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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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은 위대한 문학작품에 얽힌 탄생비화!

고전 작품을 읽는 재미만큼이나 흥미로운 영감의 순간들!

 

 

 

   모든 예술 작품은 탄생 그 이전에 번뜩이는 어떤 순간과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는 이를 ‘영감’이라 일컫는다. 단언컨대 수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에게 찾아올 이 한 순간의 강렬한 영감에 도취되기를 열망하며 그 원천이 되는 소재들을 찾아 헤맨다. 우리 시대 이전의 예술가, 즉 위대한 문학 작품을 탄생시킨 작가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단 하나의 구체적인 아이디어, 혹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치열한 주제의식을 얻기 위해 그들 또한 문학적 영감이 스치는 찰나와 상상 속의 무한한 가능성을 샅샅이 뒤져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의 저자 실리어 블루 존슨은 어느 추운 겨울날, 《댈러웨이 부인》을 여러 번 완독한 후 이 이야기의 첫 줄이 탄생하기 이전의 일을 조사해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이 우아한 사교계 명사를 창조하기 위해 밟았던 절차들을 되짚어 따라가 보았는데, 현실세계에도 ‘댈러웨이 부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설 속의 댈러웨이 부인처럼 복잡 미묘한 인물이 실존했다니. 덕분에 저자는 평소 좋아하는 작품들의 탄생배경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위대한 작가들로 하여금 펜을 들고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문학작품을 쓰게 만든 그들의 반짝이는 영감과 그 근원을 캐내기 시작했다. 출발은 이렇듯 사소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지만 위대한 작품의 탄생비화와 영감을 발견해낸 순간과의 조우는 작품 속 이야기 못지않게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도로 위를 달리던 가운데 떠오른 생생한 문장 하나가 가던 길을 되돌리게 하고, 잠자리에 든 아이들에게 즉석에서 지어 들려준 이야기가 위대한 작품이 되며, 헤밍웨이 소설의 《노인과 바다》 속 노인을 자처하는 가짜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해프닝 등 한 작품에 얽힌 갖가지 사연들을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또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하기까지

 

 

   책은 작가들에게 영감이 번쩍하고 스치는 마법 같은 순간을 비롯하여 삶의 현장이 곧 이야기가 된 순간까지 총 50편의 작품을 따라가본다. 1장인 “번쩍 스치는 황홀한 순간” 편에서는 톨스토이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불쑥 스쳐지나간 ‘맨살이 드러난 여인의 팔꿈치’ 이미지로 《안나 카레리나》를 탄생시킨 일화와 가족여행을 갔다가 무료함에 그린 지도 그림 한 장이 《보물섬》이란 모험 소설을 탄생시킨 사연,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다 《호빗》을 탄생시킨 톨킨, 한 신문 기사에 난 여행사 광고 문구에서 착안하여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완성시킨 쥘 베른의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하나의 개념, 단순한 환영, 한 줄의 문장 등 환하고 커다란 빛이 시커먼 어둠을 뚫고 번쩍 비치는 듯했던 이 순간들은 형태야 어떻든 이 위대한 작가들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한 번의 반짝임이 활활 타오르는 창작욕으로 이어져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 걸 보면 때로는 영감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캐치-22》의 작가 조지프 헬러 역시 “내가 일부러 짜내는 게 아니다. 하늘이 정한 몽상의 길을 따라 저절로 나에게 오는 것이다.”고 했을 정도니까. 물론 그들 스스로 이미 훌륭한 이야기꾼이었으며, 단순한 이야깃거리 하나를 두고도 어떻게 비틀고 매만져야 흥미로운 작품으로 재탄생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경험이 나에게 귀중한 교훈을 안겨주었다. 특히 민주국가의 진보한 국민들조차 전체주의의 선전활동에 너무나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오웰이 소련과 사회주의에 관한 환상을 단호히 내팽개치기로 마음먹었을 무렵, 채찍질하며 말을 모는 소년의 모습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인간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하던 오웰의 의도를 정확히 담을 수 있는 비유적 소재를 비로소 찾아낸 것이다. / 조지 오웰, 《동물농장》 중에서 53p

