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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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보리-매년 청명이면 만나는 연인이 있다. 어리석기 때문에,가난하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너무도 무섭기

때문에.."가끔이라도 매달려 울 수 있는 태산 같은 남자가 필요해요. 가난이 죄는 아닌거죠?"라고 물어오는 여자를

뿌리치지 못한 남자가 있었다. 한여자를 사랑한다고 믿는 남자의 먼친척뻘이자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고 우연히

불려나간 술자리에서 마뜩치않게 마주친 여자는 후배가 아닌 다른 남자와 호텔객실 엘리베이터에서 한번 마주친

기억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가 불쑥 1년에 그저 몇번만 만나주면 된다니..참 당돌한 여자다.

청명에 만난 그녀에게 그남자는 '보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왜 꼭 그남자여야 했는지..굳이 아내있는 남자여야 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아마 수경은 구속하지 않는 사랑을

원했기 때문에...그런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에 그가 나타났기때문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진물이 흐르는 젖가슴을 부여잡고 발목을 다친 학이 날아와 몸을 회복하고 돌아간 온천에 내려가 그를 기다린다.

이제 그를 놓아주기 위해,칼로 젖가슴을 도려내는 것 보다 더 큰 아픔을 될 마지막 여행을 하기 위해..

그리고 '보리'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긴 여행을 떠나기 위해...

 

 #2. 풀밭위의 점심-대학시절 만나 서로 우정과 애정 사이를 오가다 끝내 모든 인연이 흐트러져 버리고 중년의 나이가 된

세사람의 이야기이다. 한여자를 사랑했던 두남자와 두남자를 사랑했던 한여자는 결국 그중 한남자를 선택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이별한다. 남겨진 한남자는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여자의 전남편이기도 한 연우의 전시회를 찾아간다.

오래전 그녀의 고향인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를 구경하고 풀밭에 앉아 그녀가 싸온 점심을 먹고 알몸이 된 그녀와 사진을

찍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결혼생활 내내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녀가 그리워했던 것은 남겨진 남자였을까.

아이를 찾기위해 한국에 온 그녀가 "헤어지기 전에 나 좀 안아줄래?"...남자가 그녀를 안아주었을때 이제 그녀가 더이상

그리움의 고통속에서 허우적 거리지 않을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3. 대설주의보-실연이 고통에 빠진 여자와 일본에서의 기괴한 체험때문에 '삶의 연속성'을 잃고 허둥거리던 남자가

만났다. 연인이 된 그들이 평안했던건 1년뿐. 그녀의 친구이기 한 한여자의 이해할수 없는 장난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러 문득 그녀가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언뜻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것 같은 느낌속에서 그들은 드문드문 만나기도 하고..연인인지..친구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들이 흐른다. 어느날 그녀의 자살소식을 듣고 남자는 그녀에게로 향한다. 이제 자신이 뭘해야하는지 확신을

가진 남자는 대설주의보의 길을 뚫고 백담사로 달려간다. 20분이면 될거리를 12년이나 걸려 휘둘러간 사랑의 길을..

폭설을 뚫고 백담사에 오르던 그에게 부연 불빛이 보인다. 12년의 시간을 뚫고 그녀가 그를 마중나오고 있다.

 

 #4.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유난히 최무룡이 부른 '꿈은 사라지고'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결국은 피를 보고야 마는

폭력성이 있는 삼촌은 자신의 첫사랑 여자와 결혼한다. 이제는 숙모가 되어버린 여자의 남편이기도 한 삼촌은 결국

자신이 조카의 여자와 사는것에 평생 죄책감을 느낀다. 애증의 세월이 흘러 죽음을 맞이한 삼촌의 병실에서 다시만난

여자에게 말한다. "삼촌이 우리를 사랑했던 걸까요?"



 #오대산 하늘구경-아무도 사주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여자와 그여자를 먼저 아는체한 남자가 말한다. "함께 있으면

뭔가 위안이 돼." 그남자는 비합리적이고 비물질적인 관계가 필요했다. 부부관계를 포함해 늘 거래에 지쳐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감정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그럼 이런 관계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이런관계가 그녀를 적멸보궁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얘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니, 그대는 가던 길로 마저 가게."

노비구니의 말처럼 그녀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아마 그남자는 그곳으로 그녀를 데리간것을 뼈아프게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도비도에서 생긴 일-잘나가는 영화 시나리오도 소설도 쓰지 못하는 여자작가가 있다. 우리는 그녀를 '미쓰 강'이라고

부른다. 한남자는 그녀를 모욕하는 영화사에서 그녀를 건져내 선세를 주고 소설을 쓰게한다. 소설을 쓰기위해 도비도에

내려간 그녀를 보기위해 두남자는 섬으로 간다. 결국 그렇게 쓰여진 소설도 빛을 보지 못하지만..

왜 그녀는 도비도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밀물이 자신을 휩쓸고 가리라는걸 알았을까.

한 번 배신당하면 두 번 다시 울어주지 않는 여자와 같은 시(詩)를...물질적으로 눈물과 성분이 같은 시를 끝내 쓰지

못한 한남자의 그녀의 죽음에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고 다시 도비도로 향한다. 분노에 찬 또다른 남자와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미쓰 강을 지우기 위해..

 

 #여행, 여름-글을 쓰는 두 남자가 여행을 떠난다. 굳이 같이 가야 할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는 그 여행길에서 한남자는

떠나간 여자가 대학로에서 화장품가게를 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지만 그런이유로 대학로에는 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처음만난 이들이 자갈치시장으로 해운대로 달맞이 고개로...어느날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떼로 와서 죽은 고래가 있는 강구항으로...안동에서 간고등어 정식을 먹고 한남자는 끝내 안동에 있다는 지인을 만나지

않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 강구에서 만난 화장품 가게 주인인 서울여자의 추억은 덤이라고 할까.

고래가 떠밀려 왔다고 전화를 걸어온 여자를 두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한남자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한남자는 혼자 다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토속음식을 맛있게 먹은 기분이다. 깊이 사색하고 흠뻑 취할 수 있는

문학의 정수를 그대로 마신 느낌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기억속에 묻혀있던 고향을 맛을 떠올리게한  이 단편의 글들은

길었던 지난 겨울만큼이나 춥고 시리다. 어긋난 사랑들과 이기적인 사랑때문에 외로웠다.

늘 엇갈리고 피해가는 사랑때문에 안타까웠다. 이 책을 읽는내내 대설주의보속에 갇혀 옴짝달짝 못하고 있는 조난자처럼

고독했다. 그런데 묘하게 가슴은 조용한 평정이 찾아왔다. 눈이 오는밤은 유난히 조용한것처럼..

모든 소음과 번잡을 잡아먹고 눈이 내려앉은 것 같은 마음으로 조용히 책을 덮었다.

아무 누군가 다시 이책을 집어든다면 '대설주의보'속 폭설에 꼼짝없이 갇히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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