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죽음의 조건
아이라 바이오크 지음, 곽명단 옮김 / 물푸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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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뜩이나 안타까운 죽음이 많았던 봄이었다.




기쁜일에 불려다니는 일보다 장례식장에 불려다니는 일들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기도 하였다. 누구나 세상에 나와 언젠가는 떠나는 법이라는것을 알지만 어느 죽음이든 슬프지 않은것은 없다. 군입대를 앞두고 송별식을 하고 나오던 친구아들녀석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도 가슴아프고 뇌세포가 죽어가는 파킨슨씨병으로 10년넘게 고생하시다 결국은 몸도 의식도 마비되어 젊어서 그리도 깔끔하고 남에게 폐끼치는 일이 없었던 친구엄마의 마지막길도 모두 슬픔이었다.

 

언제가는 자신도 혹은 사랑하는 가족도 겪을 일이건만 지금 당장은 자신의 일일것이라고

생각지못하는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수천명의 죽음을 지켜본 세계적인 호스피스 전문의가

쓴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자식들 고생시키지 말고 추해지지 말고 삼일만 앓다가 가는것이 이상적인 죽음이라고 말하곤한다.

맞는 말이다. 누구나 이런 마무리를 맞기를 소망할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한다면 과연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수 있을것인가.

 

아침에 ‘다녀오마’고 밥잘먹고 출근길에 나선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는다면?

꼬장꼬장하고 아쉬운소리 못하던 부모님이 갑자기 의식을 잃거나 치매에 걸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서히 죽어가야 한다면...아니 그게 바로 나 자신의 일이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소망하던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수 없게되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이유로 이세상을 떠나기전에, 혹은 보내기 전에 후회없는 이별을 위한 준비를 하라고 조언한다. 혼이 빠져나가고 식어가는 육체를 보내기 전에 ‘죽음’을 통해 산자와 죽어가는 자 모두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안타깝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숨기려한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다. ~실제로는 자기 내면의 고통에 적응하지 못하고 엉뚱한 행동으로
표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80p

 

알콜중독자로 혹은 폭행으로 자신의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가장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 그가 죽게 된다면 가족들은 그를 용서하기는 커녕 잘죽었다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물론 단순한 나같은 사람도 ‘용서는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냐’며 뒤도 돌아보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많은 가해자들이 사실은 피해자이면 우울증환자이고 자신도 어쩌지못한 상처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채 또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헤치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하지만 정작 저자가 걱정하는것은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보다 남은 사람들이 평생 껴안고 살아가게될 아픔과 상처이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이 상처들이 또다른 폭력으로 혹은 가해로 남게 된다는걸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걸...이 깊은 어둠에서 화해와 용서와 함께 죽어가는 이를 떠나보내야만 비로소 빠져나올수 있다는걸 간절하게 알려주려한다.

그의 말처럼 쉬운일은 아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는 지나간 시간속에 움크리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채 증오하고 방치한채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사는것이 편하다고 생각해왔다. 나역시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렇게 보냈었다.

고개를 돌리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불쑥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기억만큼은 어쩔수가 없어 어둠의 시간을 결국 떠나보내지 못했었다.

힘들었겠지만 그의 조언처럼 화해와 용서의 시간이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평화로운 마음으로 가신분을 추억하고 마음의 자물쇠를 풀었을것이다.

왜 그런시간을 기회를 갖지 못했는지 후회의 마음이 밀려온다.

어쩌면 아버지도 연약하고 고통받고 외로운 사람이었을것이다. 자신도 몰랐지만 말이다.

 

루터교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교관습에 익숙한 우리나라사람들도 ‘사랑해’라는 말은 왠지

낯간지럽고 어색하기 그지 없는 단어이다. 특히 40대이후의 세대들이라면 말할것도 없다.

하지만 더 늦기전에 ‘사랑해’라고 말해야 할것만 같다.



지금은 내곁에 있지만 혹은 사랑하는 사람곁에 내가 있지만 언제 이별의 순간이 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느님의 축복이 있다면 제발 이 마지막순간을 아쉬움없이 맞이할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기를 바랄뿐이다. 길지 않아도 좋다. 에이즈로 죽어가던 아버지가 10년넘게

만나지 못했던 딸과 마지막을 보냈던 시간은 불과 3시간여였다. 그렇지만 충분했었다.

마지막임을 알기에 서로가 사랑했음을 확인하고 화해하고 보내는 이별식을 치르기에는 그시간이면 충분했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사인을 보내주신다면 망설임없이 우리는 아름다운 죽음의 의식을 치를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의 모든사람들은 이 사인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바로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하자. 남의일이라고 먼미래의 일이라고 생각지 말고 오늘이 아름다운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첫 번째 날이라고 생각하자.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을 해야할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물론 ‘그시간’이 멀리 있다고 해도 말이다.

아름다운 삶만큼이나 중요한 아름다운 죽음을 생각게해준 이책에 겸허하고 감사한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화해하지 못하고 먼저가신 아버지께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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