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문신한 소녀
조던 하퍼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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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전역에 내려진 사형 명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소녀와 아버지의 로드 스릴러!

묵직한 액션과 가족애, 쫓고 쫓기는 긴박한 추격전이 난무하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소설!

 

 

   ‘온 세상이 널 쫓고 있어!’

 

   <죽음을 문신한 소녀>는 일단 새빨간 표지의 강렬함에 압도당하고, 자동차 한 대가 조준경에 정확히 포착된 속표지를 보며 숨 막히는 추격전을 향한 기대감으로 한껏 차오르게 된다. 또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범죄심리수사물 <멘탈리스트>와 영화 ‘배트맨’의 프리퀄로, 고든 경감이 형사로 재직하던 시절을 다룬 드라마 <고담>을 제작한 조던 하퍼가 이 소설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완벽해 보인다.

 

 

 

 

 

 

냉혹한 액션, 숨막히는 추격전, 살아남기 위해 내가 강해져야 한다

 

 

   잔혹한 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펠리칸 베이 교도소. 그곳에 ‘아리안 스틸’이라고 하는 범죄조직의 두목 크레이그 홀링턴이 복역 중이다. 다른 죄수와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지만 사실상 다른 이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신적인 존재다. 그에게는 발과 입, 눈과 손이 되어줄 많은 이들이 있다. 그가 쓴 복수의 영장을 대신 집행해 줄 이라면 감옥 안이든, 감옥 밖이든 어디든지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추종하는 미국 전역의 조직원들에게 사형 집행 명령을 내린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네이트 맥클루스키와 그의 여자 에비스, 그리고 그의 딸 폴리까지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이다.

 

 

 

 

 

   출소를 한 주 앞두고 있던 ‘파란 명사수’ 네이트는 크레이그 홀링턴의 동생인 척이 밖에서 활동할 조직원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단숨에 거절한다. 이 일을 맡으면 감옥에서 나와 아리안 스틸이란 조직의 감옥에 다시 들어가는 꼴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절이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네이트는 그 자리에서 척의 목숨을 거둔다. 결국 동생인 척을 죽인 자가 네이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크레이크 홀링턴은 잔혹한 살인 명령을 내리고, 네이트는 출소하자마자 에비스와 그녀의 현재 남편인 톰을 찾아갔다가 이미 집안에서 살해당한 것을 목격하고 만다. 명령이 떨어진 순간 이미 살인은 집행되었고, 이제 남은 자는 자신과 딸 폴리만 남았을 뿐이다.

 

 

 

   명사수의 눈이란 별명을 가진 네이트의 딸 답게 파란 눈을 가진 폴리는 평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보다 애착 인형인 갈색 곰 인형에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자신이 금성에서 왔다고 생각할 만큼 독특한 구석이 있는 열한 살 소녀다. 엄마와 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던 그녀 앞에 느닷없이 아빠인 네이트가 나타난다. 감옥을 탈출하지 않고서야 학교 앞에 아빠가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한 폴리는 특유의 영민함으로 뭔가가 평소와 많이 달라졌음을 직감하고, 그때부터 아빠를 따라 도망자가 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폴리는 그 책을 계속 읽었는데 거기서 금성이 겉보기에는 아주 고요해 보이지만 실제 금성에 가서 보면 그 고요한 표면은 사실 산성물질로 이뤄진 구름 덩어리들이고, 그 밑에 있는 고요한 하늘 밑에는 들쭉날쭉한 바위와 울부짖는 폭풍 밖에 없다고 했다. 안에서 격렬하게 폭풍이 치는 이 진주 빛 행성에 대해 읽고 나서 그 생각이 폴리의 뇌 속에서 점점 커져가면서 뚜렷한 형태를 갖췄다. 나는 금성에서 왔다는 생각이. 폴리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도 밖에서 보면 조용하고 차분해 보이지만 마음속은 산성 폭풍이 울부짖고 있다고. 자신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왜 밖은 조용하지만 마음속에는 그렇게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알았다.

나는 금성에서 왔으니까. / 28p

 

 

 

   네이트는 자신과 딸의 목숨을 조여 오는 아리안 스틸 조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먼저 폴리를 데리고 스톡턴으로 가서 거기 있는 사촌들에게 아이를 맡길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죽은 에비스와 톰을 위해 복수를 하고, 자신과 딸에게 내려진 사형 집행 명령을 철회하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곳곳에 놓인 덫과 감시망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그는 이제 이 아이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 하나만이 그의 인생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때부터 네이트는 딸 폴리가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자신이 형으로부터 배운 삶에 대한 이치들을 공유하며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강해지려면 먼저 약해지는 걸 느껴야 해.” 네이트가 말했다.

