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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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뜻을 가진 적요(寂寥)라는 시인이 죽었다.

한때는 폭풍같은 혁명의 전사가 되길 꿈꾸었고 십년은 감옥에 있었으며, 그후 일흔살의 나이로

이름처럼 고요하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시인의 이름으로 살았던 남자였다.

 

그보다 여섯 달 전쯤 베스트셀러작가이며 스승인 이적요시인을 그림자처럼 따랐던 서지우가

먼저 그길로 떠났었다. 시인이 사랑했던 당나귀와 함께.

 

투명하고 흰 피부에 킥킥거리며 웃기를 좋아하는 열일곱의 소녀 은교는 늙은 시인과 중년의 서지우사이에

가로놓인 다리요 과거와 미래를 잇고 사랑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다리였다.


열 살 때 가족과 단절되고 폭력으로 상처받은 시인을 감싸 안았던 여자의 하얀 옥양목 저고리에

젖어든 자신의 핏자국은 평생 다른 사람에게 열수 없었던 마음의 빗장이었고 거친 세상을 가로 질러온 나침반이 되었다.

굳이 사랑한다.라고 고백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면 지하의 어둠속에 갇혀있을 때 그를 안아 유일한 혈육 아들을

낳아준 얼의 엄마뿐이었다.

 

그런 시인에게..일흔이 다된 노인에게 열일곱의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미친 일처럼 보였다.

더구나 그는 성골시인으로 남기위해 많은 단편과 장편의 글들을 반닫이에 숨겨둘만큼 시인으로서의

이미지관리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입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107p

 


하긴 피카소가 그러했고 톨스토이가 그러했듯이 예술가들의 자유롭고 남다른 속성으로 보면

그건 뛰어난 그의 예술가적 기질로 변명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실제 어떤 화가는 자신의 마흔번째

생일날 점을 치니 아직 당신의 반쪽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했다던가. 그후 그는 손녀뻘인 여자를

만나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는 상관없이 행복하게 살았다지 않은가. 정작 그가 두려워했던것은

나이차에 대한 시선이었을까.  아님 시인으로서 고결하지 못하다는 평가였을까.

이미 여자를 가질 능력을 상실해 버린 남자에게 사랑은 고통이고 두려움일 것이다.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상을 현실로 만든다’ -120p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빠지는 것과는 다르게 남자는 사랑이전의 현실이고 본능일 뿐이다.

물론 사랑이라고 믿는 여자가 나타났다면 좀더 그 본능이 자주 발현될 뿐인.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시인의 욕망은 번번히 실패했고

무능의 성(性)보다 봄풀같은 자신의 순결한 신부를 더럽히고 싶은 욕망에 절망했다.

 


한때는 고결한 시인을 사랑했고 존경했으며 자신도 그와 같은 길을 걸으리라 다짐했던 영원한 작가지망생

서지우는 어쩌면 시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유롭게 자신의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대추씨같은 능력일지라도 따뜻하고 바람이 드나드는 땅을 만나 열매를 맺을수도 있었을텐데 거대한 바위를 만나

미처 뿌리를 내려보지도 못하고 결국 도둑작가로 막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가졌던 모든 것을 존경했지만 결국 은교로 인해 질투에 사로잡힌 그는 시인이 사랑했던 은교였기에

그녀를 더욱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이 간절히 가지고 싶었지만 가지지 못했던 은교를 가지는 일만이 그가 그동안 시인의

그림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열등을 깨부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가질 수 없었던 그가 정말 열등을 부수고 행복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강렬한 갈증에 마셨던 바닷물처럼 그를 더 목마르게 했던 그녀였으므로..

 


도무지 난 은교를 모르겠다. 마지막 이사 장면에서 그녀의 양팔에 안겼던 두동생을 보살폈던 어른스런 맏언니였고

고결하고 조용한 시인과 그를 연모하는 또다른 남자를 흔든 그녀는 너무 어렸고 남자를 목마르게 할 팜므파탈의 요부도,

단아하고 고상한 숙녀도 아닌 그저 ‘앙녕하세요’라고 킥킥거리며 인사하는 열일곱의 계집애일 뿐이니까.

때밀이를 하면서 세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짐을 덜기위해 청소아르바이트를 하고 ‘할아부지’시인을 좋아하면서도

서지우에게 몸을 여는 맹랑한 여고생일 뿐이니까.

 


평생 아침을 나눠먹는 단란한 가족간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시인에게 ‘은교’와 ‘지우’는

가족이었고 사랑이었다. 재능없는 제자를 보며 어쩌면 안타까움보다 자신의 우월했던 재능을 만끽하고 싶었던...

오만과 이기의 시인이었지만 감춰둔 반닫이 장의 작품들은 밖으로 드러나 그를 빛나게 했던 시(詩)보다 어쩌면

더 순수하고 감동스런 그의 내면이었다.

죽음으로 향하는 마지막길에 그는 이모두를 태움으로써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의 속내를 끝내 감추고 말았다.

서지우의 이름으로 발표된 ‘심장’과 그가 훔쳐낸 두어편의 작품을 빼면말이다.

 

서지우는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눈속에 사랑했지만 버려진 기억을 담은채 형벌처럼 떠났다.

 


시인은...자신이 지정해 놓은 길만 가는 당나귀를 타고 서지우가 마지막 길을 떠났다는 죄책감을 안은채...

극락으로 가는 최정상의 수미산에서 굴을 파고 쐐기풀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밀라레파처럼, 살면서 내내

무덤과도 같았던 자신의 집이 아닌 스스로 파두었던 ‘적요굴’에서 시인은 눈을 감는다. 은교로 하여 간절하게

젊음과 조우하고 싶었던 시인은 끝내 자신의 예약해둔 죽음의 마차에 올라 호텔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말을 듣지 않은 몸뚱아리도 없고 예약된 자리라고 자신을 내치는 라이브카페도 없는 그런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은교와 팡파레를 울릴 것이다. 마침내.

 


남겨진 두권의 노트와...아니 그녀가 태운 두권의 노트는 재로 남고 은교가 남았다.

태운다고 태워 없어질 흔적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하지만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될 두사람의 흔적을 태우고 자신의 가슴에 묻은 은교는

무엇을 붙들어 남은 삶을 매듭져야 할지 모르는 검정끈처럼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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