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라, 내 얼굴 슬로북 Slow Book 4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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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우리네 일상의 낯을 진솔하게 담은 삶의 기록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 울고 웃으며 털털 털어내게 되는 사람 냄새 가득한 이야기들!

 

 

   올 여름, <놀러 가자고요>를 통해 평범하고도 사소한 우리네 일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포착해내고 해학과 풍자라는 근래에 보기 드문 작풍을 선보이며 2018년 동인문학상 후보작에 오르기까지 한 김종광 작가가 이번에는 에세이집으로 돌아왔다. '생계형 소설가'라는 수식어답게 생활인으로서의 글쓰기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이번 작품은 나의 아버지 같기도 하고, 나의 삼촌 같기도 하며 내 이웃하는 어느 낯익은 누군가들을 떠올리게 해서 매우 친숙한 느낌이다. '절로 웃을 수밖에 없는 소설, 위로받아서 웃고, 짠해서 웃고, 기가 막혀 웃고, 분해서 웃고, 절묘해서 웃고, 깨쳐서 웃는, 가진 자들의 체제와 권력에 대하여 날이 바짝 서 있으면서도 울음보다 강한 웃음기를 머금은 그런 웃기는 소설'을 써야겠다던 그의 다짐처럼 어지럽고 복잡한 이 세상, 허허- 하고 웃으며 털털 털어내게 되는 사람 냄새 가득한 그런 이야기들이다.

 

 

 

 

 

 

20년차 소설가의 생활탐구영역

 

 

   <웃어라, 내 얼굴>은 김종광 작가가 지난 20년 동안 쓴 1500여 편의 산문 중에서 126편을 골라서 엮은 첫 산문집이다. 총 4부작으로 구성된 책의 1부에서는 아버지의 시커먼 청춘을 상징하는 '석탄박물관'을 비롯하여 유년 시절, 연필이 가장 큰 보물이던 때를 회상하게 하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지난 20년 동안 묵혀왔던 컴퓨터가 단돈 5천 원짜리 한 장으로 요약되어 고물로 정리된 씁쓸한 광경을 보여주는 '컴퓨터 방출', 아이들의 수집 욕구를 불태우게 하는 그 시절, 그 때의 대박 상품 따위들을 떠올리게 하는 '깜찍이' 등 일상의 사사로운 물건이 하나하나 의미가 되어 내게로 오는 순간들을 담아낸다.

 

 

 

 

 

 

   그 중에서도 꼬맹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다 보니 이에 공감하게 되는 글들이 유독 눈에 띈다. 유치원 때부터 숙제가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 아이들과 부모의 역할을 고민케 하는 '숙제' 편에서는 '엄마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함께 숙제를 해나가는 것인가 보다' 하는 문장에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게 되고, '왜 싸워?' 편에서는 학습지를 팔고야 말겠다는 판매원과 절대 살 수 없다는 엄마의 그 팽팽하고도 날선 기싸움이 불과 며칠 전의 내 얘기 같아서 웃음이 난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있어서, 아이가 있으니까 가게 되는 동심어린 장소들을 통해 '아직까지는 같이 놀러 다녀주는 제가 참말로 고맙다. 늦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가봐야 할 텐데. 아빠는 너랑 유치하게 놀고 싶다!'는 그의 고백에 마음 한 쪽이 찡해지기도 한다. 비록 껌딱지 같이 귀찮게 굴어도 엄마만 바라보며 애정표현을 서슴없이 해주는 지금이 좋을 때라던 누군가의 말처럼 아이와 진정으로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울컥해진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연필이 가장 큰 보물이던 때. 그때 연필심은 잘도 부러졌습니다. 부러진 연필심을 주워 들고 엉엉 울었던 적도 있지요. 침을 묻혀가며 글씨를 썼지요. 연필을 깎다가 손을 벤 적도 많았지요. 핏물이 노트 위에 번지던 기억이 납니다. 연필은 금방 닳아버렸습니다. 볼펜대에 끼워 몽당연필을 만들었지요. 웅변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상품은 물론 연필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받은 선물도 연필이었지요. 그렇게 연필이 제 인생의 모든 것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 중에서 19p

