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눈뜨게 하라 - 한국신협운동 선구자 평전
신협중앙회 지음 / 동아일보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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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협이라 하면 그저 농협이나 수협처럼 특종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만든 금융기관이라고

생각했다. 신용협동조합이라면 어떤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기관일까.

그저 그 정도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신협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를 보니 눈물겹기만 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넘치던 그 시간들을 같이한 숭고한 사람들이 있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미국의 수녀였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굳이 대한민국이 아니더라도 성직자로서 신의 뜻을

잘 수행할 수있는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도탄에 빠진 한국의 국민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할 수 있었던 수녀님의 일생에 존경의 마음이 든다. 최초의 부임지는 평양이었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곳은 한창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있던 부산이었다. 가장들이 없는 가난한 집안들.

부인들에게 수를 놓게하고 팔아서 살림에 보탬이 되도록 도왔던 수녀님은 좀 더 강력한 도움이 필요함을 절감하여 캐나다로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성경에도 나오는 말씀처럼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헌신한다.

 

 

 

먹고 사는데에는 분명 돈이 필요하다. 당장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저축은 생각지도 못한 시절에

1원이라도 모아서 출자를 하고 조합을 만들어 서로를 돕는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신협은 애초에 삶이 절박했던 사람들에게 절대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선한 등대였던 것이다.

그 신협의 탄생에는 가난한 어부와 노동자를 위해 뭔가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던 코디박사의 발상이

있었다. 코디박사는 신협의 탄생과 더불어 전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신협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지도자교육을 실시한다. 그렇게 가브리엘라 수녀는 코디박사의 가르침을 기초로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사람들을 위해 최초의 신협을 만들게 된다.

 

 

 

여자의 몸임에도 가브리엘라 수녀는 확고한 신념과 고집스런 추진력으로 수많은 고난을 극복한다.

자금은 늘 모자랐고 고향의 가족에게 혹은 기부자들을 찾아 자금을 모았다.

부산에서 최초로 시작된 신협은 그 후 서울로 올라와 더욱 체계적인 조직을 가다듬게 된다.

그렇게 평생을 헌신했던 가브리엘라 수녀는 건강이상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9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헌신이 만든 기저같은 신협의 탄생은 가난한 국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신협의 모태는 사람 그 자체라고 말한다. 신협은 어떠한 정치적 색채없이 만들어진 순수한 조합이다.

지금껏 이어온 신협의 탄생과 활동에는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음에도 좀 더 큰 세상을 위해 자신을 던진 수많은 사람들의 봉사와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신협이니 정말 숭고한 조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장대익 신부. 고난의 시간을 겪었던 나라에서 태어나 전쟁과 가난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드라마틱한 삶으로도 기억할 만한 분이다.

수많은 죽음의 위험에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더 소중하게 쓰고 싶어서가 아닐까.

도깨비깡패라고 불릴 정도로 괄괄했던 장대익은 신부가 되고 성전을 6곳을 지을만큼 커다란

업적을 낸다. 그리고 가브리엘 수녀님과는 다른 색깔로 신협을 이끈다.

 

 

 

가브리엘 수녀가 정통적인 조직위주의 경영이었다면 장대익신부는 삶속에 여가 문화를 접목하여

여유있는 삶을 추구했다. 요즘으로 치면 욜로나 힐링을 중요시 했던 것 같다.

특히 초기 브라질 이민자를 이끌고 정글에 정착하기까지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했던 장면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는 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알았던 것 같다.

아이를 좋아하고 골프를 즐겼던 멋있던 신부님. 후암동성당, 대방동성당, 상도동 성당등 내가 어려서 들었던 그 신부님이 아니었던가 싶다. 형식없이 멋지게 신도들을 이끌었던 그 노신부님.

스스로 마지막을 알고 하늘의 부름을 지혜롭게 받아들인 멋진 선구자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강정렬! 평남 진남포 출신의 강정렬은 1.4후퇴때 군산으로 내려와 헤어진

아내와 장남을 만나 가정을 일구고 부산으로 내려와 1960년부터 신협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역시 가브리엘라 수녀를 만나 신협에서 가장 열성적인 활동을 하게된 강정렬은 민주적인

조직인 신협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초기 신협을 이끌게 된다.

 

신협이 만들어진 계기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주적인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고자 했던

긍휼의 마음이었다. 그 조직을 이끈 사람들 역시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자 했던 헌신적인 인물들이었다.

 

최근 신협의 CF를 보면 '어부바'를 강조하고 있다.

힘이 들어 홀로 걸어갈 수 없을 때 따뜻한 등을 내어주는 존재. 그게 바로 신협의 모토다.

그저 조그만 금융기관이라고만 생각했던 신협에 통장 하나 만들고 나도 조합원이 되어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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