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운동화 신은 여자, 하이힐 신은 여자
서주희.곽혜리 지음, 홍희선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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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찬란하고 싱그러운 20대를 기억할것이다. 아니 지금 그 시간속에 있다면 더 행복하겠지만..

당돌하기도 하고 세상과 맞장을 뜬다면 아직은 힘이 팔팔하여 한번쯤 해볼만 한 싸움이 될것만 같은

아직은 늦지 않은 나이에 서있는 두여자, 아니 세여자가 뭉쳤다.

결혼식장에도 흰 운동화만 신고 가는 베리와 병원 갈 때도 반드시 하이힐을 신는 혜리, 그리고

카메라를 애인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만 가만 낮은 음성으로 얘기하는 이 공간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채색해준 사진들의 작가...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른이 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어른이 되니까 부끄럽지 않아졌다.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짓을 해도 덜 부끄러워졌다.' 174P

 

그랬었다. 나도 어른이 되면 누구의 잔소리나 간섭도 없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고 사고 싶었던 것들을 사고 가고 싶었던

곳을 갈 수 있을거라고 믿었었다.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 정작 하지 못하고 사지 못하고 가지 못할 일들이 더 많아진

'어른'이 된다는건 정말 재미없는 일이라는걸 '어른'이 되고서야 알게되었다.

 

달큰하기도 하고 시니컬하기도 한 그녀들의 일상과 언어가 별 추임새도 없는데 진솔하고 민낯인데도 싱그럽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걸까?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결혼을 포기할것 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하긴 우리처럼 순결을 강요받고 고리타분하게 사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녀들이 짊어진 여자로서의 굴레는

다르지 않다. 왜 산부인과의 수술대에 누워 살아있는 생명을 지우는 일은 예전에나 지금이나 여자들에게만

힘든거야. 파스타를 먹고 재즈를 들고 와인을 마시고 클럽을 다니는 그녀들도 파와 밀가루만 범벅된 파전을 먹고

카바이트 섞인 동동주를 마시고 고고장을 드나들던 그때의 나와 삶의 무게가 비슷한거지? 시대가 달라졌는데도?

 

 

뭔가 달라져야 하잖아 결혼을 하면 퇴사를 하겠다는 각서를 쓴적도 없고 남자직원들이며 손님들의 커피시중은 당연한듯

도맡아 하던 그때와는 하늘과 땅인 시대에 살면서도 조금도 줄지 않은것 처럼 보이는 그녀들의 삶의 무게가 묵직하다.

사랑의 향기도 이별의 아픔도 비슷하다. 아무리 쿨한척 살아야 하는 요즘에도 깨져버린 내사랑만큼 아픈것은 없다는

진리도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당당하게 멋지게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녀들의 고군분투는 통장잔고 751원 만큼이나

처절하고 안스럽다. 하지만 혜리와 베리는 이천원짜리 라면을 먹고 오천원짜리 커피를 들고 거리를 활보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들이 아닌 기분에 따라 커피를 즐길줄 아는 커피유목민이라 다행이다. 아직은 아줌마커피의 깊은 맛에

길들여 지지 않기를...하긴 세월이 흐를수록 취향이 단순해지고 담백해지는 이치를 알게되는 순간...젊음도 끝나겠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씩씩한 그녀들의 삶이 영원히 팔랑거렸으면 좋겠다.

주머니에 천원한장이 남은 현실을 겁내지 말고 가슴아픈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포기하는 비겁함이 없기를 바라며

죽을 때까지 작은 종이비행기를 만들고 그곳에 색연필로 등그란 창문을 그려 넣어주는...그런 사람으로 살기를..

다른건 다해봐도 많이 우는일 같은건 하지 말기를.. 다른 듯 닮았던 두여자..의 이야기에 문득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내 스물몇살적의 시간을 기억해 낸 이책은 이제 딸에게 건네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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