하는 상념에 빠져보기도 하는 등,

다양한 군상들의 표정을 담았다.

 

가장 젊은 작가인 조경란의 '파종'은 갑작스런 골절사고를 당한 여자의 살림을 돌봐주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간 부녀간의 은밀한 연대감과 쓸쓸함과 미래에 대한 자그마한 소망이 잘 그려져 있다.

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고 일자리도 잃고 술로 위안을 삼는 여자와 사기를 당하고 귀의 청력마저 사그러지는

늙은 아버지가 휘적휘적 희망도 없는 도쿄의 거리를 거닐다가 무슨 꽃인지도 모르는 꽃씨를 사다가 베란다에

심는다. 나중에 시금치였다는 것을 알게되지만 그게 무엇이든 상관이 있었을까.

그들이 피워내고 싶었던 것은 꺼져가는 불꽃이었을테니..뽑아서 던져 놓으면 마디에서부터 뿌리를 내려 자라는

명아주과의 그 풀도 사실은 꽃을 피워낸다는 것을 이미 그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 대표 작가'10인의 베스트 작품집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독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작가들의

모음집을 보니 그간 내 인생을 받쳐주었던 책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미 고인이 되신 이청준작가와

박완서작가가 내 청춘의 지지대였다면 이나미작가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문학의 꿈을 이루어낸 동지애가

느껴진다. 요즘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김연수작가나 조경란작가를 보면 문득 뒷방으로 밀려난

늙은이의 가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쓸쓸한 눈빛에 부러움을 더하여 바라보던 이들이다.

소개된 10인의 나이차가 42년에 이르니 한국전쟁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단의 주요인물을 잘 골라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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