 

 

예술은 전형적인 승자 독식 체계다. 극소수가 모든 것을 다 누린다. 소수가 조금 누린다. 대다수가 근근이 먹고산다. 가장 하찮은 예술가도 부러움을 살 때가 있다. "그래도 너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잖아." 차라리 프로가 되지 못하고 고급 아마추어에 머물렀다면 다른 생계 방편을 가지고 취미로 우아하게 즐길 수도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었기에, '불안 속의 평균'을 친구 삼게 되었다. / '불안 속의 평균' 중에서 80p

 

 

 

   2부에서는 괴이하고 이상하고 인륜을 어지럽히고 귀신같은 이 극심한 괴력난신의 나날을 살고 있는 우리네 비루한 일상을 들여다본다. 위대한 생활인들은 왜 늘 가난한 것인지 그 분하고 서러운 감정을 토로하는 '일하라고 가난한 겨', 2년 10개월 동안 살았던 주공임대아파트에 도배값 100만원을 떼일 뻔한 사연을 담은 '도배값', 열두 살 먹은 소년의 입에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하는 푸념이 흘러나오게 하는 이 삭막한 세상의 풍경을 담은 '바쁜 소년', 권력과 소수정예의 힘을 마음껏 보여주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꾸짖는 '소수의 힘'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난한 것이라고 허허 웃으며 이 지난한 삶을 위로해 보고, 보잘 것 없는 한낱 소수인 나지만, 멋지고 아름다운 소수를 감히 꿈도 못 꿀 만큼 미약한 나지만, 내가 최소한 저 후안무치한 소수를 또다시 국회에 보내는 소수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글에서 굽은 마음을 의연하게 펴본다.

 

 

저 변덕스러운 기억으로부터 중심을 잡고 살아가려면 편집의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내 기억만큼 다른 이들의 기억도 진실이라는 존중, 하지만 내 기억이 주관적인 고집일 수 있듯이 다른 이의 기억도 주관적인 고집일 수 있으리라는 비판력, 그리고 그 존중과 비판을 자신의 기억에게도 가할 수 있는 냉철함 같은. / '기억의 책을 넘기며' 중에서 132p

 

 

 

 

 

 

독서하는 그때가 그 사람의 가을이다

 

 

   3부에서는 각종 기념일들로 넘쳐나는 '무슨 날'을 통해 때로는 특별하고,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서글퍼지는 순간들을 회상한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생활인으로서의 글쓰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4부의 내용들이 보다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한때 나 역시 문예창작학과에서 글을 배우겠답시고 문학도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고, 인터넷소설 작가로 활동하며 나름 팬클럽이란 것도 가져보았고,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고 결국은 그럴 듯한 예술인이 아니라 회사 사보나 어린이 책 출판사에 몸담으며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했기에 공감이 가는 글들이 많았달까. 특히 '비릊다' 편에서처럼 나의 선생님이 순우리말이나 우리가 흔히 쓰지 않는 단어를 소설에 사용하는 것을 좋아해서, 내내 신박하고 재미있는 표현을 찾느라 혈안이었던 대학시절을 떠올리게 해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책 한 권 한 권이 내 집착의 응결이었다. 그때의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책꽂이는 내 사진첩과 다름이 없다. 내 이십대의 파노라마와도 같은. / '계륵' 중에서 211p

 

 

나아가 남에게도 마구 사용하고 있다. 연장자들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후배나 학생들에게는 "좋은 시(소설) 비릊기를!", "두 사람이 아름다운 인연 비릊기를!", "소원하는 바 꼭 비릊기를!" 하는 식으로 덕담을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 '비릊다'를 전해준 너구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녀의 너구리 닮은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뜻하는 바대로 넉넉히 비릊기를 바라본다. / '비릊다' 중에서 216p

 

 

 

 

 

 

