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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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왕은 누구인가? 군주의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슨 소리야’ 하겠지만...누구에게나 살아오는 동안 영웅이 있다.

아버지 일수도 있고 존경하는 스승일수도 있고 정말 어느 왕국의 왕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사오란 인물의 이름은...참으로 안타깝게도 대지진으로 참담한

현실을 맞게 된 일본과 상관이 있으며 광복이 되던 해에 태어난 마사오가 그의 부친이

빌붙어 지내던 일제의 헌병조수, 혹은 순사 끄나플의 경력과 무관치 않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가 지금까지도 마사오란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에는 일국의 왕의 이름

으로 ‘박정부’라는 독특한 본명이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바로 주인공 ‘장원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마사오가 왕으로

군림하던 곳이다.


때는 사단장이었던 어떤 군인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이지만 굳이 이곳이 어느 지역인지

는 알려고 하지 말자. 나와 당신이 자랐던 고향일 수도 있고 아마 이런 곳이 수십 곳일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우리나라에는 마사오같은 왕과 그를 추종하거나 견제하는 똘마니들이 있는 왕국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혹시 당신의 고향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주인공의 영원한 왕이며 그가 자란 지역의 왕이었던 ‘마사오’가 죽었다.

사실 주인공은 마사오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굳이 문상을 갈 필요도 없었다.

정승의 개가 죽으면 상가가 미어터지고 정승이 죽으면 썰렁하다는 속담대로 왕의 상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쓸쓸한 병원 장례식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있지만 희미해진 왕의 실체를 제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사람도 같은 운명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두 인물,

바로 주인공과 재천의 관계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국 힘이 쎈 재천에게 빼앗긴 전력으로

보자면 분명 적에 가까워 보이지만 한 때는 친구라고 여겼던 시절도 있었으니 참으로 어정쩡한

사이처럼 보인다.


마사오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군대 시절 탈영을 하고도 일개 중대의 헌병들을

물리쳤다거나 엄청난 힘을 가진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진정 왕이 되려는 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인간에게는 도움이 필요없고

도움이 필요없으면 도와주는 사람도 없게 된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이니

사람이 없으면 다스릴 백성이 없는 것이고 백성이 없는데 왕은 무슨왕. 약아빠진 인간보다 어리석은

인간이 왕이 되는 이치도 이와 같다.’ -290p

 


마사오가 굳이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자면 고작 이런 이유가 전부일 것이다.

마사오는 완벽하지 못했고 심지어 어리석기까지 했으므로.


그 지역에는 마사오보다 조금 머리가 좋거나 아부를 잘하거나 말 잘하고 소문을 잘 만들어내는

참모들이 너무 많았다. 왕의 자리를 탐내고 끌어내리려는 깍두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사오가 왕으로 있는 한 그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이 죽고 권좌를 향한 이인자 삼인자들의 다툼이 시작되면 왕국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이 영원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사오는 자신이 원했던 자리는 아니지만 우여곡절 끝에 화려한 은퇴식을 고하서야

왕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칼을 기가 막히게 쓰거나 맷집이 좋거나 자신을 따르는 무리가 많거나 했던 놈들은

모두 죽거나 사라지고 정작 마사오가 버린 왕의 자리를 차지한 놈은 혀끝이 야물었던

놈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돈이나 칼보다 혀끝이 더 무서운 무기였음이 증명이

된 셈이다. 세치 혀로 이간질과 거짓 소문과 허풍과 아부가 이룬 결과였다.

 


어느 사회이든 줄을 잘 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찌질하게 퀴퀴한 지하셋방을 전전하고

있는 주인공보다는 그를 차버리고 재천을 택한 세희의 선택은 탁월해보인다.

스스로 여자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왕비의 자리는 차지한 셈이니 변방의 족속으로 속한 사내의 여자가 되는 것 보다야

훨씬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줄을 제대로 서지 못해 왕비는 커녕 왕을 먼 발치로

본적도 없는 일개 무수리의 삶을 살고 있지만 과연 내 마음의 가장 오랜 영토를 지배하는

영원한 왕은 누구인지 기억할 수가 없다.

 

그 것은 잘 정리된 삶을 살아가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누군가 내 삶을 지배하는

왕이 있었다면 하층 백성의 삶을 살아도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말이다.

혹시 지금의 내 삶이 이렇게 고단하고 외로운 것은 자각은 없었지만 스스로가 왕이라고

생각하고 오만했던 결과는 아니었을까. 전혀 완벽하지도 않았고 수시로 도움도 필요했으며

심지어 어리석기까지한 나야 말로 왕의 자질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왕을 찾아서 온전히 내 마음의 영토에 영접하고 싶다.

그래야 울퉁거리고 이가 맞지 않은 엉성한 톱니바퀴같은 내 삶이 제대로 돌아갈 것만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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