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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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섬세한 번역가 김남희의 소소하지만 웃음이 나는 일상 이야기!

그녀의 글에서 딸로서의 나, 엄마인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종종 이런 질문은 받곤 한다.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넌 뭐하고 싶으냐고. 그때마다 나는 ‘외국어 공부’라고 답한다.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글 실력으로 문학 하겠다 덤비기 전에 외국어 공부 바지런히 해서 번역가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번역가란 직업은커녕 번역의 중요성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다. 지금이야 잘 된 번역과 그렇지 않은 번역을 적당히 구분할 줄 아는 요량이 생겼고, 같은 작품을 두고도 누가 번역을 했느냐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나 결이 미묘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알 정도가 되었지만 그때는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며 읽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창작이 아니라고 해서 번역이 쉬울 리는 없을 터. 게다가 번역의 중요성과는 상대적으로 번역가란 직업에 대해서라든지 번역 일을 하지 않을 때의 일상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해서, 나는 단순히 한 베테랑 번역가의 에세이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가끔은 세상을 즐깁니다

 

 

   아마도 일본 소설 좀 읽었다는 사람들이라면 그녀를 모를 리 없을 듯하다. 혹은 책장에 꽂혀있는 일본 소설을 살펴보다보면 그녀의 이름이 적힌 책이 꼭 한 권은 나오지 않을까. 『애도하는 사람』,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카모메 식당』, 『츠바키 문구점』 등 수많은 일본의 유명 작품들을 한국 독자들과 만나게 해준 그녀의 이름은 바로 28년차 베테랑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권남희다.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는 번역가이자 아줌마라 불리기에 스스럼없는 중년의 여성이면서 한 아이의 엄마이자 또한 한 부모의 자식으로서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풀어쓴 글이다. 짤막하지만 삶의 흐름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그녀의 글은 매우 솔직담백해서 낄낄대며 읽는 맛이 있다. 책을 덮고 나올 때는 어쩐지 이모를 만나 한껏 수다라도 떨고 헤어진 듯한 기분이다.

 

 

 

   번역 전문가답게 1장 ‘하루키의 고민 상담소’, 2장 ‘잡담입니다’, 3장 ‘남희 씨는 행복해요?’에서는 번역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들이 주로 등장한다. 당신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한 번역가라는 것을 숨긴 채 고민을 써 보냈다가 무라카미 하루키로부터 답장을 받은 사연에서부터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어떤 작가의 책을 번역하셨어요?” 하는 질문에 이 작가는 아실까, 저 작가는 아실까 고민하느라 말 한 번 제대로 떼보지 못한 웃픈 사연하며, 편집자와 오해가 쌓여 본의 아니게 역자 후기가 수난을 당한 사연 등은 어렴풋하게나마 이 직업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 중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을 다수 번역한 이력으로 인해 매해 노벨문학상 발표일이 가까워지면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오는 것에 난색을 표하는 장면이 재미있다. 그녀는 인터뷰 요청이 오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개뿔도 아는 게 없습니다”라고. 심지어 무라카미 하루키가 받지 않아서 너무 기뻤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고, 인터뷰 요청을 받는 게 싫고 일본에 노벨문학상 안겨 주는 게 싫을 뿐이라고.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번역자치곤 참, 대범할 정도로 솔직하지 않은가.

 

 

 

태생이 쫄보라 결국 화살을 내게 돌리고 있는데, 편집자에게 사과 메일이 왔다. 그래서 해피엔딩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얼굴도 본 적 없는 편집자와의 사이에 산 같은 불편함이 남았다. 이제 그 출판사는 내게 번역을 의뢰하지 않겠지,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남았다.

그 편집자는 어떻게 그런 마인드로 회사 생활을 하지? 용케 잘리지 않고 잘 다니네? 하는 의문에 빠져서 한동안 본의 아니게 그 편집자 생각만 하고 지냈다.

일을,

너무 잘해.

게임 끝.

교정도 잘 보았고, 번역 누락 부분도 근사하게 번역해 놓았다. 화가 났던 마음은 교정지를 보며 눈처럼 녹고 그 자리에 고마움이 가득해졌다. / 45p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번역가의 서재’를 취재하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죄송합니다. 서재가 없어서요” 하고 거절하지만, 정말 없어서 거절하는 거라고는 믿지 않는 눈치다. 믿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참고로 내 작업 공간은 이렇다. 책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주방, 오른쪽에는 거실. 앞에는 텔레비전, 옆에는 소파, 발밑에는 멍멍이, 주부미(主婦美)가 철철 넘쳐 난다. 이러니 따뜻한 번역이 절로 나오는 게 아닐까?(웃음)

그래서 나는 번역가라는 수식어보다 ‘번역하는 아줌마’라는 말이 더 좋다. / 113p

 

 

 

 

 

 