“에?”

“닉 삼촌이 예전에 자주 이렇게 말했어. 근육을 강하게 카우고 싶으면, 근육의 힘이 다 풀리면서 스스로 약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밀어 붙여야 한다고. 인생의 이치가 대부분 그래. 시종일관 자신이 강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더 이상 강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야.” / 143p

 

 

“세상은 네가 그냥 두 손 놓고 앉아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그냥 당하고 있기만 바라지.” 그는 그녀에게 계속 잽을 날려서 그녀를 쓰라리게 만드는 동시에 자신도 가슴 아파 하고 있었다.

“세상은 네가 스스로를 두렵게 느끼길 원해. 넌 주먹이 날아오도록 놔둬야 해. 그것을 받아들여. 그럴 준비가 돼 있어야 해. 한 대 맞았다고 해서 정신을 놓고 미쳐버리면 안 돼.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져도 안 되고. 넌 그 주먹을 맞고 거기 맞서 주먹을 날려야 하는 거야.” / 158p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여느 스릴러 영화처럼 연약한 소녀인 딸을 지키기 위한 아빠의 강인한 액션을 부각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특한 구석이 있지만 영특하고도 아빠의 유전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딸 폴리가 제 몸을 지키기 위한 방법들을 터득해가며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아빠와 딸이 점차 가족애를 찾아가는 모습 역시 신파적이지 않으면서도 담백하게 연출되어 있다.

 

 

 

   무엇보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각 인물들에 초점을 맞춰가면서도 속도감 있는 전개를 펼침으로써 스릴러라는 소설적 장르를 제대로 보여준다는 점도 흥미를 더한다. 간간이 코리아타운 및 한국 음식,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존 박이라는 이름의 형사가 등장한다는 것도 한국 독자들에게는 재미있는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심장이 쫄깃쫄깃 끝까지 기대감과 긴장을 놓치지 않게 하는 <죽음을 문신한 소녀>는 한 번 손에 쥐면 주르륵 읽힐 만큼 흡인력 있는 소재와 전개로 스릴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책이다. 과연 이들 부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족 모두에게 사형 집행을 내린 크레이그 홀링턴에게 복수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등장인물을 가상 캐스팅 해보는 재미도 있고, 어쩐지 후속작을 기대하게 되는 부분도 있어서 작가의 차기작도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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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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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축, 신화와 전설의 축을 정교하게 얽어낸 폴란드 문학의 정수!

놀랍도록 신비한 문학적 정취를 이루어낸 올가 토카르축만의 기묘한 판타지!

 

   ‘폴란드’ 하면 내겐 무엇보다 아우슈비츠의 역사로 통하는 나라다. 일명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며 나치스가 유대인 대량학살을 감행한 바로 그곳. 1939년 나치스 독일의 침입을 시작으로 서부 지역은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분할 점령된 뒤 유대인 학살과 냉전 체제, 사회주의 시대가 중첩된 그 거칠고 무거운 역사를 견뎌온 만큼 폴란드 문학하면 독립에의 갈망,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개인의 역사들이 무게를 이루는 작품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그래서 현재 폴란드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며 가장 권위 있다는 니케 문학상에서 ‘독자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는 이유로, 비교적 근래에 읽었던 고전 <이별 없는 세대>를 떠올리며 전쟁이라는 공포의 상흔들을 문학이라는 힘을 빌려 남기려 했던 또 하나의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으로, 한편으로는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쩌면 인류에 대한 이야기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은 작은 마을이다.’

   <태고의 시간들>은 마치 ‘아주 멀고도 먼 아득한 옛날’을 더듬게 하는 어느 신화 속의 마을 혹은 실제 폴란드 어느 작은 마을의 지명 같은 낯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치 소우주를 연상케 하는 이곳은 대천사 라파엘, 가브리엘, 미카엘, 우리엘이 동서남북의 경계를 지키고, 깊고 어두운 흑강과 생기발랄한 백강이 가로지르며 온갖 욕망과 성스러운 우화들이 뒤섞인 공간이다.