 

 

 

 

 

   2장인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편에서는 자유로운 말하기에 매력을 느끼고, 거기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은 작가들이 등장한다. 휴가지에서 ‘갈바니즘’을 주제로 한 어떤 대화에서 영감을 받아 광기에 사로잡힌 의사와 그가 생명을 부여한 괴물에 관한 공포소설을 완성해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창 말하는 가운데 엉뚱하게도 오즈라는 세계에 닿은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 아빠와 아들의 이야기 만들기 놀이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게 된 케네스 그레이엄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마찬가지로 아들의 침대 맡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곰돌이 푸우가 탄생하게 된 A. A. 밀른의 《곰돌이 푸우는 아무도 못 말려》가 바로 그것이다. 문득, 케네스 그레이엄과 A. A. 밀른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꾼은 바로 부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아이의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따뜻한 이야기 하나, 꿈을 키우게 하는 이야기 하나가 그 어떤 동화 못지않은 상상의 세계를 펼쳐줄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그런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잠깐, 이거 정말로 지금 막 지어낸 이야기 맞아?”

캐럴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응. 얘기하면서도 계속 지어내는 중이야.”

그로부터 25년 후, 캐럴은 자신의 이야기 중 상당수가 “햇살이 눈부신 황금빛 오후를 제 나름대로 화려하게 장식하며 살다가 덧없이 죽는 여름철의 꼬마벌레들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는 작은 친구들 중 하나가 그날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좋겠다고 청했다.”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109p

 

 

그레이엄은 미국 출판사인 스크리브너와도 출판계약을 맺고 싶어 했지만, 스크리브너는 이 원고에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부족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레이엄에겐 스크리브너가 절대 무시할 수없는 열혈 독자가 있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그의 전작을 읽고 열렬한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떠올린 그레이엄은 잽싸게 원고를 복사하여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레이엄의 출판 에이전트인 커티스 브라운의 회고에 따르면, 이 원고를 읽은 루즈벨트는 “굉장히 아름답고 훌륭한 소설이므로 스크리브너가 ‘반드시’ 출판해야 한다.”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스크리브너는 기존의 결정을 뒤엎고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책으로 만들어냈다. / 케네스 그레이엄,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중에서 125p

 

 

 

   3장인 “현실 속, 그와 그녀의 이야기” 편에서는 실존하는 현실의 인물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소설 속 세계로 유인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유년시절의 친구가 소설 속 반항아 ‘허클베리 핀’으로 되살아난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자신이 열광했던 교수님을 소설 작품에 옮긴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일찍 여읜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키워주고 상류층 사교계의 일원이 될 수 있게 해 준 키티를 모델로 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등의 작품이 그러하다.

 

 

 

   여기서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서 남겨보고자 하는데, 피츠제럴드는 일찌감치 소설의 제목을 《위대한 개츠비》로 정해 놓고서도 결코 그 제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골칫덩어리 주인공 이름을 굳이 제목에 올리기는 싫었을 것이다. <거지와 백만장자 사이에서>, <웨스트 에그의 트리말키오>, <웨스트 에그로 가는 길>,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인생역전을 이룬 남자의 사랑> 등 수많은 제목안이 있었지만, 편집자인 퍼킨스는 한사코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만을 고집했다고 한다. 퍼킨스의 고집대로 책이 출간되기 직전, 피츠제럴드가 급하게 전보를 쳤다. <붉고 희고 푸른 깃발 아래>라는 제목에 꽂혔으니 당장 진행을 중지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미 인쇄된 제목을 바꿀 순 없는 노릇이었다. 책은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 그래도 출간되었고, 피츠제럴드는 ‘제목이 그저 그래서, 솔직히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에 가깝기 때문에’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거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개츠비》란 제목을 두고 왜 ‘위대한’이란 표현을 썼을까 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저마다 다른데,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거라던 작가의 우려와 달리 어찌 보면 제목 때문에 작품이 더 화제가 된 셈이기도 하니 억울할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배리는 꽤 어릴 적부터 불로불사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가 여섯 살이던 해에 형 데이비스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배리의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어린 배리가 형의 옷을 입고 형을 흉내 내면서까지 어머니를 위로했지만, 그는 결코 데이비드가 될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의 형은 가족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완벽한 아이의 모습으로 남았던 것 같다. 이렇게 비극적인 사연을 간직한 채 어른이 된 배리는 어릴 적에 잃어버린 형을 글로나마 되살리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피터팬이 작가의 형처럼 영원히 유년기에 갇혀버렸는지도. / J. M. 배리, 《피터팬》 중에서 181p