   4장 ‘자식의 마음은 번역이 안 돼요’와 5장 ‘신문에 내가 나왔어’에서는 우리네 일상과 같은 가족과의 에피소드가 담겨져 있다. 중년의 나이에 이른 그녀는 이제 외출을 할 때면 딸로부터 “가서 말 많이 하지 말고, 자식 자랑하지 말고, 겸손하게 있다가 와. 그분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어떤 생각하며 사는지 잘 듣기만 해.”라는 말을 들으면서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역전되는 순간을 실감한다. 또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의 ‘갑 오브 갑’이 자식이라고, 가벼운 듯 무거운 듯 자식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순간이 올 때마다 ‘자식도 제 뜻이란 걸 갖고 태어났으니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뜻과 뜻이 일치하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충돌하니 꺾이든가 꺾든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유연하게 흘려보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향년 50세, 똑같은 무게가 어느 때는 더 무겁게 느껴지고 똑같은 어둠이 어느 때는 더 짙게 느껴질 때가 있음을 고백하는 대목에서 문득 얼마 전에 엄마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엄마는 갱년기 지나갔어?” 하고 물었더니 “지금 갱년기야”라고 대답했던 엄마. 나 사느라 바빠서 엄마 처지를 돌보지 못하고 있는 게 한없이 죄송스러웠던 그 순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옆에 50세 사람이 있거든 어지간하면 개기지 말아요.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들지 모르니”라고. 다들 알아서들 엄마에게 잘 하자. 당신의 엄마는 지금 갱년기 중일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가끔은 세상을 즐깁니다’에서는 일과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떠난 여행지에서의 일화들이 수록되어 있다. 마치 부산이라도 가듯 『츠바키 문구점』 속의 가마쿠라로 즉흥 여행을 떠난 사연, 특가로 마쓰야마로 떠난 여행에서 딸 정하와 돈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사연, 마스다 미리의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를 번역하다 동유럽 패키지투어를 감행한 사연 등은 곧장 그녀의 여행 속으로 동참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나도 언젠가 아이 한 명씩 데리고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면, 나이가 들어서라도 오랜 친구와 우정 여행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외출 준비의 귀찮음보다 외로움이 낫지, 나쁜 일로 연락 오는 것보다 휴대전화 조용한 게 낫지, 즐겁고 신나는 일 없지만 심심했던 어제처럼 별일 없는 오늘이 낫지. 내일도 무료한 오늘과 같은 날이면 좋겠고, 다음 달도 밍숭맹숭했던 이번 달과 같은 달이면 좋겠어. 이런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다. 어차피 내 성격이나 직업이 달라질 일은 없으니 집순이에게 최적화된 사고방식이다. 존재감 없던 어린 시절부터 나름의 생존 방식으로 굴려 온 행복회로인지도 모른다. / 240p

 

 

 

 

 

  유명 번역가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번역하는 아줌마’로 수식하는 그 소탈함 덕분일까.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속에는 어떤 거창하고 대단한 일화가 담겨 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편안하고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데가 있다. 아마도 그녀가 번역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따뜻하면서 섬세하고 편안하게 읽히는 것 또한 그녀를 닮아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 뜻밖의 대목에서 터지는 유머 같은 게 참 매력적이다. 앞으로 번역만 하지 마시고, 지금처럼 자신의 글도 써 주십사 이 자리를 빌려 부탁드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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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건축가다 - 자연에서 발견한 가장 지적이고 우아한 건축 이야기
차이진원 지음, 박소정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나면 새들의 작은 지저귐조차 달리 들린다!

생태 화가의 섬세한 관찰력과 손길로 완성해낸 놀랍고도 아름다운 새 이야기!

 

 

   지난 해, 우리 집에 작은 새 가족이 둥우리(둥지)를 튼 적이 있다. 빨래를 널어두는 베란다 쪽 슬레이트 지붕 안쪽에서 유독 새 소리가 크게 들린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집을 지어놓은 것이었다. 참 신기하다. 아무리 도심이라 할지라도 인근에 숲이나 나무가 없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여기까지 와서 둥우리를 튼 것일까. 더욱이 SBS 방송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를 시청하다보면 나뭇가지가 아니라 철사 토막, 비닐, 섬유 조각 같은 것들을 물어다가 둥우리를 튼 새도 종종 발견할 때가 있는데, 우리 입장에서야 이 모든 것이 놀라울 따름이지만 과연 새들의 안전에 문제가 없을지 걱정스럽다.

 

 

 

   이처럼 새와 인간은 먼 듯 가까운 듯 같은 환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새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심지어 지난 주에 아이와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딱따구리로 추정되는 새를 발견했는데, 그들이 왜 열심히 나무를 쪼아대는 것인지 그조차도 설명해줄 지식이 부족해서 미안해질 정도였다. 진즉에 『새는 건축가다』를 읽었더라면 딱따구리를 보며 신기하다고 소란을 피우느라 방해하지 않았을 테고, 그 놀라운 움직임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문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새 둥우리는 대자연의 일기장이다

 

 

   전 세계에는 9천여 종의 조류가 있다. 이들은 알 하나하나에 생명의 에너지를 담아 대를 잇는다. 또한 조류는 새 둥우리로 그들이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을 기록하는 동시에, 인류가 환경을 변화시켜온 과정을 기록하기도 한다. 과학자들이 새 둥우리 표본 속 둥우리 재료의 이산화탄소 함량을 비교해 지구온난화의 변천사를 탐구하고, 다른 시기의 같은 둥우리 재료를 비교해 대기오염 상황을 검사하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새 둥우리를 가리켜 ’대자연의 일기장’이라 표현한 『새는 건축가다』의 저자 차이진원의 말이 과언은 아닌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자연의 건축가라 불리는 조류들이 어떻게 집을 짓고 생활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놀랍다 못해 경이롭다. 특히 지적이면서도 우아한 새들의 지혜, 생명과 자연의 신비로움은 조류 덕후 연구가이자 생태 화가인 차이진원의 섬세한 손끝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 보는 이를 감동케 한다. 바느질에 능한 재봉새에서 깃털 달린 피카소 바우어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과 생태 습관에 관한 알찬 정보들은 또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조류는 봄에 노래를 부르며 구혼 소식을 전한 뒤 짝을 찾고 짝짓기를 하며, 둥우리를 짓고 새끼를 기른다.

