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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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만큼 포근한 곳은 없다. 하지만 도시가 고향인 나는 '바다'가 고향처럼 포근하게 느껴진다.

바다가 고향인 작가는 '여기가 좋다'고 했지만 그가 그린 바닷가 사람들은 무시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처럼 외롭고 저물어가는 노을처럼 쓸쓸했다.

 



섬에서 나고 자란 소년은 무작정 바다가 좋았고 배가 좋아서 결국은 선장이 되었다.

왼쪽 발가락 하나를 쥐 뱃속에 남겨두고 저세상으로 떠난 아버지의 '꼭 훌륭한 선장이 되어라'라는

마지막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고기를 많이 잡고 바다를 사랑했던 그였지만 끝내

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어서 훌륭한 선장은 되지 못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소주를 한 바가지씩 먹어가며 멀미를 이겨가면서 바다를 익혔고 자식을 낳고 먹이고 살아왔던 그였지만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바다는 풍요로운 어장이 아니었다. 빚은 늘어나고 결국 그에게 선장이란 이름을

갖게 해준 배를 계약하고 그는 아내와 마지막 고기잡이를 나선다.

아내는 이제 그를 떠나겠다고 했다.  섬에서 태어난 일은 천형이었다고 했다. 사람이 살 곳은 육지이기

때문에 당신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섬을 떠나는 것이라고도 했다.

 

떠나려는 아내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아내는 말한다.

"당신은 육지를 무서워하고 있소."

바다 한가운데 몇 뼘 땅일 뿐인 섬과 몇 발자국 나무판자인 배에 떠서 표주박처럼 살아왔던 그에게

바다는 무엇일까. 한 때는 사랑이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내어주지 못하는 비루한 바다는 이제 무엇인 걸까.

 

아내가 떠나버린 섬에 한 여자가 죽기 위해 찾아왔다. 언젠가 친구들과 여행삼아 온 곳이었다는데

왜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을 이 섬에서 마무리 하려고 했을까.

"여기가 공동묘지라도 된다는 거요? 나는 죽자사자 살아가는 곳이 당신들한테는 고작 죽을 곳이요?"

사랑하는 가족도 떠나고 이웃도 떠나고 죽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만 남아 살기는 하지만

버리지 못하고 놓지 못할 만큼 소중한 이 곳이 당신들에겐 무덤이란 말이지.

사내의 외침에는 핏발이 서렸다. 심장병을 앓던 엄마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났다. 바쁘고 솜씨없는

딸을 위해 김치냉장고에 그득히 담가놓았던 김치를 보면서 화장터에서 보다 더 많이 울었다던

친구가 떠올랐다. 먹을수도 버릴수도 없던 그 김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신을 바다로 밀어 넣어 줄테니 당신은 아내가 마지막으로 채워놓고 간 냉장고의 반찬들을 치워달라.

떠나간 사람의 흔적을 확인한다는 일은 결국 자신이 버려졌다는 증거가 될테니까. 외로워졌다는 의미일테니까.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바다가 때로는 생명을 버리는 곳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된다.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안식이 느껴지는 것일까. 바다위 몇 뼘 땅일지라도 저승으로 가는 마지막 땅으로 기억되는 것은 나도 싫겠다.

 



 

깊은 산골에서 가난하게 자랐던 소녀는 일찍 남편을 만나 아들 하나를 두었고 조석으로 지지고 볶고 하다가

갈라선다. 혼자몸으로 막걸리집을 하던 그녀는 그 도시에 전근와 있던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남자였다. 눈이 따시고 가슴이 따신 그 남자와는 전근기간이 남은 이년 반만

사랑하고 그 뒤로는 절대 만나지 말고 마음속에만 담아두자고 약속하고 시작한 사랑이었단다.

가슴속에 간직했던 그 얘기는 7년만에 그 남자가 걸어온 전화때문에 시작되었다.

누군가를 화장터에 보내고 내려오는 길이라는데 그녀는 그게 누구인지 끝내 묻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끝까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완성된 사랑을 지키는 것으로 알았다.

마치 지나간 첫사랑을 평생 다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내 마음처럼..

나도 그녀의 그 사랑이 완성된 사랑이라고 믿는다.

 

여덟꼭지의 단편들은 연작처럼 이어진 듯하다. 선장은 배를 팔고 그의 아내는 성을 떠나고 어떤 여자는

죽기위해 다시 그 섬을 찾고 이천만원의 빚을 떠안고 이 섬까지 밀려온 또 다른 여자는 바다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열고 주저앉기로 결심한다. 섬에 남았던 노인들은 큰맘먹고 여행을 떠나고 그 섬에서 자랐을 것만

같은 한 남자는 항구가 가까운 도시에서 막걸리집 늙은 여자의 넋두리들 들어준다.

내가 만약 그 섬에 닿는다면 마주치는 섬사람들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만 같다. 그리고 나도 그 섬이 좋아질 것

같다. 섬에 남은 사람들과 같은 이유로 어쩌면 육지보다 그 섬이 내게 더 어울리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무심히 튀어나올 것만 같이 지금도 귓가에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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