 

 

 

 

 

  이 외에도 4장 “어둠 속 저편, 영감이 떠오르다” 편에서는 누추한 감옥이나 어둡고 위험한 세계, 비열한 거리에서 무한한 창조적 영감이 탄생하는 순간을 만나보고, 5장 “영감을 찾아 떠난 위대한 여정” 편에서는 익숙한 집을 떠나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스스로 아이디어를 찾아 나선 작가들을 따라가본다. 끝으로 6장 “내 삶의 현장이 곧 이야기다” 편에서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작가들과 그 현장에서도 번뜩이는 문학적 영감을 포착한 순간들을 만나본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을 법한 어둡고 위험한 세계에 과감히 몸을 던지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생생한 경험을 쫓으려한 작가들의 열망과 노력이 있었기에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오하라의 아내 메리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갑자기 발칵 성을 내며 끼어들었다. 그녀는 두 남자가 전쟁 중에 겪은 일들을 일종의 화려한 무용담으로 기억하는 것에 진저리를 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무결한 영웅들의 싸움이 아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나간 이들은 고작 열 몇 살, 끽해야 스무 살 초반의 어린애들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말이었다. 보네거트는 “메리의 발언으로 나는 주관적인 기억의 속박에서 벗어났고, 이렇게 얻은 새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참전 당시의 진짜 우리들, 즉 열일곱 살, 열 여덟 살, 열아홉, 스물, 스물한 살 애송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고 밝혔다. /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 중에서 252p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는 이제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신비로운 매력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이 이름이 탄생한 배경은 의외로 좀 시시한 면이 있다. 플레밍은 진짜 첩보원에게 번지르르한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지노 로얄》을 쓰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책장을 바라보았다. 책등에 적힌 저자명을 쭉 훑던 그의 시선이 《서인도 제도의 새들》에서 멎었다. 책의 저자는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 짧고 단순하면서 지극히 평범한 이름-플레밍이 찾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 이언 플레밍, 《카지노 로얄》 중에서 355p 

 

 

 

 

 

   편식 없이 다양한 책들을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그간 고전 문학은 생각보다 많이 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여실히 느꼈다. 그래서 작품의 탄생비화를 즐기는 재미도 있지만, 몰랐던 고전 문학을 상당수 알게 되었다는 점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를 테면 조지프 헬러의 《캐치-22》, 윌리엄 S.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 등은 탄생 비화 덕에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미 읽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이 책 덕분에 또 다른 관점에서 다시 읽는 게 기대되는 것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 작품에 얽힌 갖가지 사연들을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수록 작품을 미리 읽어보지 않았어도 재미있게 잘 읽혔다. 물론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보다는 탄생 배경이나 출간 전후에 있었던 특별한 일화에 주목하다보니 가볍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작품을 읽기 전에 한 번쯤 이 책을 읽어본다면 등장인물이나 배경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고전 문학과 친해지는 책읽기의 좋은 방법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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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작가 김애란의 어느 한 시절과 사람이 있던 자리를 더듬어본 이야기들!

만날 줄 몰랐고 만났을 리 없는 것들이 만났을 때 발화하는 순간들에 대한 단상!