번식철을 맞이한 대다수 새들에게 둥우리는 의지할 수 있는 거처로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알을 한데 모아주는 역할 이외에도 새 둥우리는 알을 따뜻하게 만들어서 부화시킬 수 있게 해주며,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가 포식자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기능도 한다. / 9p

 

 

조류는 대개 봄에 짝을 찾고 둥우리를 짓는다. 번식 기간은 새의 종류, 해발, 지리적 분포 등에 다라 달라진다. 타이완에서는 고지대에 사는 조류의 경우 이른 봄추위가 살을 에는 듯한 2월에 사랑 노래를 부르고, 저지대에 사는 조류는 그보다 1~2개월가량 늦다. 보통 고지대 조류는 3~5월, 저지대 조류는 4~6월이 번식 절정기다. 이 짧은 4개월 동안이 조류가 둥우리를 짓고 번식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적기이자, 조류가 둥우리를 트는 모습을 비교적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시기다. / 154p

 

 

 

 

 

 

 

  1장 ‘집짓기 선조와 무주택자’에서는 조류의 둥우리 건축 본능이 그들의 조상인 공룡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짚어보면서 타조와 일부 펭귄, 흰제비갈매기 등 둥우리를 짓지 않거나, 탁란 조류로서 다른 새 둥우리에 알을 낳아 기르게 하는 조류들을 소개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새들이 저마다의 둥우리가 있고 열심히 알을 부화시키며 새끼를 기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어떤 새들은 게으름을 피우며 남의 둥우리에 알을 낳고, 고된 양육 업무는 다른 새에게 떠넘긴 채 본인은 한량처럼 여유롭게 지내도 한다. 참 얄밉지 않은가.

 

 

 

조류의 둥우리 건축 본능은 그들의 조상인 공룡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공룡의 번식 계통은 파충류와 조류의 딱 중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공룡은 한 번에 알을 두 개 낳고(파충류는 한 번에 모든 알을 낳고, 조류는 한 번에 하나씩 알을 낳는다) 얕은 구덩이에 알을 수직으로 세워 배열했는데, 이 구덩이가 바로 둥우리의 원시 형태다. 소수의 악어와 구렁이를 제외하고 일반 파충류에게서는 자식을 돌보는 행동을 찾아볼 수 없다. 과학자들은 공룡에게는 이런 행동이 나타났을 거라고 추측했는데, 이 돌봄이 바로 조류 번식의 큰 특징 중 하나다. / 19p

 

 

 

  오랫동안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의 잔혹한 생존법칙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조류는 각양각색의 둥우리 건축 방식을 보여주게 되었다. 모든 새는 저마다의 환경 적응 방식에 따라 둥우리를 배치한다. 나무에서 활동하는 새는 나무숲에 둥우리를 짓고, 지상에서 활동하는 새는 대개 풀숲이나 바위 틈새에 둥우리를 숨겨둔다. 바다에서 생활하는 조류가 높은 산에 올라가 둥우리를 짓는 일은 없다. 어떤 새는 물결 따라 움직이는 수초처럼 보이게끔 수면 위에 둥우리를 짓고, 어떤 새는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덕없도록 튼튼한 나무 구멍 속에 둥우리를 짓는다. 어떤 새들은 인류의 건축물에 몸담으며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동남아 연해 지역에서 서식하는 금사연(금빛제비)은 번식철이면 침을 다량 분비해 둥우리를 짓는다고 한다. 금사연의 침은 아교처럼 끈끈한데,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공기와 접촉하면 단단하게 달라붙는다. 이것이 바로 자양제로 여겨지는 제비집, 즉 ‘연와’이며,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새 둥우리다. 특히 자바금사연과 흰배금사연의 둥우리는 순백색인데다 침 함량이 높고 불순물이 비교적 적어 이를 주재료로 값비싼 요리인 ‘관연’을 만드는 데 쓰인다. 폐를 윤택하게 하고 정력을 왕성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2장 ‘특이한 스타일의 건축가’와 3장 ‘재미있는 둥우리’에서는 조류의 특별한 행동과 더불어 다양하고 훌륭한 둥우리 건축 방식을 소개한다.

 

 

 

둥우리 아래에 매달려 쉼 없이 날갯짓을 하는 수컷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마치 암컷에게 “들어와 봐. 들어와서 한번 보라니까!”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암컷은 종종 그 둥우리의 생사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쥔다. ‘그녀’가 싫어하면 수컷은 둥우리를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한다. 반면 둥우리가 암컷 마음에 들면, 암컷은 풀잎을 물어와 둥우리 안에 깔고 수컷과 짝짓기를 한다. 이어서 둘은 둥우리 재료를 보충하고 구조를 강화하는 등 함께 마지막 단계를 완성한다. / 38p

 

 

구명 둥우리에 이토록 많은 장점이 있는데 왜 다른 조류는 구멍 둥우리를 짓지 않을까? 새가 동굴을 사용하려면 생리나 행동 측면에서 특별한 적응 방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동소조는 수직면에 위치한 구멍을 붙잡기 수월하도록 강하고 튼튼한 발톱이 있어야 한다. 나무줄기 위를 잘 걷는 딱따구리나 동고비가 대표적인 예다. 몸 크기에도 제한이 있다. 코뿔새, 수리부엉이, 올빼미처럼 대형 동소조도 있지만, 동소조 중 대다수는 체형이 크지 않다. 몸집이 작아야 구멍에 들어가기가 좋기 때문이다. 행동 측면에서 보면, 개방형 둥우리를 짓는 조류는 천성적으로 구멍 뚫는 일을 좋아하지 않고 틈조차도 싫어한다. / 63p

 

 

이 아파트 단지는 모든 입주민이 공동으로 관리한다. 집이 20~100개에 달해 약 400마리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내부 구조는 벌집처럼 생겼는데, 나무 아래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면 집으로 통하는 수많은 입구를 볼 수 있다. 공동 거주하면서 공동 번식을 하는 이 떼베짜는새들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정도는 새들 중에서도 유별난 편에 속한다. 손위 형제자매가 동생들 양육을 도와주고, 심지어 이웃의 아이까지도 돌봐준다! 아이가 다 j도 쫓아내지 않고, 기껏해야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시키는 정도에 그친다. / 90p

 

 

 

 

 

 

 

   둥우리하면 흔히 새를 떠올리기 쉽지만 버들붕어나 말벌, 타이베이청개구리, 유럽비버 등도 둥우리를 짓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데 4장 ‘새 둥우리 발견하기’에서는 둥우리 재료와 위치 혹은 새의 습성을 통해 둥우리를 찾는 법과 측량하는 법을 일러준다. 여기서는 둥우리를 찾고 관찰하기에 앞서, 새가 둥우리를 짓고 있을 때는 극도로 민감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칫 우리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해 둥우리를 내팽개친 뒤 새가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을 주의주기도 한다.

