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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장혜민 지음 / 산호와진주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스님 헌옷을 벗어야만 새옷을 입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살아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205p
헌옷 벗고 다 비우고 가신 그곳에서는 연꽃도 피우지 못하는 진흙같은 이세상 걱정은 다내려
놓으셨는지요. 해인사로 송광사로 불일암에서 오두막으로 향하신 이유가 번잡한 속세와 사람으로
부터 놓여나고 싶은 마음때문이시지요. 한때 왜 절은 산속에 있어야만 하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나 성당처럼 한동네에도 여러곳이 있어 닿기 편한 곳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스님의 말씀처럼 사찰마다 다니면서 계를 받는다고 정토에 이르겠습니까.
절이 산에 있어 부처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닐것이요.
옆집에 있다해서 성불을 한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 욕심많은 인간의 한계가 되겠지요.
때로는 산으로 숨어들다가도 울분하여 다시 속세로 내려오시기를 반복하신 이유가 오히려 조용할날
없었던 그시절에 스님의 번민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스님이 나시고 자란 시간은 우리의 영토가 살육과 상처로 얼룩진 시절이었지요.
아직은 산다는 일에 그리 허무를 느낄 나이에 출가를 결심하신 일은 이미 전생으로부터 정해진
일들이 아니겠는지요. 스님의 선택이라기 보다 부름에 가까운 삶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덕이 높고 법문이 밝고 혜안이 트이면 큰스님이라고 하지요. 얼마전 읽었던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봐도
중이 산에서 수행할 일이지..창들고 칼들고 인명을 살하는 일이 과연 가당키나 한일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의연히 산을 내려와 창을 들었던 사명대사처럼 그렇게 또다른 전쟁을 치루신듯 합니다.
피비린내 진동하고 억울한 주검이 한둘이 아니었던 시절에 어찌 산속에 수행자로만 살 수가 있었겠습니까.
총부리 앞에서도 할말하고 상처받은 대중을 용기있게 껴안을줄 알았던 스님은 종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신 분이시지요. 어느 종교와도 불화하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해주셨던 모습은
저들의 종교를 지키겠다고 서로를 죽이고 싸우는 지구상의 모든 종교인들에게 귀감을 보여주셨습니다.
'종교인들은 다른 종교를 자기 종교의 잣대로 재려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종교 없이도 사랑을 실천하며 바르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종교가 바라는
바입니다.' -165p
종교의 본질을 이렇게 속시원히 풀어주시니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느낌입니다.
말빚이 많아 다 거두고 싶다던 말씀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시던 스님의 소망이시라 거들어 드리고
싶어도 그말로 하여 평화를 얻은 수많은 이들과 남겨진 글로 앞으로 밝은 깨달음을 얻게 될 사람들에게
희망을 뺏는 격이라 차마 스님편을 들어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간 것은 이미 버려진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일을 자세히 살펴, 잘 알고 익혀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169p

스님 현세에서 만나 이렇게 미욱한 저희에게 밝음을 주시었으니..
내세에서는 어느곳에서 만나 그리움을 달래려는지요.
스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던 '어린왕자'와 그 별에서 누워 푸른별인 지구를
굽어보고 계시는건 아니신지요. 어쩌면 이미 이세상의 어느 연꽃으로..
돌아와 계신건 아닌지...스님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