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물에 춤을 바칩니다 - 상처가 꿈이 되는 특별한 순간
최보결 지음 / 미다스북스 / 2021년 1월
평점 :
품절


춤의 기원을 보면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나약함을 인정하고 신에게 정화와 치유의 바램을 담아 바치는 간절한

제물이었다.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우선 자신을 정화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우러르는 의식은 춤, 무용으로 승화되어 예술로 자리를 잡았다.

 


 

배우지 않아도 우리는 신이 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흔들게 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 몸에 태고적부터 스며든 유전자처럼.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제, 혹은 무녀들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무병을 앓는다.

여기 운명처럼 찾아온 춤을 출수밖에 없었던 저자 역시 무병(舞病)을 앓는 무녀같다고

생각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타고난다고 생각한다. 춤을 추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사람도 많고 수줍어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춤에도 지도가 있던가. 공식이 있던가. 그저 느끼는데로 몸이 가는데로 움직이는 것도

춤이라고 한다면 춤을 추지 못할 사람은 없다.

살다보면 마음 깊은 곳에 고이는 절망, 슬픔, 한 같은 것들이 쌓이게 된다.

누군가는 말로, 누군가는 술로 풀고 누군가는 그냥 고인채로 병든다.

 


 

춤이 이토록 치열하게 운명에 스며든 사람이라면 당연히 애증의 관계가 될 수도 있겠다.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추면 되지...평범한 사람이라면 다들 이렇게 생각한다.

살아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서 더 그랬을까. 결혼도 출산도 예사롭지 않았다.

춤은 그녀에게 업이기도 했고 치유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사슬처럼 옥죄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떼어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참 아프고 안스럽다.

 


 

이제는 자신이 걸어왔던 시간들을 주춧돌 삼아 아픈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춘단다.

사진속에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은 멋진 무대에서 추는 그런 춤이 아니다.

하지만 고였던 아픔들을 덜어내고 내면의 이야기를 듣는 숭고한 시간들임을

느끼게 된다.

 

멋진 무대에서 아름다운 무용복을 입고 추는 춤보다 더 간절하게 신과 만나는

무대를 본 느낌이다.

배운 적은 없지만 나도 파란 하늘과 구름이 떠도는 대지위에서 막춤이라도

추고싶다. 누가 본다면 미친 짓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살아온 찌꺼기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쌓였던 삶의 노폐물까지 다

사라져버릴 것 같다. 이제 눈물없이 꽃밭위에서 고운 춤을 출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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