 

 

 

   나는 무슨 이유로 글을 쓰겠다고 한 것일까.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름을 넣어가며 드문드문 소설 쓰는 재미에 빠져있던 나는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것도 수능 시험을 앞두고 쓰고 싶은 소재가 하나 떠올라 그걸 내내 붙들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시험을 망쳤고(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길로 인터넷에 소설을 올리기 시작해 나름 유명세를 얻었다. 날이면 날마다 독자들이 늘어가는 재미에 비례해 소설을 쓰는 재미도 늘어났고, 그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문예창작학과에 대뜸 가보겠다고 호기롭게 지원까지 했다. 하지만 높아진 나의 어깨는 학과 선배들이 가득한 동아리 학회 첫 시간부터 보기 좋게 무너져 내렸다. 이건 소설이, 문학이 아니라고.

 

 

 

   문학이 대체 뭔데. 흙빛이 된 얼굴로 내 언젠가 저들보다 잘 써서 먼저 등단하겠노라 다짐하며 그때부터 이혜영, 김연수, 천운영, 박민규, 편혜영, 김애란 같이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작가들의 작품을 정말 말도 안 되게 끊임없이 읽어나갔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좌절하게 한 것은 이 평이한 삶에서는 문학이란 게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었고, 내게는 그들과 나란히 설 만한 재주가 없다는 뼈아픈 자책뿐이었다. 언젠가 김애란 작가가 학과에서 주최하는 문학포럼에 초대되어 왔던 날, 뒤풀이 자리에서 나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의자에 앉은 그녀에게 차마 하지 못해 삼킨 말은 “나도 당신 같은 글을 쓰고 싶어요.” 였다. 또 “어쩌면 이름도 그렇게 문학스러워요?” 라고 묻고 싶었다. 대체 당신의 눈은 나의 눈과 어디가 어떻게 달라서 그렇게 예민한 구석구석까지 읽어낼 수 있는 것이냐고,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상상하면 문장을, 이야기를 그렇게 쓸 수 있는 건가요, 속으로만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다. 유치하게 보일까봐. 결국 이러한 시도들에서 머뭇거렸던 것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문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건 아닌지. 그냥, 문득, 김애란이란 이름 석 자만 생각하면 그 날 묻지 못했던 질문들이 내가 작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처럼 자꾸 생각이 난다.

 

 

 

나를 부른 이름, 너와 부른 이름, 우릴 부른 이름들 사이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김애란의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이 출간되었다. 산문집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의아할 정도로 그간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가족 혹은 청춘에 관한 보편적인 주제를 유려하게 다루어왔던 작가는 이번 산문집을 통해 호흡을 늦추고, 자신의 내밀한 어느 순간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것은 나의 기원을 발견하는 순수한 자기고백이자 말 주변에서 더듬거리는 문학가로서의 사정이며 발화하는 어떤 순간들에 대한 단상이다.

 

 

 

 

 

 

   책은 ‘나를 부른 이름’, ‘너와 부른 이름’, ‘우릴 부른 이름들’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인 나를 부른 이름에서는 작가의 유년 시절, 학창 시절, 한 가족의 딸로 일상 속에서 겪은 소소한 추억을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맛나당’이라는 이름의 가게에서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 상에 대한 태도를 유산으로 남겨주셨던 어머니를 추억하고, 이마에 좁쌀 여드름이 잔뜩 난 열다섯 살의 얼굴과 듀스를 좋아했던 한 남자애를 떠올리게 하는 <여름 안에서>란 노래를 생각하며, 무더위에 너무 지친 나머지 눈앞에 보이는 집에 들러 얼렁뚱땅 계약을 했던 집에서는 그곳에 머물다 간 다른 이들의 흔적을 상상해본다. 고대하던 대산문학상 시상식 날, 새 신발을 신고 부푼 가슴으로 시상식장으로 가다가 결국 시상대에 오를 때엔 다리를 절지 않으려 애써야 했던 일이나,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동네 어른들이 마련해준 현수막에는 38회여야 할 것이 33회로 되어 있었던 약간의 촌극까지.