 

 

 

 

 

 

   이야기는 1914년 여름, 느닷없이 러시아 군인이 찾아와 남편 미하우를 전쟁터로 끌고 가면서 홀로 뱃속의 아이를 키워야 했던 게노베파를 중심으로,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견뎌내야 했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펼쳐진다. 술 취한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것으로 삶을 연명하다 숲속에서 홀로 아이를 낳고 치유와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된 크워스카, 호황을 누렸던 사업이 전쟁으로 인해 몰락하고 기묘한 게임에 빠져 스스로 침잠의 상태에 빠진 상속자 포피엘스키, 독일군과 러시아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부유한 우클레야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하지만 늘 태고 너머의 세상을 동경하는 크워스카의 딸 루타 등 한 가정의 삼대에 걸친 장엄한 서사를 여러 인물들과 매우 유기적으로 이끌어간다. 이처럼 <태고의 시간들>은 바로 이 현실 같기도 허구 같기도 한 태고라는 마을 속에 20세기 폴란드 역사의 처절한 현실을 담아냄과 동시에 이곳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치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듯한 기묘한 판타지를 펼쳐나간다.

 

 

 

예슈코틀레는 색채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게 흑백이거나 회색빛이었다. 광장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사내들은 전쟁 얘기에 열을 올렸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시민의 소유물들이 거리 곳곳에 널려 있다, 사람들은 총탄 앞에서 도망치고 있다, 형제가 형제를 찾아 헤맨다, 러시아인과 독일인 중에 누가 더 나쁜 놈들인지 알 수가 없다, 독일인들이 살포하는 독가스로 인해 사람들의 눈이 터져나가고 있다, 기근이 수확기보다 먼저 찾아올 것이다 등등. 전쟁을 첫 번째로 발견된 병균과도 같아서 뒤를 이어 또 다른 병균들이 들끓게 마련이다. / 11p

 

 

상속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러움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고난과 죽음, 부패를 목격했다. 예슈코틀레 곳곳을 걸었다. 유대식 도살장과 고리에 걸린 신선하지 못한 고기, 셴베르트의 가게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는 얼어붙은 걸인, 아이의 관을 운반하는 작은 장례 행렬, 광장 옆 나지막한 집들 위를 낮게 유영하는 구름과 사방으로 내려앉아 모든 걸 지배하는 어스름을 보았다. 이 광경은 서서히, 그리고 부단히 거듭되는 분신을 떠올리게 했다. 그 속에는 시간의 불길에 희생양으로 던져진 인류의 운명, 모든 생이 깃들어 있다. / 43p

 

 

 

 

 

   흥미로운 것은 ‘게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파베우 보스키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처럼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짤막한 단편 또는 에피소드들을 전혀 이질감 없이 유기적으로 엮어나간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집의 시간’, ‘버섯균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과 같이 동식물, 신과 천사, 마을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주체들을 의인화하여 태고의 모든 것들이 지닌 존재의 의미에 가치를 부여하는 점 역시 독특하다. 한 마을의 역사 혹은 전체 인류의 역사란 이 모든 개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어 쌓아올려지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왕풍뎅이 언덕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한 달에 한 번, 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밤이 되면, 그녀가 거기에서 내게 저주를 퍼붓곤 하거든.’ 그래서 달에게 물었어요. ‘무엇 때문에 그녀가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거죠? 인간의 용서가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러자 달이 대답했죠. ‘인간들의 고통이 내 얼굴에 검은 주름을 새기거든. 이러다 언젠가는 인간의 아픔 때문에 사그라들고 말 거야.’ 달이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온 거랍니다.” / 137p

 

 

버섯균은 식물도, 동물도 아니다. 천성적으로 햇볕에 친화적이지 않기에 태양으로부터 아무런 힘도 흡수하지 못한다. 따뜻한 것이나 살아 있는 것들은 버섯균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천성적으로 따뜻하지도 않고, 생기도 없기 때문이다. 버섯균이 존재하는 건 땅속에 배어들어 있는 즙 또는 썩거나 죽은 것들의 찌꺼기에 남아 있는 즙을 빨아 마시기 때문이다. 버섯균은 죽음의 생이고, 부패의 생이며, 모든 죽은 것들의 생이다. / 225p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면 바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독단적이고 고집스러운 데가 있는 아버지를 떠나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가고자 했던 딸 아델카가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집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몰래 들고 나온 어머니의 커피 그라인더를 꺼내어 버스 안에서 천천히 돌리는 모습이다. 비록 아버지의 집은 예전의 온기를 잃고 여전히 완고한 뜻에 가로막혀 있지만 외할머니인 게노베파가 그러했듯, 어머니인 미시아가 그러했듯 아델카 역시 어머니의 삶이 연속될 것이라는 것과 그러한 모성이 삶과 우주를 지탱하며 순환될 것임을 전하고자하는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태고의 시간들>은 근래에 드물 정도로 정교하고 매혹적인 서사를 갖춘 작품이다. 20세기 폴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위에 환상적인 소재가 가미되어 한편의 우화 혹은 신화 같은 현실을 펼치는 이와 같은 전개는 가히 독창적이면서도 완성도가 높아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각종 수식들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다만 은유적인 표현 및 현실인지 허구인지 모를 초현실적인 어법들이 소설을 담백하게 읽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그만큼 깊이 있고 독자적인 힘을 갖춘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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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서툰 어른들 때문에 아팠던 당신을 위한 책
린지 C. 깁슨 지음, 박선령 옮김 / 지식너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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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가 자녀의 감정에까지 미치는 영향!

