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미국 LA의 헌팅턴 도서관에 간 적이 있었다. 도서관이지만 정원이 훨씬 더 맘에
드는 곳이었는데 세계 각국의 정원들을 재현시켜놓아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곳이다. 왜 그 곳이 그렇게 좋았을까 생각해보면 지친 유학생활에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이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정원 혹은 식물이 주는 힘을 그 때 알았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섬에 있는 천주교 공소의 정원을 한참 둘러 보았다. 책과 함께 사진도 찍고 잠시 꽃구경으로 호강을 하고 싶어서였다. 역시 꽃은 악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녹일만큼 눈부시게 아름답고 치유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서울태생에 도시에서만 거의 살아온 나로서는 막연하게 촌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파트 베란다가 아닌 햇살 가득한 마당에 빨래를 널고 싶었고 텃밭을 가꾸어서 유기농 채소를
수확하고 싶었다. 저자는 방송작가로 살았던 시절 너무 지치고 힘들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8년 이란 시간을 정원가꾸기 공부를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섬에 내려와 8년을 시골사람
흉내를 내고 살고 있다. 내려오기전 아는 식물이라고는 꽃 몇 종류와 쑥이나 달래정도였는데
지금 그 때 보다야 먹거리 채소는 많이 알게 되었지만 호젓한 해수욕장 근처 산책길에서 만나는
꽃이며 식물들의 이름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탄식한다. 분명 너희들도 이름이 있을텐데
몰라봐서 미안하다고.
고추농사를 지으면서 하도 병충해에 시달려 올해는 지지 말자고 결심하고 결국 약을 조금씩 뿌리고 있는데 자꾸 죄책감이 느껴지곤 한다. 내가 원하는 텃밭가꾸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가능하면 천연 방제재를 만들어 볼 요량으로 계란껍질에 식초를 넣은 칼슘액도 만들어보고 여기저기 검색도 자주 하는데 누군가 고추밭고랑 사이에 코스모스를 심으면 나방이 안온다는 글이 있었다.
정말 코스모스가 그런 힘이 있을까? 그런데 저자 역시 금잔화가 채소밭의 해충을 막아준다고 했으니 어디가서 금잔화를 구해야 하나. 그나저나 국화와 구절초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내가 금잔화를 알아나 볼 수 있을까.
50대 초반인 저자가 방송일을 그만두고 정원일을 배우기로 한 것은 초라하게 늙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100세 시대라고 하니 거의 40년 이상은 늙은 모습으로 버텨야하는데 그냥 할 일없이 늙어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긴 하다. 뭔가 생산적인 일, 저자처럼 정원을 가꾸고 생명을 돌보는 일은 늙어가는 일과 병행하기 딱 좋은 일인 것 같다. 물론 도시에서도 가능하다면 말이다.
어딘가 뿌리를 내리면 죽는 순간까지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의 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누군가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 방어기제를 만들기도 하고 그게 인간에게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니 길가에 무심히 핀 들 꽃 하나에도 우주가 보인다는 말이 딱 와닿는다.
잘 가꾼 정원에 앉아 시원한 바람도 느끼고 허브차 한 잔 즐겨보는 생활이 퍽 부럽다.
나야 꽃보다 채소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열무꽃도 감자꽃도 쑥갓꽃도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아는 나름 정원쟁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그들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안아준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