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궂어서 비가 오다 눈이 오다 그랬습니다.
바쁜 일들이 있어 책을 펼치고 한꺼번에 다 읽어내리지 못했습니다.
삼일에 걸쳐 아끼는 빵을 요리 베어물고 저리 베어 물듯 그렇게 읽었습니다.
'국민배우'김혜자의 에세이라니까 일단 소중하게 다가온 책입니다.
책을 읽는 첫날인가 마침 '유퀴즈'에 김혜자씨가 나온다고 해서 이상한 우연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난후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한 내용들이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스스로도 말씀하셨듯이 참 소녀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화면에
나온 그 모습에서도 그런게 느껴지는 참배우였습니다.
여든이 넘었다는게 믿어지지 않을만큼 맑고 건강하고 선량한 사람이라 더 좋았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시간들을 담담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말하는게 다 진심이어서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부잣집 양념딸로 태어나 사랑받았고 좋은 남편 만나 보살핌 받고 살아온
어찌보면 팔자 편한 사람같아 보입니다. '우리들의 브루스'에서의 강옥동처럼 기구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하지만 난 박완서선생님처럼, 김혜자선생님처럼-이제서야
선생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저 나에겐 여배우였던 분이 책을 덮으면서 선생님이라고
불러드려도 되겠구나 했습니다-
쓰지 않고는 연기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끼'라는게 있는 거
같습니다.
간간히 들어간 멋진 사진들을 보면서 왜 자꾸 '오드리 헵번'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았던 헵번은 빛나는 작품속 멋진 배우이기도 했지만 소외받은 사람들을
보듬었던 아름다운 사람으로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 역시 선생님처럼 연기에
재능을 타고났고 세상에 빛나는 곳 바로 옆 어둔 그림자도 들여다보는 눈이 있었나봅니다.
아프리카 어느곳이던가 깡마른 아이를 안고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모습에서 닮았습니다.
저도 책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선생님이 세상살이에 좀 바보같은
구석이 있지만 '촉'이 있다는 말씀처럼 저 역시 누군가의 글을 보면 촉이 오는 편이랍니다.
아 이 사람 영이 참 맑구나, 가슴속안에 화산같은 걸 품고 사는 사람이구나...
나도 적지 않은 나이에 이르고 보니 인생이란게 참 쉽지는 않지만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않아야 한다'는건 압니다.
수상소감에서 그 말을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 드라마도 그렇지만 그 대사를 다시
들을 수 있어서, 그 말을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각인시켜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때로는 따뜻한 작가와 때로는 실랄한 작가와, 그럼에도 모두 자신을 빛나게 해준 사람들과
일할 수 있어서 신께 감사하다는 말씀이 또 어찌 좋던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그래도 생에 감사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한 만큼 관객들에게 사랑받았고 또 어떨때는 넘칠만큼 받은 것이 많았다니 참
축복받은 생을 잘 살아오신 것 같아, 그리고 그런 분과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사실이
참 감사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진솔한 얘기에 때로는 웃다가 때로는 울다가 그렇게 며칠 연극 몇 편과 영화 몇 편,
그리고 김혜자 극본, 김혜자 연출, 김혜자 주연의 모노드라마를 감동스럽게 잘 봤습니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삶의 또다른 등대가 되기를 바라고, 정신나간 정치인들이
서로 물어뜯고 싸우느라고 이 책을 볼 가능성이 거의 없긴 하겠지만 국회의사당 현관에
펼쳐놓고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맑은 눈을 가진 사람에게도 당신들은 곱게 보이지
않더라고. 제발 할 일들을 좀 하라고. 어느 작가의 말처럼 아흔 셋에도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저는 신과 별로 친하지 않아 기도를 들어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