정서적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과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에게 꼭 추천하는 책! 

 

 

   나는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성숙한 편이어서 ‘애늙은이’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누가 봐도 도리에 어긋나거나 나쁜 행동은 하지 않았고, 공부하라는 말씀 한번 없으셨던 부모님에 비해 성적도 제법 나온 편이었기에 부모님 입장에서는 착실하고 착한 딸임에 틀림없었다. 이 때문일까. 나는 그 기대감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나의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더 중요시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러다 최근에 들어서야 조금씩 ‘왜 나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거지?’ 아니, ‘내 진짜 감정은 뭐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내면이 보내는 메시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괜찮다는 말로 포장하며 나의 진실된 감정을 외면하고 사는 게 잘못된 일이란 걸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나의 아이에게까지 이를 강요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일단 ‘괜찮아, 울지 마’ 하고 아이를 다독이는 데 급급했던 나머지 아이의 감정이 어떠한지 헤아리지 않고 상황을 대충 무마시키려고만 했던 데다 ‘남자 애가 이렇게 여려서 어쩌나’하고 푸념하며 아이가 제 속 감정을 꺼내놓으려 할 때마다 그저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누구보다도 어른스럽고 정신적으로 성숙하다고 믿어왔던 내가 사실은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미숙한 부모였단 사실을 깨닫게 해준 <감정이 서툰 어른들 때문에 아팠던 당신을 위한 책>을 읽으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부모니까, 어른이니까, 이 어린 아이보다 성숙하다는 이유로 아이의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내 모습에 깊은 반성을 했던 것은 물론, 나의 성격 또한 부모님에게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임상심리사이자 심리학자인 이 책의 저자 린지 C. 깁슨은 이렇데 말한다. ‘또래보다 성숙했고 일찍 철이 들었던 당신이 지금 당신의 아이 앞에서 어른스럽지 못한다도 느낀다면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비극적인 가족사나 학대 같은 건 없었는데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분노나 외로움, 버림받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단순히 성격의 문제도, 당신이 대인 관계에 유독 서툴기 때문도 아니다. 당신의 과거, 무엇보다 부모와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라. 교감이 필요할 때 거절당한 기억이 있는지, 감정을 무시당한 적이 있는지, 혹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른 수준의 책임을 감당한 적은 없는지.’라고. 나의 미성숙한 감정이나 외로움이 반드시 나에게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는 희망을 부디 이 책을 통해 얻길 바라며.

 

 

 

상처투성이 마음을 안고 자란 모든 어른아이를 위한 마음 성장 프로젝트

 

 

   <감정이 서툰 어른들 때문에 아팠던 당신을 위한 책>은 지금 나를 괴롭히고 외롭게 하는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심리서다. 임상심리사이자 심리학자인 저자는 다년간의 독서와 연구를 통해 줄곧 이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정서적으로 미숙한 부모가 자녀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감정적 반응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을 때 자기 자녀, 특히 감정이 예민한 자녀에게 어떤 식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함으로써 정서적 친밀함을 거부하는 부모 때문에 겪는 고통과 혼란을 치유하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한다.

 

 

 

 

 

 