 

 

 

   이 중 「여름의 풍속」이란 산문이 내내 기억에 남는다. 8년 전 여름, 고려대학교 근처 헌책방에서 만난 『언어학사』란 책에 얽힌 이야기다. 처음부터 그 책을 사려 했던 건 아닌데, 그것은 학교 휴게실에 있는 낡은 고동색 소파에 앉았다가 우연히 같은 과 동기이자 한참 연장자인 B와 책방 순례를 다니기로 약속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B는 고려대 앞 책방에서 적어온 목록을 들고 능숙하게 책장 사이를 돌며 보물처럼 찾아낸 책을 앞에 내놓았다. 작가는 책방의 구조나 책이 배열된 원리에 어두워 좀 소극적으로 굴었던 탓에 B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가 아니라 『언어학사』를 읽으라고 건네줬음에도 이렇다 할 반론을 펴지 못했다.

 

 

 

   덕분에 내내 묵혀두었던 책은 그로부터 3년이란 시간이 흘러서야 빛을 보게 되었고, 이때 작가의 눈을 사로잡은 건 책의 활자가 아니라 20학번의 황진구란 남자와 92학번의 박선미라는 여자에게로 이어져온 서사였다. 책 속에 곱게 포개져 있던 그들의 수강신청서로 미루어 보건데 분명 연인이었음이 틀림없었다. 혼자 드라마틱한 상상에 취해서였을까, 혹은 치기 탓이었을까. 문득 작가는 수강신청서 하단에 적힌 집 번호 중 남자의 집 번호로 전화를 거는 무모함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아쉽게도 그는 진작 하숙집을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여자의 번호에라도 전화를 걸어볼까 싶었지만 그냥 그만두기로 한다. ‘옛날옛날 안암동에 박선미와 황진구가 『언어학사』를 배우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란 사실을 기억하며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기로 한다. 이렇듯 하나의 소파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모든 게 난데없고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 일이 타인과 연결되고 연결되어 또 언젠가 누군가에게 전해질 이야기까지 나아가는 어떤 거대한 순환을 상상하게 한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다시 오게 되고, 만날 줄 몰랐고 만났을 리 없는 것들이 만나게 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결혼해서 친정을 나왔을 때 전봇대 앞에 내놓았던 내 전공책은 누가 가져갔을까. 거기 적힌 내 이름 석 자를 보고 무슨 상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그것이 좀 불편했다. 내가 여름을 피해 들어온 곳이, 비지땀을 흘려가며 힘들게 도착한 곳이 결국 비슷한 삶이 떠나오고 떠나가는, 붙인 별을 보고서야 ‘아, 밤이구나’ 안도할 수 있는 범박한 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당황스러운 건 그 방의 크기와 높이를 떠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잘도 기어들어 오는 그 가짜 빛들과 그 별들의 운동 안에서 나 역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야간 비행」 중에서 29p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들국화 노래를 듣자 그 생각이 났다. 어쩌면 1년 내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고 있을 어떤 이들이. 기념 세일, 감가 세일, 마지막 세일, 특별 세일. 세상은 언제나 축제 중이고 즐거워할 명분투성이인데.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눌 곳 없이 그 축제의 변두리에서, 하늘을 어깨로 받친 채 벌 받는 아틀라스처럼 맨손으로 그 축제를 받치고 있을, 누군가의 즐거움을 떠받치고 있을 많은 이들이, 도시의 안녕이, 떠올랐다. / 「한여름 밤의 라디오」 중에서 42p

 

 

하지만 중간에 코르크 마개가 부서진 와인을 따기 위해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원해 합심하는 지인들 곁에 앉았을 때, 아버지가 얹어준 고기를 꿀꺽 삼키며, 문학이란 어쩌면 당신들을 초대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당신, 바로 그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학은 하나의 선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 「당신과 조우」 중에서 51p  

 

 

 

