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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몽환도
주수자 지음 / 문학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 가뭄끝에 비가 내린다. 텃밭에 마늘은 끝이 노랗게 말라가다가 후두둑 빗소리에 일제히
흔들거리며 춤을 추는 것만 같다. 하늘은 낮고 바람은 비를 부르듯 때죽숲을 흔드는데..
이런 날 밤은 유독 무섬증이 돋는다. 아마 오래전 저 때죽숲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알수없는 궁금증이 몰려오면서 얼른 불켜진 방의 문을 열고 도망치듯 숨어버리게 된다.
이렇듯 비가 오는 날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들이 교차되고 숨죽였던 기억들이 서로 알아달라는 듯
달려들기도 한다.
16편의 아주 짧은 글들을 보노라면 잠시 다른세상에 머물다 온것 같은 착각이 밀려온다.
SF영화속에 들어갔다 나온듯도 하고 조선시대 안평대군이 거닐었다는 도원을 거닐다가 온듯도 하다. 전편에 으스스한 미스터리가 녹아있는 듯한 스토리에 잠시 상상의 세계에 빠지기도 한다.
옥탑방에서 소설을 쓰면서 살아가는 공상호의 집에 어느 날 자신이 이 집에 새로 들어온 세입자라며 여자하나가 문을 두드린다. 하긴 월세를 밀릴만큼 밀렸으니 언제라도 세입자가 바뀌어도 할말은 없지만 이렇게 늦은 밤 주인의 언질도 없었는데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말릴틈도 없이 쳐들어온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공상호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되는데...사랑했던
남자의 폭력을 피해 도망쳤다는 여자는 자궁에 아이가 들었다고 했다.
사실 이 여자는 공상호가 조금전까지 쓰던 소설의 여자와 너무 닮았다.
혹시 공상호가 꿈을 꾸면서 소설 속 여자를 불러낸 것이 아닐까.
오래전 우리곁을 떠난 백남준을 추모하는 글도 보인다. 천재적인 아티스트였던 그가 죽었을 때 뉴욕의 고양이들이 모두 울었다는 귀절에 잠시 우리는 그를 어떻게 추모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와 그것도 먹고 살기 힘든 나라에 태어난 죄로 늦게서야 인정받았던 예술가.
이렇게 저자의 글속에서라도 되살아난 것 같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했다는 저자의 그림솜씨는 곳곳에 추상적으로 펼쳐져있다.
그녀의 난해한 그림 못지않게 조금쯤은 어려운 글속에서 잠시 이 세상이 아닌 시간에 머문듯한
착각이 든다. 그래도 그녀의 작품성이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는지 대학로에서는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단다. 비내리는 오늘 같은 날 잠시 책속에 내리는 비를 맞아보는 것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