   한날 나의 친구가 내게 왜 그렇게 열심히 책 읽느냐고, 또 읽고 나서 감상글을 써 올리면 뭐 돈이라도 생기느냐고 드러내놓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꼭 돈이 생겨야 뭘 하는 거냐고 친구에게 핀잔을 주긴 했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이게 내가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야. 이게 내가 가장 즐겁게 노는 방법이야, 라고. 김종광 작가는 '글쓰기로 스트레스를 푸는 세상' 편을 통해서 일기든 에세이든 소설이든 SNS 글이든 뭔가를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 쓸 수 있기에 행복한 사람도 있는 거다. 괴력난신공작소 같은 이 세상, 그렇게 웃으며 쓰면서 살아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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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다면
애덤 해즐릿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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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가족에게 몰아닥친 우울증이라는 병이 할퀴고 간 상처와 극복의 정서들!

어둡지만 비극적이지 않고, 슬프지만 따뜻한 감동이 있는 사람 사는 이야기! 

 

 

 

나는 살인자다. 그게 내 정체다. 난 삶을 훔치고 있다. / 125p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날, 엄마의 표정이 내 머릿속에 들러붙어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직장으로 암이 퍼졌다네." 불과 2년 전에 자궁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던 엄마는 자신의 몸에 또 다른 암세포가 번지고 있었음을 꽤 담담하게 말했다. 회사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모아놓은 월급을 엄마의 첫 수술에 고스란히 보탰던 나는 2년 뒤, 학자금 대출 상환을 목전에 두고 다시 또 엄마의 수술 비용을 대어야 할 것이란 생각에 당장 엄마의 아픔보다 내 앞일이 더 막막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당시 무너진 회사를 수습하느라 엄마를 제대로 돌볼 여력이 없었고, 직장과 병원을 오가며 고군분투 해야만 했던 나는 마치 내가 그 질병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렇게 엄마의 아픔은 나에게로까지 전이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상처와 상흔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 몸의 아픔보다 가족이 짊어져야 할 무게에 더 숨막혀했던 것 같다. 자신이 가족 모두에게 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 삶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염려해 하던 그 자괴감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을까. 소설 속의 존과 마이클이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이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사랑했다는 점을 알아두세요

 

 

   <내가 없다면>은 우울과 불안이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가족을 둔 한 가정의 상처와 극복과정을 담아낸 소설이다. "일이 생겼어요. 제 형에게요." 입 밖으로 꺼내버리는 순간 형에게 닥친 비극이 현실이 되어 버릴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 앨릭, 비상사태 직전에 연결되지 못한 담당의사의 음성사서함을 통해 형인 마이클에게 닥친 비극이란 것이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독자를 흥분과 충격에 빠져들게 하는 도입부는 이미 그 어느 소설보다도 강렬하다.

 

 

 

   흥미롭게도 소설은 곧장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엄마인 마거릿의 시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여느 미국 여자들처럼 어느 정도의 나이에 이르면 사교계에 데뷔하고 적당한 남자를 골라 결혼을 하는 전형적인 삶을 뒤로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그녀는 그곳에서 영국식 예의범절과 형식을 중시하는 존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미국적 사고관을 가진 여자, 영국식 사고관을 가진 남자의 만남은 서로가 너무나 달랐기에 마음을 이끌기에 충분했고, 결국 영원을 맹세할 날만을 앞둔 어느 날 존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마거릿은 그가 이미 한 번의 병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렸을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17년 동안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마이클, 실리아, 앨릭을 낳아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예정된 불안은 언제고 마주하게 될 운명이었을까. 우울증이라는 괴물은 존을 끊임없이 따라다녔고 마침내 일상이 뒤틀리고 가족 모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지경에 이르게 된다.

