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살기 힘들까 - 삶이 괴롭기만 한 당신에게 건네는 위로
미나미 지키사이 지음, 김영식 옮김 / 샘터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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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어느 우주를 떠돌다가 지금 이 시간 지구라는 별에 머물게 된 것일까.
내가 원해서 온 생도 아닌데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같은 삶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물론 이루어지지 않을 상상일 수도 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삶이 계속되어 또 다른 생이 올 수밖에 없다고 해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이 생에 업을 다 닦고 나면 소멸할 수 있을까.
아마 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저 지금 이순간 태어났으니 최선을 다해
살아갈뿐이다. 다만 이 책의 저자인 스님의 말처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쓰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 누구라도.


좋은 의식을 가진 부모님 손에서 자란 스님은 왜 끊임없이 죽음을 떠올려야만 했을까.
슬픈 가족사를 지닌 내가 생각하기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도 또 다른 삶의 방법일텐데
남은 사람들은 평생 주홍글씨처럼 아픔을 새기고 살아간다. 떠난 사람은 말도 없는데.
오히려 자살은 남은 사람들의 숙제이고 고통일 뿐이라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삶이든, 죽음이든 어쨌든 생은 기쁨보다는 고통이 많고 고단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남은 시간동안 열심히 살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스스로 다독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제 반 이상 살고 보니 스스로 선택하는 삶의 방법들이 어쩌면 운명속에 각인된 문신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래서 때때로 우울하고 힘들때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게 된다.


이 책이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바로 스님 스스로가 자신의 삶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워서 자살을 끊임없이 생각했고 결국은 출가하여 수행스님이 되었기 때문이지 싶다.
그리고 죽지 말고 열심히 살자같은 말보다 죽음도 삶의 한 방편이라고 말해주는 아량때문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미화하지는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 사람들이 스스로 규정해버리는
'운명'에 대한 차이를 스님은 주체성의 차이라고 정의한다.
억지로 결정해 버리는 것=운명.
때로 그런 운명이라는 굴레에 자신을 가둠으로써 지금 고통스런 현실을 잊고 싶은 것은 아닐까.


외로운 사람이, 고통스런 삶을 사는 사람이 더 상대의 아픔을 이해한다.
그래서 서로 손을 잡아 준다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아닌지.
인생 몇 번이고 넘어져도 좋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바로 그게
문제라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실패나 실수가 공포가 아니라 홀로 극복하는 것이 공포라는 것.


우리가 열심히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하는 많은 이유중에는 앞으로 이 세상을 이끌어갈
아이들에게 긍정의 힘을 심어줘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에 큰 책임감이 느껴진다.
대충 적당히, 혹은 때로 불합리하게 막 살아가는 일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어떠한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내 하나의 삶이 누구에겐가 나비처럼 다가갈 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고달퍼서 주저 앉고 싶을 때에도 죽고 싶을 때에도 세상의 질서를 생각해볼 수 밖에 없다.
중이 산 속에서 경이나 읽으면 되는 것은 아니라는 평소에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세상밖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어 이렇게 현실적인 조언들을 해주는 것이 부처의 또 다른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너무 그럴듯한 말만하는 스님이 아니어서 가슴에 와 닿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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