 

 

 

 

 

 

 

   이렇듯 『새는 건축가다』는 다양한 새의 생태와 더불어 둥우리에 담긴 자연과학의 역사를 익힐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책이다. 무엇보다 엄마가 읽는 것을 보고 아이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며 함께 읽었기에, 가족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듯하다. 이제 새소리가 더 자주 들릴 듯한 봄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공기 좋고 한적한 산과 개울만 자주 찾게 되는 요즘, 이 책이 여러 모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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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시옷들 - 사랑, 삶 그리고 시 날마다 인문학 1
조이스 박 지음 / 포르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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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분주한 하루 끝에 찾아온 시를 읽는 순간!

마음을 울리는 명시를 읽으며 인문학적 소양과 교양 영어를 함께 익히다!

 

 

   거친 언어들이 난무하는 밤이다. 잠들기 전에 각종 시사 뉴스를 쭉 훑어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이 피곤해진다. 코로나19로 인해 가뜩이나 심란한 가운데 가짜 뉴스로 선동질하는 사람들 하며 협조는커녕 이기적인 행동으로 방역 활동을 방해하는 사람들에 시끄러운 댓글까지. 내가 왜 또 이걸 보고 있나 자조하며 휴대폰을 내려놓고 책 한 권을 꺼내어본다. 인생의 길이 되는 세 가지 시옷들 즉, 사랑과 삶 그리고 시를 담은 책이다. 평소에는 시를 즐겨 읽지 않는 편이지만 요즘 같이 하루하루가 불안과 걱정으로 마음이 답답할 땐 복잡한 서사나 지식서가 아닌 ‘시’라는 언어를 빌려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맞게 저자 역시 ‘말과 글이 난무하여 어떤 말과 글을 붙들어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시대’에 시라는 길에 의지해왔노라 고백한다. 어쩌면 혼탁한 말과 고된 일상이 지배하고 있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시가 가장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내가 사랑한 시옷들』에는 저자인 조이스 박 교수가 엄선한 서른 편의 명시가 실려 있다. 대부분 20세기 근현대 영미권 시인의 시들로, 시가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모두 낯설지만 사랑의 언어를 담은 시, 나의 존재적인 가치에 의문을 품은 시, 삶의 여러 흔적들을 들여다보게 하는 각각의 시는 생각 보다 부담 없이 읽힌다. 특히 시의 각 앞 장마다 시인의 간단한 이력이 있어 그들의 삶이 시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점은 시를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더욱이 영어 원문을 먼저 읽고 해석된 시를 읽는 경험을 통해 영어와 우리말의 차이에서 오는 남다른 시적 언어의 감각까지 느껴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좋은 장점 중에 하나다. 무엇보다 각 시에 담긴 함의를 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깊이 있는 해석은 시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자체로도 충분히 생각하게 하는 데가 있다.

 

 

 

뒤늦게 오나니 Delay

- 엘리자베스 제닝스

 

 

내게 쏟아지는 별들의 광채는

몇 해 전에 빛나던 빛. 지금 저 위에서

반짝이는 별빛은 내 눈으로는 결코 보지 못할 빛

그렇게 시간의 간극은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나를 애태워

 

 

지금의 사랑은 그 첫 갈망이

다 소진되고서야 내게 도달할지도 몰라

충동적인 별빛은 사람이 쳐다보고 아름답다 해주기만을 기다려야 하고,

사랑은 도달할지라도 우리를 다른 곳에서 찾을지 몰라

 

 

 

   빛나는 별이 하늘에 한가득 보이던 시절, 사람들은 하늘을 가르는 수많은 별을 보며 그것을 운명이라고 믿었다. 지금 저 반짝이는 별빛은 어마어마한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내게로 온 것. 그러함으로 우리는 저 별에게서 나의 오늘과 내일의 나를 보았고, 오늘의 사랑과 내일의 사랑의 운명을 가늠했다. 서양에는 X자로 하늘을 긋는 두 개의 별똥별을 연인이 보면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통상 비극적인 사랑을 Star-crossed love라고 부르고, 셰익스피아의 <로미오와 줄리엣> 속 두 연인을 ‘별들이 어긋난 연인’이라고 일컫는다고.

 

 

 

   시인도 별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저 별이 실은 수백만 년 전에 시작된 빛이라는 것을, 수백 광년을 달려와 별빛이 우리 눈에 닿은 시점에는 그 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한 누군가 사랑으로 보낸 마음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닿지 못하는 아득함이라거나, 진정으로 온 마음을 상대에게 보내도 닿지 않거나 가서 닿더라도 왜곡되며, 이미 전해진 마음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별을 보면 이따금 슬픔에 잠긴다. 적확한 시공간, 내가 쏘아 올린 마음을 받을 공간에 상대가 있어야 하는 그런 기적 같은 타이밍을 찾아 헤매는 존재, 바로 우리 자신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잊지 말아야지. 지금의 내 사랑은 그 수많은 시공간을 가로질러 나에게로 온 것이니까.