   2부인 너와 부른 이름들에서는 동료 문인들을 향한 깊고 다정한 마음을 읊조리듯 이야기한다. 여기에서는 작가 김연수의 문장을 통해 삶을 골몰하고, 작가 편혜영에게서 사귐이란 조촐하고 편안해 막역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작품도 좋고 사람도 좋은 작가 윤성희의 덜렁거림과 엉뚱함에 문학하는 자의 허울도 슬쩍 벗겨본다. 한편, 3부 우릴 부른 이름들에서는 작가로서 ‘당신을 왜 글을 쓰는가’란 질문과 마주했던 순간들 혹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세월호 같은 사회 문제를 통해 사람과 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 혹은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 중 「빛과 빚」편에서 한 한국 작가가 독일의 출판기념회에서 했던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한국의 근대와 분열, 분단을 다룬 소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작가는 독일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결국 어느 편이란 말인가? 오른편인가? 왼편인가?’ 작가는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나는 죽은 사람 편입니다.’라고. 어쩌면 문학이란 죽은 사람 편에 설 수 있는 것, 잊거나 잊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려는 것에서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함께 ‘살아낸’거니 그럴 거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선배는 그렇게 ‘자신이 읽은 문장이 아닌 산 문장’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누군가 오래 쓴 문장을 알아보고 그 문장의 바깥을 짐작하며, 그 둘레에 자기 이야기를 입혀 설명한다. / 「여름의 속셈」 중에서 141p

 

 

어찌 보면 쉬운 말 같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처럼 단순한 말들을 어렵게 이해해가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요즘 나는 ‘우리는 누군가와 반드시 두 번 만나는데, 한 번은 서로 같은 나이였을 때,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상대의 나이가 됐을 때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여름의 속셈」 중에서 146p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269p

 

 

 

 

 

 

   이 외에 글을 쓰는 소설가답게 고전 작품이나 시를 비롯해 문학에 대한 사유나 우리말 어휘에 대해 재치 있고 감각적으로 써내려간 산문들도 돋보인다. 이를 테면 누군가는 문장론에서 ‘부사는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썼을 만큼 작가들이 유독 꺼려하는 부사를 ‘부사는 세계를 우아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흥미롭고 맛깔나게 해준다. 그러니 부사가 있을 곳은 지옥이 아니라 이 말도 안 되는 다급하고 복잡한 세상, 유려한 표현 대신 불쑥 부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속세, 그 세속에서 쓰이는 소설 안일 것’이라 변호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말의 약점을 떠올리며 ‘종종 보다 잘 번식하기 위해 보다 불완전해지기로 결심한 어떤 종처럼 보인다’고 표현하거나 두보가 쓴 「곡강」을 두고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며 문학의 의미와 진정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하는 점도 퍽 인상적이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 「점, 선, 면, 겹」 중에서 252p

 

 

연필 쥔 손에 힘을 주면 책에 흐릿한 홈이 파인다. 그 홈에는 내가 어느 문장에 줄 그은 순간 느낀 시간과 감정이 고인다. 그래서 가끔 그 홈이 물고랑 밭고랑 할 때 ‘고랑’처럼 느껴진다. 나와 나 자신을, 현재와 과거를, 우리와 타자를 잇는 먹 고랑처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이야기도 언젠가 두보의 시구처럼 누군가의 삶과 만나게 될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 「점, 선, 면, 겹」 중에서 254p

 

 

 

 

 

 

   잊기 ‘쉬운’ 이름이라면 몰라도 잊기 ‘좋은’ 이름이라 제목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녀는 계속해서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고 얘기해 온 것 같다. 우연히 발견한 헌책방의 책에서 낯선 두 이름을 건져 올린 것처럼, 이전 세입자가 붙여놓았을 천장의 야광별 무더기와 그 아래에서 꼼짝 않고 누워서 응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입자들을 떠올렸던 것처럼, 그녀는 글을 씀으로써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한 작업을 해나가려는 게 아닐까. 덕분에 이런 작가가, 이런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 참 좋구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당신이란 사람은, 이름마저도 문학스러운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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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셀프트래블 - 2019-2020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정승원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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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유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 바이칼 호수까지!

