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르타 이슬라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남진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6월
평점 :
베르타는 유년 시절부터 그녀의 남편인 톰이자 토마스 네빈슨을 알았다. 영국인이자 스페인인이었던 톰은 영국인 학교에서 정해진 중등과정 4년을 이수한 후 나머지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가까운 거리에 있던 베르타가 다니던 현지 학교로 넘어왔다. 베르타와 톰은 그때부터 서로 결혼했다는 상상에 빠질 정도로 금방 사랑에 빠졌다.
베르타는 눈에 띄는 특징은 없었지만 균형이 잘 잡힌 갈색 미인으로 원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줄 아는 의식이 있는 여성이었다.
톰은 언어를 배우는 데 남다른 재능 즉, 탁월한 외국어 습득력과 새로운 말을 모방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원어민처럼 완벽하게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잠시만 들어도 말투, 억양, 단어, 악센트까지 완벽하게 흉내 낼 줄 아는 재주를 가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계가 결코 불장난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육체적인 관계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며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둘은 엉뚱하게도 서로 사랑하고 헤어질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각자 다른 사람과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시위에 참여했다가 회색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베르타는 도주 중 자신을 도와준 반데리예로인 에스테반 야네스와 한 번의 첫 관계를 맺은 후 더 이상 만남을 지속하진 않고 그저 결혼 기간 내내 가끔 그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톰의 경우는 옥스퍼드에 진학한 후 '성의 해방'이라 부르짖는 당시 영국의 흔한 방식으로 첫 경험을 했고, 그 후 두 번째 여인인 중고 책방 점원 재닛과 별다른 교류 없이 가끔 만나 잠자리만 같이 하는 관계를 이어나갔다.
자신의 능력과 아버지의 지위 덕분에 어렵지 않게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한 톰은 영어와 스페인어 외에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다루었고 그 외 폴란드어, 체코어 등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의 지역 방언을 잘 알게 되었다. 그의 뛰어난 언어 능력을 눈여겨 본 지도교수들 중 예비역 피터 휠러 중령이 있었고, 그는 톰에게 비밀정보부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는다. 하지만 톰은 자신은 그런 조직에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제의를 거절한다.
그러나 얼마 후 톰과 관계를 맺던 재닛이 살해되며 톰은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어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이때 휠러 교수와 그가 속한 조직은 토마스가 조직에 들어온다면 사건을 그대로 종결시키고 토마스를 확실하게 보호해 주겠다고 제안하는데….
평범한 행복을 바랐을 뿐인데 남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을 바쳐야 했던 불운한 남자, 토마스.
그런 남자를 사랑하여 결혼하고 기나긴 기다림의 삶을 이어가는 여자, 베르타.
헤어 나올 수 없는 삶이라면 그 삶에서 가치를 찾고 멋진 삶이 되게끔 노력했지만, 거짓과 음모 위에 설계된 국가의 도구로서의 삶에서 점차 본연의 자신은 희미해지고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토마스를 보면서 그가 투프라의 정보부 가입을 강요당할 때 떠올렸던 '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가 자꾸 머리에서 떠올랐다.
그렇다, 토마스는 더 이상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없었기에 그의 순수한 의지에 의한 진정한 토마스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을 지도 모른다.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도 정당시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토마스의 모습, 그러면서 어떠한 주관도 없이 맹목적으로 영국이라는 나라에 충성하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그저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베르타는 그런 남편을 하염없이 인내하고 기다리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물론 토마스가 죽었다고 여겨졌을 때는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잃어가고 절대 완성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들 삶의 종점은 과연 어디일까?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서로의 삶을 각자 살아가는 베르타와 토마스를 보면서 또 다른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한 국가가 전체를 위해 개인의 삶의 희생과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상황을 보며 국가의 존재의 이유를 되새겨 보았으며, 목적을 위해 과연 어디까지 수단이 정당시 될 수 있을 것인가 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모든 내용들이 단순한 사건 서술이 아닌 베르타와 토마스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함께 의미를 더하며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일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마냥 화려하고 멋지게만 그려진 허구의 스파이가 아닌 현실에서의 실제 스파이의 삶의 애환과 정체성의 혼란, 그 주변인들의 고통 등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소설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