 

 

 

화자가 말하는 ‘가장 높은 봉우리’는 ‘섬’과 닮아 있다. 가시적인 높이를 따지자면 육지 위에 솟은 산이 더 높아 보이겠지만, 어마어마한 몸뚱이를 바다 깊숙이 감춘 섬이 육지의 산보다 거대할 수도 있다. 심연 아래 보이지 않는 산이 가진 외로움은 육지에 솟아난 산보다 훨씬 더 깊고 깊을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혼자’가 아닌 것처럼 보여도 다른 이가 헤아리기 힘든 외로움의 깊이를 감추고 살아간다. / ‘혼자인 것과 외로운 것’ 중에서 21p

 

 

가까이서 보면 그 누구도 아름답지 않다. 가까이 갈수록 결점이 보인다. 사랑의 딜레마는 “그립다, 그리워.” 부르면서도 정작 가까이 마주하게 되면 사그라지는 것에 있지 않았나. 내 안으로 불러들인 사랑은 언젠가 시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사랑을 늘 저 멀리에 둔다. 그게 사랑을 유지하는 방법인 것처럼. / ‘멀리 떠나가지 마세요’ 중에서 36p

 

 

‘말로 하지 못하는 것들’은 영어로 ‘Things unsaid’라고 쓴다. “Things left unsaid.”라고 하면 ‘말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들’이 되어 더 의미심장해진다. 이따금 정말 큰 상실은 내버려둘 때가 있다. 강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놓았다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그 감정에 빠질까 봐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터지지 않도록 참고 버티다 보면 점차 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억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말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 ‘말로 할 수 없는 것의 힘’ 중에서 88p

 

 

 

 

 

 

 

고독 Solitude

- 엘라 휠러 월콕스

 

 

웃어라, 그러면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니

울어라, 그러면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낡고 슬픈 이 세상에서 환희는 빌려 오는 것이고,

세상의 문제는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노래하라, 그러면 언덕들이 응답하리니

탄식하라, 그러면 그 소리는 허공에 흩어지리라

메아리들은 즐거운 소리에는 춤을 추지만

소리 내어 근심을 말하면 움츠러 든다.

 

 

 

   화려할수록 짙어지는 고독이 있다. 저자는 엘라 휠러 월콕스의 시 <고독>에게서 오늘날 소셜 미디어 속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내가 좋을 때만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공간, 내가 잘나가고 멋져 보일 때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공간. 인스타그램은 그렇게 좋아 보여서 더욱 좋아지는 기제로 움직인다. 익명의 다수와 관계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이미지로 자신을 공여하고, 타인은 이미지로 우리를 소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가벼운 관계가 주는 편안함도 있는 법이다. 모든 사람에게 진심일 필요가 없고,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을 수도 없다.

 

 

 

   다만 가벼운 관계 속에서 웃고, 노래하고, 기뻐하고, 잔치를 열되 때로는 진지하고 고요하게 마주할 수 있는 진짜배기 관계를 찾아야 한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더라도 서로에 대한 믿음 속 흔들리지 않는 관계의 중심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다면 “I'm a little cyber fish, swimming through this vast sea of the Internet.” “나는 이 광대한 인터넷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작은 사이버 물고기야.”라고 생각하며 살자. 유선형의 존재로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게 두고 가끔 빛을 받아 비닐이 반짝이면 황금 비늘이 생겼다고 우기면서. 그러나 뭍으로 올라올 때가 되면 다시 사람의 다리로, 중력을 견디며 걸어야 할 땐 또 미쁘게 걸으면서. 어떤가, 썩 괜찮은 생각 같지 않은가.

 

 

 

집단의 제도와 관습의 족쇄를 넘어서지도, 인간 종의 생물학적 특성을 벗어나지도 못하여 고군분투하는 지난한 과정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이 없다면 고군분투의 과정이 없고, 이 과정이 없으면 성숙한 도약도 불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하나의 개체로, 한 명의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꿈틀꿈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이 움직임에서 저 움직임으로 짧게 이행하며 생존하는 것임을 시인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생존의 움직임이 집단의 역사를 반복하는 개체로서 보잘것없이 보일지는 몰라도, 위대함은 종종 대수롭지 않은 것들 속에서 일궈내는 법이기도 하다. / ‘우리’라는 운명 앞에 ‘나’라는 개인 중에서 216p

 

 

영어에는 ‘water under the bridge’라는 표현이 있다. 똑같이 다리 아래로 흘러도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다르기에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 이 표현을 쓴다. 삶은 ‘다리 아래 물’이다. 그렇게 무상하다. 하지만 이렇게 무상한 시간 덕분에 쓰렸던 기억들도 점점 희미해진다. 마치 축복처럼, 찌르듯이 아픈 고통과 영원할 것 같던 슬픔도 시간의 흐름에 예각이 닳아 둔각으로 변할 수 있다. / ‘삶은 흐른다’ 중에서 235p

 

 

 

 

 

 

 

   한 장의 페이지를 펼쳐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는 건 하루를 마감하는 나에게 꽤 괜찮은 선물이 될 것이다. TV와 휴대폰을 끄고, 모든 소리로부터 차단된 공간 속에서 오로지 시와 글에 내 모든 감각을 떠맡겨보시라. 그러면 나의 고단했던 하루가 조금은 다독여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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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The Power
나오미 앨더만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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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이고도 대담한 판타지!

이것은 젠더의 대립이 아닌 힘과 권력의 파워게임이다!

 

 

   “Aje ni girl yen, sha! 그 여자애는 마녀야! 마녀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누군가가 소리친다. 싫다고 거부하는 소녀에게 “너처럼 예쁜 여자는 칭찬을 들어야 마땅해.” 하고 지분거리던 남자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녀를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후려갈기고 발로 걷어차는 것으로 훈육을 하던 남자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진다. 하얀 빛이 번쩍거리는 순간, 그들의 온몸이 요동치며 경련을 한다. 나오미 앨더만의 소설 『파워』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몸에서 전류를 내보낼 수 있는 능력이 전 세계 소녀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이 현상은 각종 소셜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전파되고, 성인 남성을 제압할 수 있는 소녀들의 놀라운 위력은 곧 성인 여성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파워’까지 일깨워줌으로써 일시에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이 전복된다. 마침내 ‘그녀들’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여성에게 힘과 권력이 주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뒤바뀔 것인가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이라는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에서 남성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 ‘진짜’와 ‘가짜’ 페미니즘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넘어서 여성들의 연대를 모색했던 윤이형의 『붕대 감기』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 소설은 최근 몇 년 사이 사회 곳곳에 위치해있는 여성의 현실과 방향성을 제시하며 여러 가능성들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왔다. 여기에 나오미 앨더만은 세상의 판을 뒤집어버리는 놀랍도록 대담하고 충격에 가까운 판타지를 선보인다. 그녀는 아예 여성들의 손에 힘과 권력으로 상징되는 ‘파워’를 쥐어준다.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와 대립되는 ‘가모장제’ 사회를 배경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와 성 역할을 부여하여, 과감히 여성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랫동안 계속 멀리에서 들려왔던 것 같다. 몽고메리테일러 부부의 집에 오기 전부터. 이 가정에서 저 가정으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다닌 후로 언제 조심해야 하는지 위험을 경고해 주는, 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가 말했었다. 너는 강하다, 너는 이겨 낼 것이다. / 49p