서울에서 2시간이면 된다, 인기 있는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케이블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채널 중 ‘맛있는 녀석들’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유민상, 김준현, 김민경, 문세윤이 출현해 4MC가 먹방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여느 것보다 특히 인상에 남는 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당일치기 해외먹방_ 블라디보스토크 편’이다. 블라디보스토크가 가깝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4시간 만에 음식을 먹고 돌아오는 당일치기 일정이라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신기했다. 왜냐하면 정말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짧은 시간동안 러시아식 음식과 러시아식 팬케이크, 커피 등 다양한 현지 음식을 맛볼 수 있었는데, 이게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어느 날 무작정 떠나보는 여행도 가능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단 서울에서 2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비행시간에, 미식문화가 발달한 곳이라 미식 투어만 계획해도 일단 성공이며, 세계 정상의 반열에 오른 마린스키 극단의 발레를 감상하고, 깜짝 놀랄 만큼 저렴한 뷰티제품들과 식료품을 쇼핑하는 즐거움까지 있으니 이만하면 가벼운 해외여행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목해볼만 하지 않을까.

 

 

 

아시아의 유럽, 러시아의 매력에 빠지다

 

 

   여러 방송 매체에서 주목한 덕분인지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가이드북이 줄을 이어 출간되고 있다. 제주항공을 비롯해 이스타, 티웨이 등 저비용 항공사들이 취항을 하기 시작할 만큼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러시아는 사실 수많은 해외여행지 가운데서 너무나 낯선 느낌이었고, 러시아어는 아예 몰라서 일찌감치 관심조차 없었던 곳이었다. 그러다 ‘맛있는 녀석들’ 편을 보고 <블라디보스토크 셀프트래블>을 만난 이후에는 신랑에게 “우리 여기 꼭 가보자”고 호들갑을 떨며 소개시켜주기까지 했으니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 상위에 이름을 올려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셀프트래블>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까지 극동 러시아와 시베리아 주요 지역을 소개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 항일 투쟁의 역사를 간직한 우수리스크를, 하바롭스크에 이어 이르쿠츠크에서는 바이칼 호수를 관광할 수 있는 알혼 섬, 리스트비얀카, 환 바이칼 열차를 소개한다. 본격적인 지역 정보에 들어 가기 앞서 책은 ‘러시아 여행에 관해 자주 묻는 핵심 질문 9가지’, ‘시베리아 극동 러시아 추천 일정’,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모든 것’, ‘서바이벌 필수 애플리케이션’, ‘막심, 얀덱스, 겟 택시 이용방법’, ‘이르쿠츠크 공영 시외버스 예약방법’, ‘러시아어 까막눈이 정보 얻는 법’과 같이 러시아어를 하나도 모른다 하더라도 여행을 두렵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가이드 해준다.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꼭 해봐야 할 모든 것’에서는 이곳에서 놓치면 100% 후회할 만한 것들만 엄선해놓았다. ‘먹고, 즐기고, 힐링하는 극동 러시아, 시베리아 하이라이트’, ‘러시아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들’, ‘러시아의 대표 맥주, 발찌까’, ‘한국보다 저렴하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산물 즐기기’, ‘이건 꼭 사야 해! 식품 편’, ‘식품 쇼핑 Tip 1 차가버섯, 잘 사고 잘 먹는 법’, ‘식품 쇼핑 Tip 2 진짜, 꿀 제대로 사는 법’, ‘식품 쇼핑 Tip 3 내 입맛에 맞는 먹거리를 찾아라~’, ‘이건 꼭 사야 해! 뷰티제품 편’, ‘이건 꼭 사야 해! 기념품 편’, ‘내 인생의 발레를 보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즐기는 세계적인 문화공연’, ‘공연 문화 예술 핫 플레이스 다 모여라!’, ‘러시아 정교회 100배 즐기기’, ‘내게 꼭 맞는 숙소를 찾아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에 있어서 필수인 정보들을 하이라이트만 모아 소개한다. 개인적으로는 방송에서도 나와서 익히 알고 있는 소고기 스트로가노프와 곰새우, 조지아식 만두인 힌깔리, 양념고기를 꼬치에 끼워 숯불에 구운 러시아식 바비큐 샤슬릭은 꼭 먹어보고 싶다. 또 각종 공연 관람 전에 좌석 예약 하는 방법까지 상세히 일러주고 있으니 도전해보고 좋은 공연 하나 관람하고 오는 것도 큰 추억이 될 듯하다.