   책은 1장에서 3장에 걸쳐 정서적으로 미숙한 부모가 성인이 된 자녀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의 특성 및 그런 부모가 일으키는 다양한 관계 문제를 알아본다. 정서적으로 성숙한 부모는 자녀의 감정 흐름에 익숙해서 아이의 기분을 금방 알아차리고 그들의 감정을 관심 있게 받아들인다. 자기가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이가 느끼게 하고, 감정적인 문제를 부모에게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이때 아이는 위로를 구할 때든 즐거운 일을 함께 나눌 때든, 부모와 안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즉, 정서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부모가 자녀를 거부하거나 감정적으로 방치하는 경우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그렇게 대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자라게 된다고 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하다. 자신감이 낮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걸 요구하지 못하고 수줍어하며 관심을 끄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자신의 요구를 알리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과거에 겪은 거부가 반복될 것이라고 예상함으로써, 이 아이들은 스스로를 억압하고 더욱 큰 정서적 외로움을 조장하게 된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가 여전히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좋은 부모는 공감과 정신화 능력이 뛰어나다. 자녀의 마음 상태에 관심을 가지므로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를 바라보고 이해해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또 기업, 군대, 또는 타인의 동기를 이해하고 예측하는 게 중요한 모든 상황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때 필수적인 특성이다. 공감은 사회적, 직업적 성공에 필수적인 감성 지능의 기본 요소다. / 64p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감정을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건 가족의 관습을 위반하는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가정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들은 이런 깊은 감정을 표현하거나 심지어 경험하기만 해도 수치심을 느끼거나 벌을 받을 수 있다고 배운다. 그리고 그 결과 정신요법 연구원인 리 맥컬로와 동료들이 ‘감정 공포증’이라고 명명한 증상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의 가장 사적인 감정을 나쁜 행동에 대한 판단과 연결시키는 법을 배우게 되면, 더 이상 정서적 친밀감과 관련된 감정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진정한 감정과 충동을 경험하는 대신, 진짜 반응을 억제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발전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 74p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들 중에는 아기가 자기 기분을 좋게 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품은 이들이 많다. 아이들에게도 자기 나름의 욕구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이런 부모는 극심한 불안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감정이 극도로 미숙한 사람들은 이럴 때 체벌이나 갖다버리겠다는 위협, 창피 주기 등을 비장의 무기로 활용하여, 아이의 희생을 발판 삼아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면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 100p

 

 

 

 

 

 

   4장에서는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의 4가지 유형을 통해 우리가 어떤 종류의 양육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감정적인 부모, 극성스러운 부모, 수동적인 부모, 자녀를 거부하는 부모가 바로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수동적인 부모’의 유형 아래에서 양육된 편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강박적일 만큼 목표 지향적이며 다른 사람을 비롯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듬으려고 함으로써 자녀의 삶을 꾸려나가는 부분에서 계속 통제하고 간섭하며 자녀의 독특한 관심사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선별적으로 칭찬하고 밀어붙이는 ‘극성스러운 부모’만큼은 경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어 5장과 6장에서는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의 육아가 낳게 될 가능성이 높은 ‘내부 발산자’와 ‘외부 발산자’라는 두 가지 유형을 소개한다. 특히 내부 발산자들은 통찰력이 매우 뛰어나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극히 민감하다. 이들은 정서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감정이 미숙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은 이들에게 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부 발산자들은 강렬한 감정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걸 피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들은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아도 잘 살아간다고 착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감정적인 무관심을 견뎌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데 말이다.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의 자녀들은 ‘선량함’이란 부모가 먼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최대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배운다. 내부 발산자들은 본인의 감정과 욕구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최악의 경우 수치스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알게 되면 상황은 빠르게 변할 수 있다. / 271p

 

 

 

 

 

 

   이렇듯 책을 읽다보면 부모의 정서적 미숙함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정서적 문제가 반드시 나에게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제 저자가 7장과 10장에 걸쳐 소개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우리는 부모의 미숙함이 야기한 죄책감과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익혀나간다면 보다 긍정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을 이해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는 게 중요하다. 독립적인 성인인 여러분은 그들의 이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부모와 여러분이 원하는 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들과의 모든 상호작용을 더 만족스럽게 만들 수는 있다. 원할 때는 예의 바르게 자기 소신을 말할 수 있고, 굳이 변명할 필요 없이 그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부모에게 이런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면, 부모가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여러분이 감정을 표현하는 목적은 부모를 변화시키기 위한 게 아니라 여러분 자신에게 진실하기 위해서다. / 290p

 

 

 

   저자는 정서적 외로움의 원인을 알아내는 것은 보다 만족스러운 관계 맺기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지금껏 나를 괴롭혀 왔던 정서적 외로움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 책을 통해 원인을 찾고 조금이나마 떨쳐낼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나처럼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나와 아이가 함께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이 책과 함께 고민해보셨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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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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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문학을 관통하는 한국대표작가 29인의 짧고도 강렬한 삶의 단편들!

차가운 위선과 기막힌 반전의 묘미로 버무려진 말랑말랑한 생의 맛!

 

 

   고 박완서 선생을 기억하며 강화길 작가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할 때면, 나는 늘 박완서 선생님을 떠올린다.’고 말한다. 김사과 작가는 ‘쥐보다 비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도시의 인간들을 누구보다 사랑했다’고, 정용준 작가는 ‘박완서 작가는 그 자체로 한국 문단의 아주 중요한 꿈’이라 하였으며, 함정임 작가는 ‘탕아가 돌아올 수 있는 집, 안길 수 있는 어머니. 선생님은 소설의 어머니이고, 소설의 집’이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소설의 가치를, 생의 진한 맛을, 사람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스스로 보여준 박완서 작가의 뜻을 여전히 기억하고 그 발자취를 밟아나가는 후배 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또 다른 방식에서 우리 문학의 자부심을 마주하는 일일 것이다. 때문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29인이 뜻을 모아 박완서 문학의 향수를 나름의 방식으로, 존경과 애정을 담아 쓴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이 기획이 새삼 의미 있게 느껴지고 이후에도 지속가능한 것이기를 바란다.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1인으로서.

