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손 도장 - 2010 대표에세이
최민자 외 49인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적당히 낡아 입기 편한 옷을 입고 고향 대청마루에 앉아 봄볕을 쪼인 느낌이다.
나를 흥분시키는 스릴러도없고 이렇게 세상을 살으라는 훈계조의 이야기도 없이 마당을
종종거리는 노란 병아리같은 편안한 일상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글들이다.

요즘은 젊은이들도 다 살아보지 않은 시간까지 남다르게 일궈내어 맛깔나는 글들을 무수히
쏟아내고 있다. 재능있고 아름다운 그네들의 모습에 은근히 부러움고 질투어린 시선들을
보내고 있던 차에 덕지 앉은 군살을 졸라맨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맛있는 차를 즐기면서
편안하게 즐길수 있는 편안한 글을 만난것이다.

저자들의 면면을 일일이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글의 내용을 보니 불혹을 지나 쉰자리는
훌쩍 넘어선 분들인듯 하다. 남겨진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지나온 시간들을 만나
추억하고 화해하는 글들이 더 많았다.

‘늙음은 마술 같은 거야. 나이 들어도 감성은 그대로 살아있고 세상은 아름답고 평온해
보인다니까...‘-256p (모네의 눈,김채영)

‘매화나무를 기르면서 잘라냄의 미학을 생각해 본다. 특히 노후란 잘라내기를 하는 여정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나이란 참 위대한 가위와 같다. ‘ -210p (도장지,안정혜)

가지치기를 많이 하면 꽃이 더 잘 핀다는 매화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했으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어찌보면 매화만도 못한게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말처럼 나이든다는 일은 촛불이 사그러져가는 안타까움보다는 세상을 관조하고
넓은맘으로 바라볼 수 있는 파스텔 색조와 같은 부드러움이 녹아있는 시간들인것 처럼
느껴졌다. 뾰족했던 성질도 다듬어지고 못마땅했던 세상일과도 악수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한
사람들의 글들이 마치 따뜻한 목욕물속에 피곤한 몸을 누이는것처럼 안락하기만 했다.
나도 나이가 드는가. 가끔은 이러한 글들이 이렇게 위안이 될 수 있는것을 보면..

몇 개의 몸뚱아리로 감칠맛나는 육수를 우려내는 멸치예찬론은 참 기분좋은 글이다.
제몸을 던지는 위급상황에서도 두눈 부릅뜨고 겁먹지 않는 멸치가 겁이나서 머리붙은
멸치는 절대 먹지 않는다는 저자의 소심함에 절로 웃음이 났기 때문이다.
내게 멸치란 밥반찬이나 될수 있는 사소한 대상이었으나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살리라’고
외치는 멸치예찬론자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너무나 새롭게 내마음을 울린다.

시인이든 소설가든 모든 사물을 깊이 바라보고 대화하고 끌어내는 글감들이 너무도 존경스럽다.
이런 감성을 가진 이들이니 쉽게 상처받고 뒤끝이 오래간다고 하여 나무랄수도 없는일이다.
때로는 도망도 가보고 가슴 깊숙한 곳에 쳐박아 두기도 하였건만 기어이 어느날 끄집어 내어
수습되어야 할 수많은 과거의 상처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슬그머니 내 상처를
함께 불러내어 무임승차하고 싶은 유혹이 느껴진다. 그래 이기회에 나도 털어야 겠다.

-언제부터인가 죽음이 삶 가운데 가까이 있다고 느껴진다. 누구나 예정되어 있는 죽음으로
건너가는 시간이 중요하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살아온 모습과 상관없이 불공평한
것이 다행이다.‘-246p (죽음에 이르는 법, 노정숙)

길었던 겨울탓에 새순을 제대로 피워내지도 못했던 이봄..안타까운 죽음들이 너무 많았던
탓인지 오는 순서와 상관없이 마지막길을 가야했던 수많은 주검들이 떠올라 가슴아팠다.
죽음과 가까울 나이라면 당연히 아름답게 죽는법을 생각도 해봤으련만 우리는 언제죽든지
항상 아까운 나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일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마주대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맞는다는 공통점만 있을뿐 공평하지 않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시간이 되었다.

불고기를 잔뜩 재워놓고 밥도 그득히 지어놓고 배낭하나 달랑매고 조용한 산자락의 산사에라도
가서 나도 이런 편안한 글을 쓰고 싶다. 아니 글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저 무거워진 몸에 덕지 앉은 세상의 때도 씻어내고 굳어진 머리와 어깨에도 부드러운
기운을 주고 싶다. 정 그마저도 내몫이 아니라면 이 책으로라도 대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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