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항상 길위에 있다. 편평하고 딛기 좋은 길만 골라 걸을수도 없는 길들이 수없이 펼쳐져 있다. 또한 되돌아갈 수 없는 길위에는 강도 있다. 건널 배한척조차 보이지 않는 강은 현재와 과거를 가르고 삶과 죽음을 나누며 사랑과 이별을 가름짓기도 한다. 하여 강은 우리에게 태곳적부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내몸 유전인자 어디엔가 각인된 그 강물소리가 가끔 영혼을 깨우는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끼곤 한다. 기자인 주인공 문정수의 모습에서 저자의 잔영이 자꾸만 겹쳐진다. 냄새나는 양말속에 맹렬히 꿈틀거리는 무좀의 끈덕진 생명력은 지친 우리의 삶만큼이나 치열하다. 무작정 도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허물어져 가는 영세민들의 삶과 비닐하우스안에서 기르던 개에게 물려죽은 소년의 영혼에게 나는 날개를 달아주고 싶어졌다. 그렇게라도 그 아이를 위한 위령제를 지내야만 따뜻하게 웅크리고 모른척 살아가는 우리들이 죄갚음을 할수 있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생의 죄가 무지막지하여 한평생 폭탄을 껴안고 살아야 했던 뱀섬의 상처는 사랑할수 없고 미워할수도 없는 우리 식민의 역사이며 목숨을 걸고라도 건너야 할 또하나의 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와 돈으로 팔려온 이국의 여인이 섬사람들의 삶을 위협했던 폭탄을 꺼내 목숨을 연명하게 된다. 그뿐아니라 순식간에 물에 잠긴 폭탄은 평화로운 삶을 포기할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재활용 보석으로 거듭나 새로운 희망이 되고 폭탄을 들이 붓던 사람들에게는 면죄부와 더불어 옹졸한 기부의 기쁨을 안겨주는 서글픈 현실이 되는걸 보면 옛어른들이 '입찬 소리하지마라'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지금 더럽다고 침뱉을 용기가 점점 사라진다. 어찌 알겠는가 내일 나에게 절실한 식량이 될지도 모르는데.. 공단에서 시위하고 목숨을 걸었던 노동자들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문을 닫고 철수한 텅빈 공장을 떠나 그들은 모두 어디로 흩어져 버렸을까. 목숨을 건 화재현장에서 많은 생명을 구하고 병을 얻은 소방대원에게 백화점 화재현장에서 귀금속을 훔친죄를 물을수 있을것인가. 더이상 폭탄도 캐먹을수 없는 예전의 선각자에게 콩팥을 얻는 댓가가 된 그 돈은 어차피 없어도 삶에 아무 지장이 없을 사람들의 몫이 아니었던가. 묻혀진 사건도 캐내서 신문에 훈장을 달아야 하는 기자로서 묻어야 할일이 많아진다는건 아직 붓끝이 시퍼런 열혈후배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난 그의 이런 직무유기가 아주 마음에 든다. 비수처럼 날서야 할글은 비굴하게 깍이고 비루먹어 볼품없었을 권력의 흔적들이 모피를 두른 비만의 글이 되는 비겁함을 더이상은 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의 눈치없이 온전하게 사람들을 파고드는 적당히 따뜻한 글들을 쓸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책을 읽을수 있는 행운을 얻은것은 작가의 바로 이런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므로.. 강으로 뛰어드는 백수광부를 보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따라 죽지도 못한 사람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까. 사랑이라고 이름짓지 못하고 남은 기억들을 떠나보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강은 자꾸 건너라고.. 아님 흘려 보내라고 자꾸 웅웅거리는데 우리는 멈칫거리고 강물만 바라보고 서있다. 뜯지도 못할 공후만 만지작 거리면서 결국 죽어야 저강을 건널것임을 막연하게 예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