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의 산책자 나와 잘 지내는 시간 1
양철주 지음 / 구름의시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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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연필을 쥐고 폭신한 종이위에 내 생각을 적어내려갔던게 언제인가 싶다.

물론 다이어리에 일정을 적거나 메모를 하지만 그건 깜박하는 내 정신을 수습하기 위한 일일뿐. 말하자면 내가 거기에 없는 마른 글일 뿐이다.

내가 들어가 있는 글을 쓴게 언제일까. 이렇게 자판으로 두드리는 버릇을 들이고 나서는 거의 기억에 없다. 하 필사가 주업(?)인 저자가 보기엔 꽤 애석한 일일 것이다.

 


 

필사를 즐겨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열중하는 사람이라니.

마치 수도승을 보는 기분이랄까. 신께 공양을 드리는 제사장의 심정을 보는 기분이랄까. 암튼 범상치 않은 필사의 모습이다.

 


 

그저 따라 쓰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는 기분은 어떠할까.

글쓴이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눈으로 읽는 것과 글로 새기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다. 오래전 시험을 볼 때 외웠던 문장을 떠올려보면 눈으로 읽었던 문장보다 종이위에 따라썼던 그 문자이 훨씬 선명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필사라는건 차원을 높이는 지혜로운 일인 것 같다.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삼차원에서 더 높은 어떤 차원으로.

 


 

나는 절대 책에 줄을 긋지 않는다. 메모도 하지 않는다. 하얀눈이 펼쳐진 순결한 평원에 지저분한 발자욱을 남기는 기분이 들어서다. 저자도 그러했다가 지금은 밑줄파가 되었다고 했다. 누가 옳다는 문제보다 취향의 문제일 뿐이지만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진다.

하긴 내가 그 글위를 걸었다는 흔적이 나쁘지는 않은 것도 같다. 너의 그 문장을 나는 기억한다 같은 시그널일수도 있으니까.

 


 

어떤 향기가 가장 좋으냐고 물으면 나도 갓지은 밥냄새라고 할 것 같다.

생명을 살리는 그 구수하고 거룩한 향. 그러고 보니 저자가 사랑한다는 냄새들은

내가 아직 건재하고 살아있다는 메세지를 담은 향인 듯 하다.

햇볕에 잘 마른 빨래의 냄새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좋은 연필에서도 냄새가

났던가. 언젠가부터 연필을 물리치고 더 유연한 볼펜을 쓰면서 그 냄새를 잊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오랫동안 필사했다는 저자의 집요함은

절대 따라갈 수가 없다. 다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것 같다.

오래전 읽었던 책, 좋은 종이의 질감, 잘 깎은 연필의 사각거림...

그리고 바람속에 흩어졌던 수많은 냄새들....그래서 수선스러웠던 마음이 조금

잦아졌다. 들끓었던 쌀이 몸을 불리고 결국은 뜸으로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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