 

 

 

   소설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존의 강박 증세를 매우 섬세한 필치로 묘사해냄으로써 마치 괴물과도 같은 그 존재가 한 개인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이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스스로를 가족의 삶을 망가뜨리는 살인자에 비유하며 점점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과 아이들을 분리시키려는 준비를 하는 모습을 비롯하여, 괴물이 마침내 아들인 마이클에게로까지 손길을 뻗는 모습에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로 자살을 선택하는 모습은 비극적이지만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눈앞에서 털갈이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런던의 그 병원에 있는 작고 낯선 방에서 그 의사가 내게 아니라고,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재고해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고, 결혼을 연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면, 그 의사가 내게 존을 사랑하는지 묻지 않았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마이클이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이클이란 말을 혼자서 수도 없이 되뇌다 보면 그 의미가 사라져버리지만, 내 첫 아이의 신비는 마이클 외에 그 어떤 말로도 나타낼 수 없다. / 55p

 

 

이제 아이의 눈에서 날 동정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가 보였다. 이게 바로 내가 식구들에게 하고 있는 짓이다. 끝도 없이 계속. 그러다 지금 앨릭의 얼굴이 그렇듯 식구들의 얼굴은 날 고문하기 위해 야수가 사용하는 가면이 된다. 옛날에는 앨릭을 위해 이야기들을 지어내 들려주면서 내 목소리로 앨릭을 지켜줬다. 유령들로부터 앨릭을 보호했다. 이제는 내가 앨릭의 집에 갇힌 유령이 돼버렸다. / 114p

 

 

 

 

  가족과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자살이 가족 전체에 미치는 트라우마는 모두의 삶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회복되지 않는 가난,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연대 의식이 낳는 피로감, 타인의 감정에 적극적으로 기대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외로움까지. 특히 아무리 가족이라 하여도 오빠마저 상태가 바닥을 치는 광경을 보며 자신의 몸부터 사릴 수밖에 없게 되는 이 지난한 현실에 대한 실리아의 고백들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의 우울 증세가 맏아들인 마이클에게 유전되는 이 비극을 어떻게 해서든 바로잡아 가족 모두가 안정되기를 소원하는 마거릿,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해 더 깊은 우울과 불안에 사로잡히는 와중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했던 마이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족의 정서적 불안을 최대한 돌보며 치유하고자 애썼던 실리아, 가장 이기적인 성격이지만 종래에는 형의 고통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게 하려 했던 막내 앨릭까지. 우울증과 불안으로 고통 받는 가족의 상처를 모두가 감내하고 함께 치유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

 

 

 

마이클도 메신저백에서 10달러 지폐를 꺼내서 수줍게 내밀었다. 앨릭은 보지도 않고 그 돈을 받아서 같이 셌고 그 모습을 실리아가 테이블 맞은편에서 보고 있었다. 앨릭은 현금을 지갑에 넣고 계산서 위에 비자카드를 놓고, 계산서 덮개를 덮은 후에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었다. 나는 계속 신용카드를 쥐고 있었지만 앨릭이 무시했다. 좀 덜 비싼 곳으로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날 좋은 곳에 데려와서 대접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솔직히 집에서 먹었더라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 232p

 

 

한 번이라도 진정한 공포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마음속에 구체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 자체가 공포로 꽉 차서 자신이란 존재가 공포 자체란 걸 깨닫게 된다. 내가 지금 이렇게 공포를 표현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 이유는 이것 말고 다가올 1초 1초를 달리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의 조건이다. 결코 끝나지 않을 이 두려움의 순간들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간절하고 절박한 소망으로 가득한 이 삶. / 316p

 

 

마이클이 우리 곁은 떠났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구하려는 노력을 멈춘 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알게 된 것이다. 그 노력은 줄어들었지만 사라지진 않았다. 그건 우리가 겪는 혼란의 일부이자 동기 없는 활동이 됐지만 어쨌든 기이하게도 그 나름대로 계속 이어졌다. / 419p

 

 

 

 

 

   '내게 상담하러 오는 여자들과 그들의 애인이나 남편,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 그들의 관계는 무너지고 있어. 돈 때문이든 정신적인 문제든 이유가 뭐든 말이야. 그런데 그들은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절망하고 있어. 엄마는 우리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거지. 우리가 함께했던 세계가 변하지 않도록 말이야. 나도 이젠 그걸 이해해.' 결혼식 당일, 실비아가 엄마와 나누는 대화가 유독 마음에 많이 남는다.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지, 어떤 정서가 우리를 연대하게 하는지, 어떠한 질병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어서가 아닐까.

