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 시대를 이끈 한 구절의 지성
허연 지음 / 생각정거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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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도 대단하지만 글의 힘은 말을 뛰어 넘는다. 말은 공중에 흩어지지만 글은 남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많이 읽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감동적이거나 충격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는데 외울 정도의 문장은 거의 기억에 없다. 그 사이 나를 스쳐간 그 수많은 문장가들의

글이 시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내 읽힘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근래 하도 이 소설의 첫문장이 여기저기 나오는 바람에 나도 하나 외워둔 글이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번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같다.

고작 요 정도의 기억력을 가진게 전부인 나이기에 이 책의 수많은 문장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도서실에서 아무 책이나 펼쳐내어 문장 하나씩을 골라낸 것이 아니라

더욱 그렇다.

 

 

 

60여편이 조금 못되는 책에서 골라낸 문장은 아쉽게도 내가 읽은 책이 몇 되지 않는다.

저자의 박학과 다식함에 놀라면서 그나마 등장한 몇 안되는 읽은 책 중에서도 문장들은

거의 기억에 없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에드먼드 버크'란 인물도 처음 만났다. 왕과 귀족을 끌어내린 프랑스혁명은 가히 세계사를

압도할만한 혁명임에도 이 버크란 인물은 혁명 뒤에 숨은 비극을 알아챘다고 했다.

내가 이 문장에 한표 던지고 싶어진 것은 우리 역사가, 아니 모든 역사가 이런 비극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암울한 이 시대를 벗어나고자 시민들의 혁명이 휩쓸고 지나가도 결국 다시 변혁을

요구하는 시간이 도래한다. 바꾸면 나아지겠지 싶지만 또 다른 이유로 사회를 고갈되고 분해된다.  '문제가 있는 부분만 변혁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 백표!

 

 

 

진보라고 주장하는 놈들도 보수로 지키겠다는 놈들도 다 똑같다. 제대로 된 정치가 없는 사회인데 또 누군가를 뽑아야 되는 시간들이 가까워지고 있다. 보수의 품격? 진보의 참신함?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사실 작가들의 글을 보면 자신의 삶에서 건져낸 글들이 많다. 그런 글이야 말로 살아있는 문장이

되고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의 문장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냈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꺼내놓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상처받았던 시간들이 지나도 흉터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렇게 아파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문장은 남는다. 그게 글의 힘이다.

그러니 자신의 숨이 멎어도 뒤에 남을 문장을 쓰는 사람들의 책임은 크다. 죽지 않기 때문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파인만은 평생 권위를 거부한 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렇게 살기는 정말 어렵다. 어쩌면 파인만은 그렇게 살만큼 세상에 도도하기도 했거니와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타협하지 않고 눈치보지 않고 살 수 있을만큼 탁월한 자신감과 능력.

'나는 타인들의 기대대로 살지 않는다. 내가 타인들이 원했던 것을 성취해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실패지, 내 실패가 아니다.'이렇게 멋진 일갈이 있을까. 물리학자의 이 한문장이 가슴에

고인다.

 

문장 하나에 작가의 이상, 인생, 그리고 역사까지 담겨있다.

읽어보지 못한 책을 다 읽은 듯도 하고 만나보지 못한 저자와 고뇌에 찬 인생을 논한 것도 같다.

대체로 치열하게 고독하게 전투같은 삶들을 살다갔다.

그래서 남겨진 한 문장은 그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고고하다. 누구라도 허물수 없다.

한 문장에 대한 해설 혹은 해석은 고작 두어장 정도이다. 하지만 담긴 여운은 너무 길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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