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생활중 만난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딸을 낳았지만 유배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정약용은
끝내 그 모녀를 돌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겠지만 다시 조정에 들지
못하고 빈한한 처지에 놓였던 정약용의 힘이 강진에 까지 이르지 못했음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홍임과 그의 모친이 절에 의지하는 것으로 그렸지만 어떤 생을 살았는지는 알수 없다.
정약용의 학문과 사람됨에 매료되어 다산초당에 모여든 제자들이 이야기와 선승들과의 인연.
그가 '다산'이라고 호를 지을만큼 사랑했던 차 이야기.
저자는 정약용의 배교에 대한 이야기가 늘 가슴에 걸렸다고 한다.
과연 정약용의 배교는 지탄받아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순교도 의미가 있겠지만 정약용의 선택은 그가 남긴 저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살아남아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다. 그의 선택에 가장 많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바로 본인이기에
그 댓가는 이미 치뤘다고 생각한다.
거중기를 만들고 수원화성을 쌓아올린 과학도로서의 정약용의 능력은 정말 아깝기만 하다.
다만 학자로서의 정약용을 떠나 잠시 유배지의 외로운 남자로 생각하면 그의 곁을 지켜준
여자의 존재가 감사하다. 그가 강진 땅에서 남긴 업적은 그녀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했지만 그를 욕할 수 없는 것처럼 정약용의 배교도 그렇다.
다만 힘이 미치지 못하여 강진의 모녀를 거두지 못함은 참으로 아쉬운 노릇이다.
역시 그에 대한 댓가도 그의 몫으로 짊어지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밝은 시대에 태어나 좀더 큰 능력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운 천재의 일생에 잠시 마음이 숭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