 

 

 

  <내가 없다면>은 우울증과 불안에 관한 이야기이자,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며 결국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상처는 결국 사람으로 극복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퓰리처상 최종후보작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입체적인 캐릭터와 섬세한 문장, 시대상이 낳은 인간사에 대한 철학까지 깊이 있게 그러나 너무 무겁지 않게 잘 다룬 소설이라 특히 더 기억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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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사소한 일에 화를 냈습니다 - 자존감이 높아지고, 인간관계가 술술 풀리는 감정 정리법
와다 히데키 지음, 정지영 옮김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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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욱하고 후회하는 이들을 위한 감정 대처법!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현명하게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는 노하우!

 

 

 

   어지간해서는 감정의 동요가 없는 편인 나도 한 번씩 울컥할 때가 있다. 바로 4살이 된 아들과 시간을 보낼 때다. 웬만하면 아이의 감정과 의사를 존중하고 타고난 천성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한 번씩 이유를 알 수 없는 생떼를 부릴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만다. 돌이켜보면 정말 사소한 일이었는데, 쿨하게 넘어가줘도 되는 일이었는데 왜 그리 얼굴을 붉혀가며 서로의 마음을 할퀴고 마는 것인지.

 

 

 

   주위를 둘러보면 작은 일에도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사람이 있다. 기분이 나빠졌다가도 바로 풀리는 사람은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겠지만 언짢은 기분이 다른 일을 할 때도 계속 이어지는 사람은 일은 물론 인간관계까지 나빠지는 경우가 흔하다. 불쾌한 감정을 쉽게 털어내는 사람과 감정이 오래 지속되는 사람 중에 어느 쪽이 이득을 보고 어느 쪽이 손해를 보는 지는 누가 봐도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쉽게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화내고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작은 일로 기분 상하지 않고, 울컥해도 쿨하게 털어내는 비법을 담은 책 <오늘도 사소한 일에 화를 냈습니다>의 저자 와다 히데키는 우리가 쉽게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는 남이 나를 소중히 대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둘째는 쉽게 상처받는 자신을 지키려고, 셋째는 어려운 일을 무리해서 하고나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특히 자기애와 기분의 상관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데, 이에 대해 정신분석학자인 하인즈 코헛은 "사람은 자기애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불쾌함을 느낀다"고 하였다.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애가 쉽게 충족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부모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매사에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고, 타인의 사소한 말실수에도 바보 취급을 당했다거나 모욕당했다고 느껴서 불쾌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애를 충족시키면서 작은 일로 기분 상하지 않고, 인간관계까지 술술 풀리는 감정 정리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저자는 이를 위해 6장에 걸쳐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현명하게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는 노하우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마음의 부담을 확실히 줄이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바꿀 수 있는 일은 고민하다 보면 적절한 돌파구가 나오지만, 바꿀 수 없는 일은 아무리 고민해봤자 해결책이 나올 리 없다고 말하면서 바꿀 수 없는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지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또한 어려운 일을 마주쳤을 때는 무리하게 나를 밀어붙이기보다는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많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덧붙이다.

 

 

 

   두 번째는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는 법에 대해 소개한다. 지금 당장의 실패에 조바심내지 말고 느긋하게 멀리 내다보는 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적당한 수준으로 기준을 정하고, 그 이상의 일은 깨끗이 포기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며, 자잘한 실패에 얽매이지 말라고 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평생 상대방의 기호에 나를 맞출 수 없다면 차라리 내 그대로를 보여주는 편이 낫다고 말하며 타인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기를 조언한다.