 

 

 

 

 

 

   소설 속에는 여러 여성들이 등장한다. 가족이 없는 16살의 소녀 앨리는 자신의 보호자이면서 늘상 폭력을 일삼는 몽고메리테일러와 그의 부인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마침내 운명의 날 밤, 파워를 이용해 몽고메리테일러를 살해한 뒤 도망친다. 앨리는 하나님 어머니의 목소리의 계시에 따라 한 수녀원에 다다르고, 그곳에서 여성들의 세상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하나님 어머니의 뜻을 설파하며 ‘어머니 이브’라는 상징적인 인물로 거듭난다. 한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워를 지닌 록시는 자신의 눈앞에서 엄마를 죽인 자들을 과감히 복수하는 것은 물론, 앨리가 있는 수녀원의 공격하려는 무장한 경찰들로부터 이를 지켜낸다. 그녀는 앨리가 하나님 어머니의 계시를 실현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사 중의 전사다.

 

 

 

정말로 강력한 힘이다.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딸아, 너에게는 항상 통제력이 있었다. 그러니 힘을 능숙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

앨리가 속으로 말한다. 엄마, 어디로 가야 하지요?

목소리가 답한다. 이곳에서 벗어나 내가 보여 주는 곳으로 가거라.

목소리에는 항상 성경 같은 면이 있었다. / 58p

 

 

세상이 새로워질 필요가 없었다면 왜 하필 지금 파워가 나타났을까?

앨리는 생각한다.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고 하나님이 세상에 전하고 계시는 거야. 과거의 방식을 뒤집어져야 한다고. 예전 시대는 끝났다고.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가 바뀌었고 복음의 시대 또한 끝났으며 새로운 교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 66p

 

 

 

 

 

 

   미국 소도시 시장에 불과했던 마고는 자신의 딸 조슬린(조스)으로부터 파워의 감각을 일깨운 뒤, 소녀들을 잘 훈련된 여성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한 노스스타 캠프를 세우고 대주주가 된다. 그녀는 이제 대통령도 두렵지 않은 절대 권력자로 발돋움할 일만 남았을 뿐이다. 반면, 마고의 딸 조슬린은 여전히 자신의 파워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점점 권력의 꼭대기에 올라가려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 자유의지대로 살고 싶다. 늘 그런 부류는 있는 법이다. 자신이 가진 힘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쩔쩔매는 그런 부류 말이다. 이와 달리 타티아나 모스칼레프는 부와 인맥, 전체 군대의 절반, 다수의 무기를 몰도바 국경지대 언덕에 위치한 성으로 가져가 여성들의 새로운 왕국 베사파라를 세운다. 그녀는 오래된 숲과 커다란 만 사이의 흑해 연안 지대를 통일하고 사실상 러시아를 포함한 네 개의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 해마다 수십 만 명의 여성이 인신매매로 팔려가던 땅은 이제 여성들의 땅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조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유를 아는 사람도 없고 감히 어떤 제안을 할 만큼 연구를 한 사람도 없다. 조스의 파워는 매우 변덕스럽다. 힘이 넘쳐서 그저 조명을 켜기만 해도 집 안의 두꺼비집이 멋대로 작동하는 날도 있고, 거리에서 다른 여자아이가 싸움을 걸어 와도 방어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한 날도 있다.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거나 방어하지 않는 여자들은 ‘담요’ 또는 ‘방전된 배터리’라고 불린다. / 90p

이브가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믿는다면 하나님은 너희와 계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과 땅을 뒤집으셨다. 그동안은 예수가 교회를 지배하는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배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말하나니 여자가 남자를 지배한다. 마리아가 갓난아기인 아들을 사랑과 친절로 인도했듯이. 그동안은 그의 죽음이 죄를 씻어 주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말하나니 누구의 죄도 씻기지 않았고, 따라서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위대한 일에 동참하였을 따름이다. 그동안 너무도 많은 부당한 일들이 행해졌다. 우리를 모아 바로잡고자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다.” / 112p

 

 

 

   한편, 툰데는 파워를 쓴 소녀가 한 남성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우연히 촬영해 온라인에 올린다. 이후 그는 파워의 힘이 미치는 곳곳을 추적하는 관찰자이자 전달자로, 소설 속의 유일한 남성 화자로 등장한다. 그는 파워가 누군가에게는 권력의 상징이 되고, 누군가에는 폭력의 힘이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이 능력이 세계를 장악해서 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는 동안에 부당한 남성 권력과 폭력으로부터 여성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파워가 점차 여성이 남성을 위협하고 가해하는 수단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이제 그는 이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위치에 처해지기까지 한다.

 

 

 

“너는 약하고 우리는 강하다. 너는 선물이고 우리는 주인이다. 너는 피해자이고 우리는 승자다. 너는 노예고 우리는 주인이다. 너는 희생자이고 우리는 수혜자다. 너는 아들이고 우리는 어머니다. 인정하느냐?”

동그라미 안의 모든 남자들이 열성적으로 바라보았다.

“예. 예. 예. 제발, 지금. 예.” 남자들이 속삭인다.

