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초심'이란 죽음을 앞두고 고향을 그리워 한다는 사자성어이다.
내 아버지는 평양이 고향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어수선한 무렵에 이북에서 월남하셨다고 한다.
피난을 나오다가 공습을 당해 다시 평양 집으로 돌아가 북한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해 가던
무렵이었다는데 이미 3.8선이 그어져서 서해 바다를 돌아 남하했다고 한다.
그리고 칠순을 앞둔 어느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고향을 그리워 하셨다.
난 할머니나 할아버지, 삼촌이나 고모같은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 분들은 그냥 아버지의 추억속에서만 있는 분들이어서 해마다 명절이 와도 우리 집은 늘 쓸쓸했고 가보지 못한 평양이란 도시는 어느새 나에게도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살아생전 겨울이면 '쩡'하게 시린 김치로 김치말이와 만두를 빚어 먹고 여름이면 메밀면을 삶고
부뚜막에 겨자를 발효시켜 넣은 평양냉면을 즐겼던 아버지는 음식으로 고향을 느꼈던 것 같다.
TV에서 북한 음식이 소개되는 장면을 보면서 아버지가 이 장면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생각해보았다. 어떤 음식은 어린 시절 그대로 인 것도 있을테고 옥류관의 냉면은 아마 아버지의
기억속의 음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말처럼 오히려 이산가족이 내려와
꾸린 음식들이 더 그 맛을 지켜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향의 맛을 잊지 않기 위해 실향민들은 지키려고 노력했고 북의 사람들은 지금 시대에 맞는 맛을 찾아 조금씩 진화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모든 건 진화하니까.
맛을 느끼는 것도 유전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릴 적 먹었던 아버지의 고향 맛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남쪽의 짙은 양념의 맛보다 북의 깔끔하고 담백한 음식들이 나는 많이 그립다.
'누군가에게는 그림움의 맛이고 누군가에게는 기억의 맛이다'라는 말이 가슴에 고인다.
내 아버지는 기억속의 그 맛을 재현해 내면서 그리움을 달래고 외로움을 이겼다.
하지만 북의 음식들도 많이 변했고 햄버거에 피자에 파스타와 아메리카노 커피가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들도 누릴 권리가 있으니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조금씩 물들어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가 합쳐졌을 때 그 간격이 조금쯤은 좁혀지지 않을까.
함흥의 냉면맛이 조금 다르고 명태순대가 오징어순대가 되고 가자미식해의 재료가 조금 바뀌었다고 해도 언젠가 우리는 다시 그 맛에 길들여지고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
국내 최초 남북 미식여행에서 느끼는 감동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기획을 해낸 사람들이 기특하고 그 기획을 수락한 북의 사람들이 고맙고 그 닫힌 도시들을
두루 섭렵한 사람들이 부럽다.
어떤 맛은 순수하게 남아서 궁금하고 어떤 맛은 진화해서 아쉽고 어떤 맛은 언제 맛볼까 기대했던 시간들이었다.
닿지 못한 원산의 해변과 금강산은 언제 내 발로 가볼 수 있을까? 가능한 일일까.
아버지의 고향 평양에 가서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의 맛을 나는 맛볼 수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아버지가 닿고 싶었던 고향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2세대인 내가 그 땅에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