 

 

 

무언가를 달성하는 사람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실패하면 안 돼' '실패하면 어쩌지' '창피당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면 어떤 일에도 도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게 됩니다. / 97p

 

 

 

 

 

 

   세 번째는 '무의미한 경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경쟁에 있어서 상대의 평가를 떨어뜨린다고 해서 자신이 성장하지는 않으므로, 무슨 일이든 상대와 관계없이 자신을 갈고닦아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 이어 네 번째로는 '누구에게나 관대해지는 마음 단련법'을 소개하는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타인을 험담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심리학적으로 자기 내면에 욕구불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심리 요법 중 가족 전체를 치료 대상으로 하는 '가족 요법'의 접근법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조작적인 가족 요법으로 부모의 접근법을 바꾸면 아이가 바뀐다는 사고방식을 기초로 합니다. 다른 하나는 아이에 대한 고민과 괴로움을 들어주는 동시에 아이는 부모가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바꾸는 일을 포기하고, 자신의 노후나 취미를 생각하도록 제안하죠. / 140p

 

 

 

 

 

 

   다섯 번째로는 '인간관계가 놀랍도록 술술 풀리는 요령'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을 버리면 편해진다는 것이었는데,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예측 불가능한 타인의 마음에 신경을 쓰기보다 내 사람과 내 편에 더 마음을 쓰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마지막여섯 번째 감정 정리법은 '사소하지만 강력한 기분 전환법'으로 웃음이 얼마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는지 강조하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표정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집니다. 웃는 표정을 자주 지으면 웃는 근육이 단련되고 그 이외의 근육은 약해져서 웃는 게 습관이 됩니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웃는 버릇이 생기면 그 후로는 어려움 없이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던 저자의 말을 새겨볼 일이다.

 

 

 

   이렇듯 <오늘도 사소한 일에 화를 냈습니다>는 일본 최고의 자기 심리학 전문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자존감을 높이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부정적인 감정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처세서다. 읽다보면 우리가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지 않는 방법이란 것은 나의 기분에 충실하고, 눈앞의 실패나 상처에 연연하지 않고 멀리 내다보는 유연한 자세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이가 내 마음을 울컥하게 하고, 욱하게 할 때에도 아이가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하기보다 '어쩌겠나, 그럴 수도 있지. 아직 어린 아이인데.' 하고 생각을 달리 해보면 욱하는 횟수도 줄어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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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 - 처음과 끝의 계절이 모두 지나도
동그라미(김동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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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만 팔로워로부터 사랑받는 작가 동그라미의 감성에세이!

사랑과 이별, 그리움을 담아 오늘도 그대의 안녕을 기원하며 보내는 공감 편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편지.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그들은 연인이 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써 보내는 편지가 내 손에 쥐어졌다. 직접 건네는 건 어쩐지 미련을 남길 것 같아서 나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참 많이 좋아했을 텐데, 조금이라도 욕심을 내보지 그랬느냐고 말하려다가 두툼한 편지지의 두께를 써나가기 위해 설치고 눈물을 훔쳤을 시간들이 떠올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쓴 편지는 그에게 잘 전달되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담담하게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일 줄 알고 편지를 쓴 그녀의 마음과, 마음을 보여준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줄 수 없는 그 마음이란 건 또 어떤 것이었을까. 문득, 그 날 두 사람의 표정에서 엿본 서로의 마음이 생각나는 밤이다.

 

 

 

나를 구원할 문장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SNS를 보다보면 유독 사람들의 마음들을 울리고 공감을 이끄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70만 팔로워수를 기록하며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리워하는 그 모든 순간들에 대한 기록을 담은 동그라미 작가의 글이 눈에 띈다. 사랑하는 당신을 혹은 사랑했던 당신을 떠올리며 썼던 수많은 감정들, 때로는 미련으로 허우적대고 이제는 안녕하고 놓아주리라 몇 번이나 다짐했던 긴긴밤들. 하지만 결국 부치지 못할 편지들. 그 모든 찰나의 감정과 기록들을 모아서 쓴 글들이 책 한 권으로 탄생되었다.