 

 

 

삶에 대한 섬세한 시선들, 그 날카로운 생의 묘사들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박완서 문학의 뿌리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29명의 한국대표 작가들이 모여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의 힘을 담은 소설집이다. 생전에 박완서 작가가 쓴 콩트 형식의 짧은 소설만을 모아 엮은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 재출간됨과 동시에 나란히 선보이게 되어 의미가 더욱 크다. 특히 최수철, 조경란, 백민석, 백가흠, 김숨, 조남주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중견작가에서부터 우리 문학을 이끌어가는 젊은 작가들이 한 데 모였다는 점에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박완서’라는 이름 아래에 이토록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독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다정하지만 무능력한 남편을 맞아 하루하루를 고비처럼 느끼며 가족을 건사했던 외할머니를 추억하는 강화길의 「꿈엔들 잊힐리야」, 술김에 아들을 위해 비싼 레고 장난감을 샀다가 아내에게 환불해오라는 소리를 듣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부자의 쓸쓸한 모습을 그린 이기호의 「다시 봄」, 먹고 싶은 거 못 먹고 하고 싶은 거 못 하면서 오직 돈만 모았던 악바리 수부 이모가 가족들에게 보여준 헌신에 마음을 울컥하게 하는 조경란의 「수부 이모」 등 인간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아낸 이와 같은 작품들은 꼭 박완서 문학의 그것과 닮아 있다.

 

 

하지만 며칠 동안 선영의 마음은 빈대떡처럼 여러 번 뒤집혔다. 정작 안아줘야 할 사람을 안아주지 못하면서 늙어가는 인생, 후회하면 무엇 하나. 인생 뭐 있어? 늙은 어머니를 안아주지 못했던 허전한 품에 그의 어린 딸을 대신 안아주면 어때. 그리고 이제는 그녀도 누군가의 따스한 품에 안기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 「안아줘」 중에서 32p

 

 

 

   우리 삶의 위선과 모순을 한 편의 시트콤처럼 엮어내 위트 있는 반전을 끌어내는 작품들도 단연 눈에 띤다. 수정 테이프를 찾으러 탐정을 찾아간 의뢰인이 오히려 탐정의 심부름을 하는 기막힌 상황이 연출된 손보미의 「분실물 찾기의 대가3-바늘귀에 실 꿰기」, 크리스천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선생님 말씀에 부랴부랴 초등학교 때 세례를 받았던 기억을 더듬어 목사님을 찾으러 다녔다가 실패하자 이번에는 불교 인재 전형을 통해 주지 스님에게서 추천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게 되는 엄마와 딸의 모습을 통해 입시과 진학의 우울한 현실을 위트 있게 그려낸 조남주의 「어떤 전형」, 이 세상 최고의 게으름뱅이로 불리는 구평모라는 인물을 통해 속도만능주의에 빠진 사회의 허와 실을 보여주며 기막힌 결말을 끌어내는 최수철의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자의 죽음」이 바로 그러하다.

 

 

 

만 원에 일곱 장 하는 돈가스는 ‘가정의 평화’라는 성찬식 풍경을 완성하며 저녁 식사로 준비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을 감춘 채, 가엾고 무해한 자기 딸의 평화에 금이 가지 않도록 고기를 질겅질겅 씹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보다 오래가는 시트콤의 힘이라고, 나 자신의 인생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얼마나 산문적인가. / 「등신, 안심」 중에서 52p

 

 

민수 씨는 학창 시절에는 한 번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4.19 시민혁명이나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시의 열사들과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수줍은 성격인 그는 광화문 사거리로 뛰쳐나가는 대신, 애꿎은 고객센터 상담원에게 고함을 지르고 흐느끼기도 하면서 빠른 환불 처리를 애걸했다. / 「냉장고 멜랑콜리」 중에서 106p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의 말대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자인가,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려는 자인가, 허황되게 마비와 각성 운운하는 과대망상가인가, 아니면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우울증 환자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아내를 착취하며 무위도식하는 기생충인가.’ 그로서는 쉽게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그 모든 것이거나 그 모든 것이 아닌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대답이었다. /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자의 죽음」 중에서 302p

