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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평점 :
'정아'는 이 세상을 살다 떠났거나 혹은 살고 있거나 앞으로 살아갈 모든 여성들의
이름이다. 그것도 여전히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대한민국 이곳에.
8편에 짧은 소설에 등장한 '정아'혹은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물론 유부남인줄도 모르고 연애를 하다 정신차린 영진은
그나마 한숨쉬기에서 제외시켜본다.
우리의 '정아'들은 대체로 뒷배가 없다. 가난하고 심지어 무관심한 부모의 돌봄도 받지 못하고
너무 이르게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아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배우지 못해서
자기 나름의 방법대로 살아가기를 한다. 그렇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만나서
부모처럼 가난을 이어가고 미처 부모가 될 형편이 되지 않음에도 임신을 하거나 낙태를 한다.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의 집에 얹혀살던 정아는 남자의 아이인지 달달한 카라멜프라푸치노를 사주었던 하룻밤의 남자의 아이인지 헷갈렸지만 그래도 같이 사는 남자애한테 임신사실을 알린다.
정아의 일탈을 알지 못하는 남자애는 눈물을 흘리며 낙태한 정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자판기 커피 한 잔에도 벌벌떠는 남자애는 그래도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아이를 뗀 정아를 데리고
삼겹살집으로 향한다. 그래서 정아는 잘 먹었다. 안 먹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글쎄 허했겠지. 수전노같은 남자애가 사주는 삼겹살이라 더 맛있었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아이가 빠져나간 자리를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난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참 어리석기도 하다. 퇴근이후에 통화도 안되고 주말에는 만난 적도 없는 남자가 유부남인걸
몰랐다니 말이다. 순진한건지 멍청한건지 울화통이 치민다.
그런 남자의 품에 안겨 행복감을 느끼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할 꿈에 부풀었다니.
그래도 다행스럽게 발각이 되어 정리하려고 마음먹었다니 불행중 다행이랄까.
권투를 시작한 것도 잘한 일이다. 권투는 맞아야 는다는데 우리네 인생을 닮은 것 같아
씁쓸하다. 인파이터는 아웃파이터든 개성대로 맞춰 살아가야지.
그래도 여전히 데리고 놀던 장난감을 못잊어 전화를 걸어온 남자를 수신거절로 단죄한건 잘했다.
영진아 맷집을 키웠으니 이제부터라도 잘해보자...나는 영진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라면 먹고 갈래?" 혹은
"커피 마시고 갈래? 우리집에 아주 좋은 원두가 있어."
같은 말은 연애에 대해, 아니 섹스에 대해 수동적이기만 했던 여자가 그나마 용기내서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대사다.
여자는 욕망이 없다고? 아닌척해야한다고?
그렇게 용기낸 여자에게 아직은 널 아껴주고 싶다고 등을 돌리는 남자를 어쩌니.
"주체하지 말라니까. 아끼지 마. 부탁이니까 나를 좀 함부로 대해라."
그래 여자도 가끔은 이렇게 자신을 아끼지 말고 함부로 대해주길 바란다는 걸 남자들아 좀
알아들어라.
나도 아주 아주 오래전에 바바리맨을 만난 적이 있다.
무척이나 놀라긴 했지만 펼쳐진 바바리 속 그것을 아주 유심하게 보았다.
봐 달라고 하니 봐줘야지.
아낀다고 떠난 남자 때문에 열불이 났던 여자는 어설픈 바바리맨에게 빨아달라고 부탁을
할거면 공손히 해야지라고 야단을 친다. 멋있다.
야 바바리맨들아 이제 우리의 '정아'는 예전에 놀라서 도망치고 울던 그런 여자들이 아니야.
할거면 제대로 하던가. 보여줄만큼 멋있던가.
저 많은 '정아'속에 내 모습도 있는 것 같다.
좀 어리버리 하고 조금 다정하면 사랑인줄 알았던 미숙한 모습들.
다시 돌아가면 제대로 해낼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아한테 화가나는건지 나한테 화가나는 건지도 헷갈리긴 한다.
그래도 '정아'들은 맷집을 잘 키워서 잘 살아갔을거라고 가고 있을거라고 믿고싶다.
세상에 수많은 '정아'들아 좀 잘해보자. 정신차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