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 동안 난 무던히도 버텼다. 하지만 결국 스톡홀름 증후군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연쇄살인범을 사랑하게 되다니 이건 정말 예감하지 못했던 난감함이었다.

102세라는 나이까지 살아온 사람이라면 신(神) 다음으로 믿어도 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세기를 넘어 버텨온 지혜와 경험의 축척치로만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곱 구의 해골과 8마리의 동물뼈가 발견된 지하실이 있는 집에서 백 년을 넘게 살아온

할머니를 찬양해야 하다니 이건 정말 불공평한 전개가 아니던가.

 

 

 

 

사건의 시작은 무자비한 폭력꾼 남편에게 고통당하던 여인과 불륜남의 도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하는 연인의 남편을 죽이고 도주를 하던 남녀는 우연히 102세 할머니 베르트의 집으로 찾아든다.

도주를 위해 차를 훔치려던 연인을 발견한 베르트는 그들을 집안에 들이고 음식을 먹이더니 심지어 도주자금까지 지원한다. 아니 그럼 공범이 되는데...

자신의 허름한 차로는 멀리 도망가기 어렵다는 베르트의 말에 힘입어 두 연인은 옆집의 차를 훔쳐 달아나고 만다. 차를 도둑맞은 옆집의 드 고르는 총 세발을 맞고 쓰러졌다.

결국 경찰이 출동하게 되고 루거총을 들었던 베르트는 체포되고 만다.

 

 

 

 

1914년 태어난 베르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집을 떠나자 할머니 나나의 손에 자란다.

한창 전쟁통이었던 프랑스의 경제상황은 엉망이었고 나나는 베르트와 먹고 살기 위해 독주를 빚는다.

지하실에서 만든 독주는 꽤 인기가 있었고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

베르트는 나나로부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배운다.

'너 자신한테 얘기하라고! 네 얘길 들어.....'

베르트는 눈부신 꽃처럼 피었고 성적인 호기심으로 일찌감치 처녀성을 버리고 성에 대한 열망에 들뜬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는 남자를 보는 눈을 흐리게 했던지 첫 결혼은 무려 자신보다 스물 몇 살이나 더 나이 먹은 잡화상 주인 뤼시엥이었다. 섹시한 베르트에게 반해 청혼했고 결혼했지만 자신보다 성에 더 눈을 떠버린 베르트의 몸가짐에 실망하고 폭력남편이 되고 만다. 그래서 베르트는 칼로 그를 찔렀다.

그게 첫 번째 살인이었고 뒤에 이어진 살인들은 조금 더 쉬웠다.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놈이 그녀를 겁간하기 위해 바지를 내렸지만 삽으로 놈을 내리쳐 죽이고 얻은 루거총이 칼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어진 두번 째 세 번째 결혼도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죽어야 마땅할 놈들이긴 했다.

이탈리아 요리사였던 남편과는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고 남편은 다른 여자를 임신시켰다.

사랑대신 댄스로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 만났던 남편은 고추가 너무 적은데다 그 열등감을 폭력으로 폭발시켰다. 나쁜 놈들. 그 와중에 베르트는 전쟁중에 프랑스에 주둔하게된 미국인 흑인 병사 루터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루터는 유부남인데다 곧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베르트에게는 평생 단 한 번의 진정한 사랑이었고 평생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그녀가 선택했던 남자들은 다 쫄보에다 양아치에 가까웠다. 베르트는 생명을 주지는 못했지만 죽음을 주는 데는 뛰어난 여자였다. 그래서 죽음을 맘껏 흩뿌렸다.

 

 

 

 

다섯 번의 결혼과 죽임 그 사이에 세금을 징수하러온 사내가 끼어들긴 했다. 그렇게 그녀의 지하실엔 7명의 남자가 묻혔고 남자들이 남긴 유산으로 베르트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 우연히 접한 책을 통해 영감을 얻었고 여자도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인식하게 된다.

 

처음엔 옆집남자에게 총을 쏘고 살인자들의 도주를 도운 혐의로 경찰서에 온 베르트를 수사하던

벤투라는 점점 베르트에게 빠져드는 걸 느끼게 된다. 이제 곧 그녀를 법정에 세워야 하는데

그녀가 털어놓은 삶의 궤적들을 보면서 속으로 감탄을 하게 된 것이다.

벤투라도 나처럼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려든 것이다. 아무렴 그렇지 않고는 베기지 못한다니까.

 

베르트는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가 필요했던 것 뿐이었다. 자신보다 성적으로 더 유능하다는 이유로, 적은 고추로는 그녀를 만족시켜줄 수 없어 폭력으로 대신했던 놈, 생활력이 강하니까 빈둥거려도 된다고

믿는 허접한 화가남편 놈, 다른 년을 임신시킨 걸레같은 놈들을 그저 그녀 방식대로 정리했던 것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오랜 시간이 지나 그렇게 사랑했던 루터가 찾아온다.

그 후 몇 년은 베르트에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을에 찌질이 세 놈이 루터를 해치우기 전까지.

루터는 이 세상 유일하게 그녀를 제대로 사랑한 남자였다.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다.

 

꼬부라진 102세의 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지난 시간들에 대한 고백들은 무서웠다가 통쾌했다가 그리고 슬펐다. 하지만 그녀가 숨긴 살인이 또 있다고?

 

폭염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와중에도 나는 집중해서 베르트의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책 속에 그녀를 불러내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우리에게 그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위해 한 세기를 넘어 버티고 있던 집념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나는 베르트에게 돌을 던졌던 수많은 인간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두 가지만 기억해, 베르트를 위협하지 말것. 그리고 존중할 것.'

안녕 베르트! 루터와 함께 그 곳에선 외롭지 않기를. 그렇게 열망하던 뜨거운 밤들이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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