툰데도 중얼거렸다. “예.” / 339p

 

 

 

 

 

  때문에 “만약 여성에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이라는 이 흥미로운 가설이 여성의 입장에서도 썩 유쾌하지 않다. 힘이 있는 자로부터 힘이 없는 자에게로 힘과 권력이 이동했을 뿐,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지옥과 광기가 그곳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까닭이다. 어머니 이브를 자처하던 앨리가 타티아나를 죽이고 스스로 권력 의지를 실현한 것처럼, 가장 강력한 파워를 지닌 록시조차 자신의 가족에게 배신을 당하고 타래를 빼앗겼던 것처럼, 우리는 휘두를 것인가, 휘둘릴 것인가. 그 선택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라는 사실만이 더 뚜렷해질 뿐이다. 이렇듯 나오미 앨더만의 『파워』가 젠더의 대립으로 시작해서 파워게임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보며, 중요한 것은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평등하지 않은 힘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젠더는 셸 게임입니다. 남자가 무엇입니까? 여자가 아닌 모든 것이 남자죠. 여자는 무엇입니까? 남자가 아닌 모든 것이죠. 두드려 보면 그 안이 텅 비었음을 알 수 있어요. 껍데기 아래를 보세요. 아무것도 없습니다.’던 닉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소설 『파워』는 비록 허구에 불과하지만 어쩐지 대변혁의 순간을 맞이할 먼 미래의 어느 순간에 미리 다녀온 듯한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그만큼 강렬하면서도 서글픈 공포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나오미 앨더만을 알지 못했으나, 읽고 난 후에는 이 작가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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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버그 -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
맷 매카시 지음, 김미정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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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온 슈퍼버그, 그들의 경고에 당장 주목해야 한다!

글로벌 전염병의 위협으로부터 인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의료인들의 사투를 그리다! 

 

 

   WHO가 마침내 팬데믹을 선언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이래 전 세계 확진자 수가 12만 명에 달하며 피해 국가도 110개국을 넘어선 가운데, 앞으로 몇 주 혹은 수개월에 걸쳐 코로나 19의 영향을 받는 국가의 수가 상당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의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수준이 낮은 국가는 감염이 일어나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기에 우려가 된다. 문제는 아직까지 코로나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뚜렷한 치료제와 백신이 없다는 점이다. 각국의 연구기관들과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한 국제간 연구 협력이 활발히 추진 중에 있으나 임상 실험을 거쳐 시판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전 세계는 현대의학 사상 가장 절박한 도전에 직면했다. ‘글로벌 전염병이 핵폭탄이나 기후변화보다 훨씬 더 위험한 재앙을 인류에게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한다던 빌 게이츠나 ‘2050년에는 3초에 1명의 인류가 슈퍼버그로 사망할 수 있다’던 경제학자 짐 오닐의 끔찍한 예언이 현실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2003년의 사스와 2012년의 메르스를 제외하고도 매년 슈퍼버그 감염으로 사망하는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에 직면했음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의료 기술이나 위생 개념이 현저히 떨어지는 과거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오늘날, 우리는 왜 끊임없이 슈퍼버그의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또 치료제 개발은 어째서 이토록 더딘 것일까. 『슈퍼버그』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 해답이 되어줄 아주 놀랍고도 유익한 책이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슈퍼버그의 위협 앞에서 그가 내어놓은 이 보고서들은 현대의학이 당면한 현실과 미래를 보여주는 전 인류적인 메시지가 될 것이다.

 

 

 

 

 

 

슈퍼버그의 시대,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

 

 

   얼마 전, 한 기사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가 등장했다. 바로 『슈퍼버그』의 저자이자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병원의 의사 맷 매카시다. 한국의 코로나19 검사 속도를 언급하면서 미국 보건당국의 대응 체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는 코로나19의 진단 키트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미국 의료계의 현실을 꼬집으며 곧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할 것을 경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맷 매카시는 현재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슈퍼버그에 맞설 새로운 항생제 임상시험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와 동료들은 슈퍼버그의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많은 생명을 치료하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겪고 있다. 책 『슈퍼버그』 속에도 이 위험천만하고 안타까운 현실이 답답하리만치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슈퍼버그가 얼마나 가까이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지, 어째서 인류가 극도로 전염병에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 희귀 감염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서부터 치료법 개발의 딜레마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렇다면 슈퍼버그란 과연 무엇일까. 슈퍼버그는 강력한 항생제로도 치료되지 않는 변이된 박테리아를 의미한다. 책에 따르면 슈퍼버그는 1960년대 이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1990년대까지도 산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의사들의 잘못된 항생제 처방 관행과 함께 항생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상업적 농업이 박테리아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약품들을 노출시켰고, 그 결과 박테리아들은 그 약효를 무력화시키는 법을 알아냈다. 즉,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항생제를 분해하고 파괴할 수천 가지 효소를 만들어냄으로써 박테리아들이 슈퍼버그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슈퍼버그는 더 적응력이 강해지고 악성이 되었다. 다시 말해 점점 똑똑해지고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슈퍼버그와 항생제 내성 감염으로 인해 사망하는 수에 비해 그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의 공급로는 거의 말라붙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시 감염병으로 고통 받고 죽어가는 수천 명의 부상병들을 구하기 위해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개발한 이후, 1950년대에 분자 생물학의 발전으로 간종 신약이 나오면서 항생제 개발의 황금기가 도래했지만, 오늘날 사용되는 약의 절반은 바로 1950년대에 발견된 것에 불과할 만큼 답보상태다. 더군다나 아무리 훌륭한 항생제라도 그에 대한 내성이 발생하기 때문에 과거에 썼던 항생제는 곧 무용지물이 될 지도 모른다. 현대의학의 발전 속도로 미루어봤을 때 약을 써야 하는 데도 적절한 약이 없어서 못 쓰고, 조만간 우리가 쓸 수 있는 항생제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맷 매카시의 말은 충격적일 정도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전문가 대부분은 미생물 혹은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성된 분자로서 박테리아 감염의 예방과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것들에 항생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항생제로 인정받으려면 최소 한 종류 이상의 박테리아를 죽이거나 생장을 저지해야 한다. 박테리아를 죽이는 것을 살균,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하는 것을 정균이라고 부르는데, 살균제가 효과가 더 큰 경향이 있으므로 그 구분을 두고 옥신각신할 때가 많다. 일부 항생제는 기생충과 진균도 죽일 수 있지만, 바이러스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 그래서 의사들은 감기 환자에게 항생제를 잘 처방하지 않는다. 감기 증상은 대체로 바이러스에 의해 유발되기 때문이다(과학자들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다르다는 것을 1930년대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바이러스는 식물, 동물, 인간, 박테리아 등 다른 유기체 내부에서 복제되며 대체로 항생제가 듣지 않는다). / 33p

