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해지기 위해 씁니다 - 한 줄 필사로 단정해지는 마음
조미정 지음 / 해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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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음이 시끄럽다. 뉴스를 안 본지는 꽤 되고 요즘은 책 마저 마음에 깊이 와 닿지를 않는다.

몸도 마음도 늙어가니 '우울증'까지 가벼이 보고 슬쩍 넘나들고 있는 것 같다.

어디 절에라도 가서 기도라고 해볼까. 초를 켜고 명상이라도 해볼까. 별 생각이 다 든다. 생각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생각을 하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왜 이런 순간에 내 품까지 찾아든 것인지 운명은 아닐까 생각될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슬쩍 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여백 투성이다.

아니 그래서 내 속에 들끓던 마음을 옮겨 담을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지금은 담아야 할 때가 아니고 덜어내야 할 때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닥 수식어도 별로 없이 담백한데 깊다. 읽는 것은 제법 잘해왔던 나였지만 쓰는 일에는 그닥 재능이 없다고 여겼다. '글을 쓸 때는 백지가 두렵다'라는 말이 딱 내 경우 같았다.

백지라는 것은, 순수라는 것은, 쓰는 이에 따라 악도 되고 선도 되고 약도 되고 쓰레기도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두려웠던 것일게다. 적었다고 지웠던 글들이 얼마던가.

반면 필사를 할 때는 백지가 든든하다고 하는 말이 왜 이리 위안이 되는 것일까.

누군가가 나처럼 쓰다가 지웠다를 반복했던 어떤 글을 이렇게 공짜로 누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글을 써본 사람들은 안다. 맘먹고 쓴 글들은 대개 다음 날 지워버리게 된다. 하지만 힘을 적당히 빼고 스스로도 별 기대없이 쓴 글이 아주 맘에 들었던 기억이 있었음을.

작정을 하고 달려들면 도망가고 자유롭게 끼적이면 슬쩍 와주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백석의 많지 않을 글을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산숙-산중음'이란 글에 이런 글귀가 있었나.

앞서 저자는 '들믄들믄', '그즈런히'같은 글들은 연필로 필사해야 분위기가 살 것 같다고 썼다.

시대가 그래서인지 나도 볼펜같은 것으로 메모를 하지만 사실 부드러운 흑연의 맛이 살아있는 연필을 좋아한다. 가지런히 적당하게 속살을 드러내 깎아낸 연필을 필통에 재워놓으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백석은 어느 여인숙에 들어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한 웃간의 모습과 때가 새까마니 오른 목침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을 생각해보았다고 썼다.

나도 언젠가 휘항한 강남의 어느 아파트 베란다에 널린 말간 빨래들을 보면서 아 누군가의 땀과 삶이 절어진 것에 뭉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냥 고요해지는 책이다. 소란스럽지 않아서, 단아해서, 잠시 멈추어서서 바라보고 싶어지는 호수같은 책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가끔 소란스런 삶을 잠시 벗어나 여백을 가져야 한다.

여기 이 책에서 건져낸 글을 위로삼고 내 맘속에 고인 시끄러움같은 것들을 글로 뱉어내보면 어떨까.

한 줄 필사가 이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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