 

 

 

 

 

 

   그런 날이 있다. 시처럼 다정한, 애써 채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넘치는 그런 밤. 작은 조명 아래 테라스에 앉아 아주 살짝 스치는 바람에도 마음이 신선해졌던 우리는 그 소소한 순간이 그렇게도 좋았다. 그 어떤 이벤트하나 없어도, 뭐 대단한 거 하나 없어도 좋았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크림 아메리카노'라는 제목의 글을 읽으며 나는 문득 그 순간이 떠올라 내내 마음이 설레었다.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도전해보겠다며 주문했고 먹던 아메리카노에 휘핑크림을 올린 듯한 커피가 나왔다 한 모금 마시던 너는 실패했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고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이유 없이 서로 미소를 터뜨렸고 나는 지금 순간을 사랑하며 살기로 했다 평범한 연인처럼 평범한 시간을 보낸 그날을 사랑하며 살기로 했다'던 그의 글처럼, 평범한 시간과 순간마저도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느낄 수 있는 마법 같은 일이 아닐까.

 

 

 

비례

꽤 많은 아픔이 지나갔다 죽을 것 같던 시간이 흐르고 죽지 않은 채로 죽은 듯이 살아가고 있다. 죽을 듯이 힘든 시간이 좀 더 이어졌으면 했다 조금 괜찮아졌다고 느낄 때마다 내 곁에 남은 네 잔상도 사라지는 것을 테니까 결국 너를 잊는 일은 너를 사랑했던 내 모습을 지워야 하는 일이니까 미련하지만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믿는다

나는 사라져도 좋지만 너를 사랑했던 내가 사라지는 건 싫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과 네가 멀어지는 일이

비례한다는 사실은 별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겠지. / 78p

 

 

 

 

 

 

   이별은 사랑하는 그대가 내 곁에 없이 맞이하는 지독한 환절기 같다. 반점은 찍었지만, 온점은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는 기나긴 문장 같다. 이 이별을 모두 감내할 수 있을 때까진 아직 더 많은 종이가 필요하겠지. <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 속의 여러 글들은 대체로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상대를 향한 안부를 전하다가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미련으로 몸부림치는 감정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유독 헤어짐에 아파하고 오늘도 돌이킬 수 없는 감정으로 잠을 설치는 이들의 마음과 공감한다.

 

 

 

연소

 

내가 당신을 잊는 일에 앞으로 더 애타야 한다면 얼마나 더 타들어가야 비로소 당신을 추억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도 당당하지 못할 구차한 변명으로 얼마나 더 당신을 그리워해야 할까 몇 개의 문장들로 기록하고 싶었던 일이 셀 수 없이 많은 문장을 만든다 내게도 이리 부담인데 당신이라고 오죽할까. / 142p

 

 

 

 

  그리움으로 너절해진 마음을 쓸어 담을 길이 없는 이들에게 이 책이 짧지만 다정하고 공감어린 위로가 되어주길. 다음 사랑은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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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의 심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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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대미문의 릴레이 살인, 진범은 대체 누구인가!

히가시노 게이고 미스터리의 정수를 보여주는 완전범죄를 향한 도전!

 

 

   이제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 그의 1989년 초기작 <브루투스의 심장>이 다시 새롭게 재판되어 출간되었다. 무려 세월이 30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독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거듭된 반전은 놀랍다 못해 신선하기까지 하다. 완전범죄를 꿈꾸는 세 명의 인물 뒤에 숨겨진 음험한 비밀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날선 긴장감은 이미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마지막까지 독자들을 숨 가쁘게 밀어붙인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완벽할 것 같았던 트릭의 붕괴, 예상치 못한 반전의 연속으로 그의 초기작 중에도 압권이라 할 만하니, 꼭 읽어보시라!

 

 

 

완벽할 것 같았던 살인의 바통,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시체의 정체는?!

 

 

   중견 산업기기 메이커 MM중공에서 9년 째 연구개발2과 소속으로 근무 중인 스에나가 다쿠야는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과 응용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미장공인 아버지 밑에서 불운한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더 이상 인생의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도쿄의 일류 국립대를 목표로 모든 욕망을 억제해가며 실력을 쌓았다. 이후 MM중공에 입사한 그는 시각인식 로봇의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국내 학회는 물론 국제 학회에서도 주목을 받으며 회사 내에서 가장 유능한 인재가 되고자 노력했다. 원하는 것은 성공. 차기 사장이 될 게 분명한 니시나 전무와 연줄이 닿아 더 높은 자리로 오르려는 욕망을 품고 있었던 그는 전무의 업무를 보좌하는 아마미야 야스코에게 접근한다.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건 환상일 뿐이라는 게 그의 오랜 철학이었다. 이 세상은 불공평과 차별로 가득 차 있다. 누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다양한 계층으로 나눠진다.

