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인성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은밀한 교과서'로 손꼽혀온 작품들을 썼다는 그에 대해서는 책을 많이 읽는다는 독자에게도 많이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다. 약관의 21세에 등단한 이후 단 4권의 작품집만을 남긴 과작(寡作)의 작가였다. '이채영은 잘있다'라고 제목을 붙인 이 작품은 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불야성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상수동과 한옥마을이 있는 가회동, 한양으로 들어오던 가파른 재위에 이제는 아파트 숲이 얹혀 있는 홍은동, 룸살롱이 많아서 역시 신사들이 많이 드나든다는 신사동, 검은 돌이 많이 나와 이름붙여진 흑석동은 이제 재개발의 현수막이 펄럭거리는 짭짤한 땅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듯 서울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동(洞)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은 무엇일까. 일찌감치 물려받은 아파트를 근거로 팔리지 않는 나무만을 그리면서 늙어가고 있는 상수동파..아니 하수동파로 자조적으로 칭하며 어느새 터줏대감이 된 55세의 덕동선생과 '텐'의 멤버들의 몰락기이다. 진정한 예술을 꿈꾸고 자신의 예술성만으로도 충만한 인생을 꿈꾸었던 예술가들의 다양한 삶을 볼 수 있다. 33평아파트가 전세가 되고 다시 월세가 되어가는 현실에서도 붓을 꺾지 못하는 덕동화백과 1년에 단편 한편도 못 쓰고 있는 소설가, 히트작 비슷한 것 하나도 없는 작곡가등등.. 새롭게 부상한 잘나가는 예술가 그룹 '상수동 텐'그룹과의 맞장뜨기 장면은 작금의 예술인들의 현실을 그대로 대변한다. 상서로운 물로 병든 모친을 살려내어 상수동이 되었다는 그 곳에서 이제는 퇴락한 화가 덕동은 팔순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그가 그리고자 했던 나무가 있는 숲에 보금자리를 꾸릴 모양이다. 문학의 꿈을 끝끝내 접지 못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박'이 연로한 교수가 살고 있는 흑석동 자택에 수학하러 다녔던 시절의 이야기 '이채영은 잘 있다'는 바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다. 제법 잘 나가는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이면서도 노벨문학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스웨덴어과를 전공했던 초심만은 어쩌지못해 조금은 불성실한 대학원생이 되어버린 그가 만났던 여자 '이채영' '골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병을 앓으면서도 민들레 꽃시같은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대학전임강사가 되고 시인이 되었지만 끝내 골수암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녀의 부고를 알면서도 '이채영은 잘 있다'라고 홀로 중얼거렸던 작가의 마음은 그녀를 사랑했던 자신의 맘속에 그녀를 영원히 살려놓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살려 놓고 싶었던 그였지만 이 책이 출간 될 즈음 결국 그녀가 갔던 그 길로 가고 말았단다. 또 다른 동(洞)의 연작과 장편을 쓰고 싶었다던 그의 소망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얼마전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스폰서검사의 뇌물사건을 메아리 전파사 아저씨의 호기심으로 풀어낸 방식은 진실을 알고 싶어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어느정도 달래주었다. 아마 작가가 그린 그 모습대로 사건은 벌어졌을 것이다. 다만 검사가 속한 7인회의 유일한 아웃사이더 작가의 반전이 통쾌할 뿐이다.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신설동'은 작가의 어린시절의 이야기가 담담히 펼쳐져 있다. 자신의 실수로 화상의 흔적을 갖게된 여동생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히 전해져 온다. 이 서평을 쓰기위해 작가를 검색하고 그의 유고를 알게 되면서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채영'이라는 여자를 앞에 세우고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쓴 셈이다. 8편의 연작에서는 늘 그의 모습이 보였다. 고작 전세 아파트 한 채가 고작인 중년의 남자가 사회의 뒷편에서 사라질 시간들이 가까워질 즈음 일탈처럼 떠난 여행에서 만난 여자와 꿈같은 사랑을 꿈꿔보는 '지천명이 장난이야-아키타'편에서는 자꾸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결국 꿈이 꿈으로만 막을 내리고 헤어질 때 그 남자가 했던 말이 작가 자신의 말처럼 귓가에 울렸다. " 그냥 각자 가요. 뒷모습 보지 말고요." 이 책을 바치고 싶었던 두 사람은 아들 딸이 아니었을까.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동(洞)의 연작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순수 문학가로 남은 그가 하늘에서 편히 쉬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