 

 

 

 

 

 

   한편으로는 박완서 작가가 여성 문학을 대표했던 만큼 우리 사회 속 여성들의 위치와 비애를 그려낸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쌍둥이를 키우느라 경력이 단절된 지혜가 이기적이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자신의 경력을 되찾고 싶어 하는 우울한 현실을 그려낸 윤이형의 「여성의 신비」, ‘아라’라는 소설가를 통해 오랜 기간 그저 ‘여성적 소품’으로 취급당했던 문단의 편견을 꼬집으며 세대와 성별을 초월한 박완서 작가의 뒷모습을 따르고 싶다는 뜻을 직접적으로 밝히는 정세랑의 「아라의 소설」, 계약직 교수 채용 심사에서 잘 봐주십사하고 찾아온 윤석이 한때 자신을 버리고 더 좋은 조건의 민희를 만나 결혼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속물근성의 씁쓸한 맛을 되새기는 조해진의 「환멸하지 않기 위하여」등이 대표적이다. 비록 짧은 소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여성 비하와 편견을 사실적이면서 현실감 있게 표현해낸 점이 마음을 끈다.

 

 

 

어떻게 보면 그런 ‘펑예’도 허공의 눈과 비슷한 거라고 여자는 말했다. 제목에 시한부임을 밝히고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너무 단단한 지반은, 어딘가 뿌리를 내리고 보관될 위험이 있는 지반은 부담스러우니까. / 「첫눈 마중」 중에서 152p

 

 

본의 아니게 이것도 저것도 결국 잘해낼 수밖에 없게 된, 사실은 하나도 부족하거나 무능하지 않은 여자들끼리 그런 일로 연락을 그만두게 되기도 한다는 건 얼마나 이상한가. 이제 지혜는 거기까지는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어떤 나이를 지나면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더 많다는 것을 수긍하게 된다. / 「여성의 신비」 중에서 172p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하고 말했다. / 「언제나 해피엔딩」 중에서 120p

 

 

 

 

 

 

   너무나 일상적인 것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말랑말랑하면서도 씁쓸한 생의 맛을 고스란히 전달했던 박완서 작가였던 만큼 그녀의 작품을 오마주한 오늘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그 이미지가 은근히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박완서 문학을 답습하지 않고 저마다의 개성을 잃지 않으며 자신만의 시선으로 삶의 기민한 움직임을 포착해낸 그들의 작품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좋다. 이왕이면 함께 출간된 박완서의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먼저 읽고 난 뒤에 이 책을 읽어보면 더욱 그 느낌이 잘 전달되겠지만, 꼭 그러하지 않아도 충분할 듯하니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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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거대한 뜻밖의 질문들 - 생명의 탄생부터 우주의 끝까지
모리 다쓰야 지음, 전화윤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생물학, 인류학, 물리학, 뇌과학을 넘나드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왜 죽는가에 대한 불명확한 해답에 다가가기 위한 대담집!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이에 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나와 남편의 얼굴을 반반씩 쏙 빼닮아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았을 때, 늘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어주셨던 할머니가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어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오롯했던 육신이 한줌의 재가 되어버리는 광경을 보며 가슴이 사무쳤을 때 나는 그러한 질문들을 마주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들은 나 한 사람을 비롯하여 누군가의 삶으로 증명하기에는 너무나 철학적이고 거대한 명제여서 제자리를 맴돌다가 이내 생각을 멈추게 한다.

 

 

 

   언젠가 철학과 수업에서도 이를 주제로 하여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하나 명징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최첨단 과학을 연구하는 이과적 언어와 사고를 가져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답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발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영원한 명제에 숨은 진실 한 자락을 엿보게 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동기에서 비롯되어 <이상하고 거대한 뜻밖의 질문들>의 저자 모리 다쓰야는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과학계 지성과의 대담을 연재하기 시작하였음을 밝힌다.

 

 

 

   자칭 100% 문과형 인간임을 고백하며 대담이 제대로 이루어질지도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도, 이 역시 명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저자의 시도가 무척 흥미롭다. 제목의 그것처럼 정말이지 이상하고 거대한 뜻밖의 질문들의 연속이자, 나 역시 철저한 문과형 인간으로 과연 이 책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려가 앞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과학자들의 다양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자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까지도 가능케 하는 의미 있는 시도로써 이 책은 또 다른 생각의 지평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경계가 없는 ‘세계의 일부’다

 

 

   ‘인간은 왜 죽는가’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총 11장에 걸쳐 거대한 질문과 마주한다. 생물학자, 인류학자, 진화생태학자, 물리학자, 뇌과학자 등에 이르기까지 일본 과학계 최고 지성들과의 대담을 통해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진화란 무엇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죽음을 결정하는가’, ‘우주에는 생명이 있는가’, ‘우주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나는 누구인가’, ‘뇌는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과학은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주제를 이끌어낸다.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대명제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너무나 복잡하고 때로는 엉뚱하리만치 장황한 질문 앞에서 그들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난색을 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혹은 현재까지 밝혀진 다양한 이론을 바탕으로 최대한 의미 있는 답변들을 해나간다.