언젠가 반드시 최상층의 인간이 된다, 지배자가 된다……. 그것이 다쿠야의 최종 목표였다. / 26p

 

 

 

   처음에는 전무에 대한 정보를 빼내려는 목적으로 다가갔던 그는 아마미야 야스코와 잠자리를 갖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고, 어느 날 그녀로부터 전무의 딸인 호시코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침 니시나가 호시코의 남편감을 물색 중이라는 정보까지 얻게 된 다쿠야는 기회 좋게도 전무에 눈에 든 몇몇 후보감 중 한 명으로 선택된다. 마침내 파티에 초대되어 간 자리에서 호시코에게 접근한 다쿠야는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가운데, 뜻밖의 소식으로 충격을 받는다. 바로 야스코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마당에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야스코의 말은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한편, 니시나 전무의 아들이자 실장인 나오키가 그의 방으로 다쿠야와 호시코의 또 다른 남편감 후보로 거론된 하시모토를 함께 호출한다. 호시코에 관한 말을 하려는가 싶었던 찰나, 나오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온다. 바로 여기에 모인 세 명 모두가 야스코의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야스코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가 이 세 사람 중에 한 명일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들에게 골치 아픈 존재가 되어버린 야스코와 뱃속의 아이를 결국 죽여야 되지 않겠느냐는 단도직입적인 나오키의 말에 다쿠야와 호시코는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부터 절대로 들킬 리 없을법한 완전범죄를 공모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야스코의 시체를 바통처럼 세 사람이 이어받아 옮기는 것으로, 그 사이 무너지지 않을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들 일당의 계획이 착착 실행에 옮겨지고 다쿠야가 시체를 호시코에게 넘기려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어라, 야스코의 시체가 아.니.다. 어째서 나오키가 여기 있는 거지?

 

 

 

다쿠야 일당의 계획대로라면, 오늘 MM중공을 뒤흔든 뉴스는 아마미야 야스코의 시체여야 했다.

하지만 그 야스코는 살아 있고, 죽은 것은 나오키였다. 야스코를 죽이자고 말을 떠낸 사람이. / 111p

 

 

 

 

 

 

   죽음을 공모한 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버린 이 놀라운 반전에 숨이 멎을 것 같은 것도 잠시, 다쿠야와 하시모토 앞에 그들의 목숨을 위협할 만년필이 하나씩 배달된다. 야스코의 목숨을 노리려다 도리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게 된 다쿠야는 이때부터 진범을 찾기 위한 기묘한 추적과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돌입한다. 나오키의 비서인 유미에가 발견한 1974년도 업무 계획과 하시모토의 차에서 발견한 고속도로 영수증 조각, 니시나 가문의 알력, 나오키의 성장과정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경찰 역시 다쿠야의 숨통을 조여 오는 가운데 은밀하게 숨어있던 진범의 정체가 드러난다.

 

 

 

결국 로봇은 인간에 필적할 수 없다……. 다쿠야는 이런 식의 얘기가 제일 싫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인간일수록 능력도 없기 마련이라 더 불쾌했다. 인간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고, 게으름을 부리고, 겁을 먹고, 질투나 할 뿐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대체로 인간은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살 뿐이다. 지시가 없으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한다. 프로그램에 따라 하는 일이라면 로봇이 훨씬 우수하다. / 165p 

 

 

 

 

 

 

   이처럼 <브루투스의 심장>은 욕망을 쫓던 여러 인물들이 뒤엉켜 배신과 음모를 서슴지 않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인간 내면의 처절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추리소설이다. 과학과 기술적 요소를 작품에 녹여내 무서운 흉기로 돌변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성'과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소재 또한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유년시절,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낳은 비극이지만 살인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마지막까지 차갑고 냉정하게 끌고 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서술 방식에 또 한번 더 놀라게 되는 작품이니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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