 

 

어처구니없게도 시프로플록사신은 더 건강한 식육 및 가금육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가축에게도 쓰였다. 동물에게 항생제를 무분별하게 쓰는 관행은 슈퍼버그 출현의 주요인 중 하나였다. 동물 안에 사는 박테리아들이 우리가 가진 최고의 약물들에 노출되면서 그것들을 피할 방법을 학습하는 까닭이다. 최근 18개 주에서 100명 이상에게 발병한 감염의 최종 원인은 예기치 않게도 강아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감염된 개들 거의 전부가 애완동물 가게에서 팔린 것들이었고, 최소 한 차례 항생제를 투여 받은 이 개들 속에 살던 치명적인 슈퍼버그가 새 주인에게 옮겨간 것이었다. / 172p

 

 

 

 

 

 

   그렇다면 새로운 항생제를 만드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맷 매카시는 슈퍼버그 치료제로 달바반신이라는 항생제를 연구하며 임상시험을 거쳐야만 했는데, 그 과정 속에서 새 항생제 개발의 어려움을 연거푸 마주한다. 일단 까다로운 임상시험 규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나치가 여성 강제 수용자들이나 감염된 병사들에게 인체 실험을 하고, 매독균 실험을 위해 터스키기의 한 마을이 집단 인체 실험에 이용된 사례를 교훈삼아 오늘날 임상시험은 보다 엄격한 규정 하에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규정을 통과해 승인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약을 시도해 볼 용의가 있는 적합한 환자를 찾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임상시험에 동의하지 않는 환자들도 있지만, 임상시험이 가장 필요한 환자들이 정작 참여 자격이 안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다. 또 게르하르트 도마크의 설파닐아마이드가 다수의 어린이들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것처럼, 입덧 치료에 효과가 있다던 탈리도마이드가 사지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해표지증을 포함한 선천성 기형을 발생시켰던 것처럼, 항생제가 지닐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는 FDA의 엄격한 기준을 인정은 하지만, 죽어가는 환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듯한 인상을 주는 복잡한 절차과정은 재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개발 비용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항생제에 대한 투자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점 또한 문제로 지적된다. 한 경제학자에 따르면 ‘3,000만 달러를 낭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항생제에 투자’하는 것이라 말했을 정도이니,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제약 회사로썬 항생제 개발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셈이다. 혹여 개발이 된다 하더라도 이미 약에 내성이 생겨버린 박테리아의 진화로 인해 효용 가치가 오래 유지되지 않는 것 또한 그 이유다. 덕분에 최근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들을 위협하는 사프로케테 클라바타의 표적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관심을 둔 제약회사가 하나도 없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2011년 가을부터 2012년 사이에 프랑스 내에서 발병 사례가 30건에 달했음에도 말이다. 2001년에서 2003년 사이에 재고가 부족한 항생제가 148종이나 되는 바람에 전국의 의사들은 그보다 못한 치료제를 써야만 했다니 더욱 애석한 일이다.

 

 

 

   문제는 이처럼 미진한 항생제 개발로 인한 경쟁의 부재는 자연스럽게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지시도 불사하는 CEO들에게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약 제조사들은 특허권을 복제약 제조사들과 경쟁하기 전에 12년에서 15년간 판매 독점권을 갖는데, 만약 복제약 제조사들이 생산에 나서지 않는다면 특허가 만료된 후에도 가격이 오를 수 있다. 실제 2013년부터 2016년까지 항생제 10종 중 1종이 경쟁 부재로 인해 가격이 90% 인상됐다고 하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항생제가 있다 한들 그들이 요구하는 비싼 값을 치를 수 없다면 무용지물일 테니 말이다. 새삼 재벌 기업의 후원과 지속 가능한 연구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록펠러 대학의 재력은 우리 분야의 곤궁을 경감시켜 주었다. 감염병 전문의가 미국 일부 지역에서 사라져가고 있을 정도로 이 분야는 현대 의학에서 소외되어 있다. 현재 의사 대부분은 자신이 행한 처치의 종류(그리고 비용)에 따라 보수를 받는데 감염병 전문의들은 실질적인 처치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전문 자문을 제공하는 지적 전문의인데 의료수가제도는 우리의 자문에 대한 엄청난 수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감염병 분야는 두뇌 유출을 경험하고 있고, 그 정도가 해마다 심해지고 있다. 동부와 서부 연안 지역에는 아직 감염병 전문의들이 모여들지만, 중부 지역은 변화하는 의료 경제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젊은 의사들은 전임자들보다 감염 질환에 관심이 덜하다. / 235p

 

 

 

 

 

 

   최근 코로나19의 발생으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다수의 의료진들이 생업을 포기하가며 지원을 왔다는 말에 울컥한 적이 있다. 현재 매일 발생하고 있는 확진자 수보다 완치자 수가 더 많아졌다는 희소식은 모두 그들의 노고 덕분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비록 지금의 위기를 극복한다 하더라도 더 강한 슈퍼버그가 언젠가 나타나 우리의 생명을 또다시 위협하겠지만,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연대하는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의미로 『슈퍼버그』는 슈퍼버그의 위협을 경고하는 동시에 오늘도 슈퍼버그로부터 생과 사를 다투는 의료진들의 노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에게 더없이 귀중한 책이다. 누구든지, 꼭 한번쯤은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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