 

 

 

“역설적이지만 생물에게는 그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스스로를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을 멈출 수 없었죠. 그러나 아무리 튼튼하게 만든다 해도, 결국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질서가 파괴됩니다. 이를테면 조명 기구는 망가지기 전에 알아서 전구를 교환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부를 늘 빛나게 하는 방법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 생명을 얻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죽고 다시 만들어진다고도 할 수 있어요.” / 57p

 

 

 

 

 

 

   책에서는 다윈주의, 후성유전학, 양자론, 엔트로피, 텔로미어, 용불용설, 성선택설 등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거나 혹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과학 이론들을 통해 각각의 주제들에 접근하려 한다. 생명은 연쇄적이어서 삶과 죽음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 인류는 암컷의 선택 즉, 성 선택이라는 이점과 직립보행을 통해 함께 진화했다는 점, 우리는 그 시대의 환경에서 계속 선택받아왔다는 점, 지구의 생물은 산소호흡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비로소 이만큼 진화할 수 있었다는 점과 그럼에도 죽음의 기원이 산소호흡이라는 설까지 과학을 잘 알지 못하는 나까지 빠져들게 할 만큼 매우 다양하고도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간의 뇌는 무게가 체중의 약 2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하루에 소비하는 칼로리는 전체의 20퍼센트에 달합니다. 즉 에너지(비용)가 아주 많이 들죠. 연비가 나쁜 기관입니다. 그래서 식생활에 여유가 있는 동물이 아니면 신경계는 진화하지 않습니다. 즉 조건이 웬만큼 좋지 않으면 뇌는 진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어떻게 뇌를 진화시킬 만큼의 여유가 생겼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역시 공동 번식 사회였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129p

 

 

“절대 죽을 수 없다는 사정 속에서 발생하죠. 박테리아만 봐도 한가로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바쁘게 살아가고 있어요. 외부로부터 다양한 물질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바쁘게 위험을 감지해서 대처하려면 에너지가 엄청나게 들어요. 왜 그렇게 바쁘냐 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포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방대한 양의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몸을 유지시키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존속시키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원동력인 겁니다.” / 171p

 

 

 

   소립자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생명의 탄생과 인류의 진화까지 이 거대한 주제를 오가며 드는 생각은 우리 인류가 얼마나 각별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믿음이 얼마나 왜곡된 것이고, 불명확한 것인지를 반성하게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생물들이 함께 살면서 다른 생태적 지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세대를 거치면서 유전적 진화에 성공해왔던 것과 달리 어떤 생태적 지위를 지향할 것인지,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적응하는 장기적 과정이 없는 이 거침없는 환경의 변화가 미래의 인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지 우려하는 목소리에 모두가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렇죠. 뭔가를 보거나 느끼는 건 대상에 대한 일종의 섭동입니다. 즉 특정한 무엇의 동적 프로세스죠.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인식한다는 것은 왜곡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망막으로 빛을 받아들이거나 고막으로 공기의 진동을 포착해 그걸 뇌로 해석합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삼차원의 세계가 망막에 비친 시점에서 이차원으로 왜곡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눈앞에 있는 이 커피 잔의 ‘실물’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죠. 보도한다는 행위도 사실을 왜곡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경우에 따라서는 무의식의 선호에 따라 왜곡하는 셈이죠.” / 335p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두 사이좋게 지내자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과거와는 다른 차원에 들어와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죠. 진화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혹은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관해, 전통사회의 상호부조 안에서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진화적 환경과 현대 환경의 엇갈림이 발생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미래에 무엇이 인간에게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이 인간행동진화론에서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 125p

 

 

 

 

 

 

   <이상하고 거대한 뜻밖의 질문들>을 읽다보면 사실 과학은 ‘어떻게’는 설명할 수 있어도 ‘왜’라는 질문에는 본질적으로 답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처음부터 저자의 질문들은 여전히 알 수 없고, 또 알 수 있을 리가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치열하게 고민할 것, 모순과 번민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 것.’의 중요성을 넌지시 던진 저자의 이러한 시도들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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