 

 

 

 

 

 

Check_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꼭 해야 할 일

1. 독수리 언덕 전망대 오르기

2. 킹크랩, 곰새우 같은 해산물 맛보기

3. 샤슬릭(케밥), 보르시 등 러시아 음식 즐기기

4. 각종 문화 예술(국립 마린스키 극장, 서커스 등) 즐기기

5. 뷰티 제품, 식료품 쇼핑하기

 

 

 

 

   ‘맛있는 녀석들_ 블라디보스토크 편’을 보면 해양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주요 관광지를 잇는 대표적인 거리인 ‘아르바트 거리’를 거니는 장면이 나온다. 서쪽 바다(해양공원-한국 관광객들에겐 곰새우 먹는 곳으로 유명하다)를 향해 아래로 뻗어 있는 이 길은 1km가 채 되지 않지만,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처럼 보행자 전용도로로 각종 레스토랑과 카페 등이 밀집해 있고, 날씨가 좋은 날은 다양한 거리 공연 등을 즐길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가볼 만한 곳으로 손꼽히는 독수리 언덕 전망대는 항구를 중심으로 금각교와 바다 저 멀리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전망대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서로 다른 매력이 있어 두 번 방문하는 관광객도 많다고 하니 이곳에서 다채로운 매력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연해주' 즉 프리모르스키는 애국지사들의 망명이 이어졌던 곳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12km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이상설, 최재형 선생 등 독립 운동가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고려인 문화센터'라고 있는데, 연해주 내 한국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강좌를 통해 우리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아무르 강이 흐르는 낭만적인 유럽풍 도시_ 하바롭스크

유럽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하바롭스크는 남성적인 블라디보스토크와 달리 여성적 느낌에 포근함까지 감돈다. 세계에서 10번째로 길고 8번째로 큰 아무르 강이 중국의 만주와 하바롭스크를 거쳐 북쪽 오오츠크 해로 유유히 흘러가는데, 그 넓고 잔잔함이 강변을 따라 난 산책로와 아름다운 공원들, 정교회들과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러시아 내전에서도 큰 피해 없이 잔존한 유럽식 건물들은 하바롭스크를 극동지역의 주요 관광지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하바롭스크에서 가장 번화한 무라비예바-아무르스코고 거리를 걷다보면, 순간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 136p

 

 

바이칼 호수와 역사 건축물들의 향연_ 이르쿠츠크

‘시베리아의 푸른 눈’이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는 가혹하리만큼 황량한 시베리아 오지를 반짝반짝 빛나게 만드는 진정한 ‘시베리아의 진주’다. 약 2천 5백만 년 전에 탄생한 바이칼 호수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이자 가장 깊고 깨끗한 호수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돼 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은 호수로 지상의 물 4분의 1가량을 함유하고 있는데, 아직도 개발의 손이 크게 닿지 않아 원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 164p

 

 

 

 

   유럽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하바롭스크는 아무르 강변을 따라 난 산책로와 아름다운 공원들, 정교회와 어우러져 포근함이 감도는 낭만적인 도시다. '무라비예바-아무르스코고' 거리를 걷다보면 순간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라고 하니, 이때 1시간 가량 소요되는 유람선을 타고 바다같이 드넓은 아무르 강을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듯하다. '성모승천 대성당'과 '구세주 변모 대성당'을 배경으로 예쁜 사진을 남겨보고,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에서 자연과학과 고고학, 민족학, 역사학 등을 총괄하는 다양한 전시물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 반면 시베리아의 진주라고 불리는 이르쿠츠크는 청정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바이칼 호수'가 있는 곳으로, 책에서는 별도로 알혼 섬과 리스트비얀카, 환 바이칼 열차 타는 법을 소개하고 있으니 꼭 경험해보기를 추천한다. 또 이르쿠츠크 역사를 만든 데카브리스트들의 저택을 방문하고, 러시아의 전통 목조건물 앞에서 사진 찍어보기도 잊지 말자.

 

 

 

 

 

 

   이렇듯 <블라디보스토크 셀프트래블>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하여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의 다양한 매력과 여행시 꼭 필요한 정보들을 꼼꼼하게 소개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는 러시아에 대한 기본 정보, 간추린 러시아 역사, 러시아 여행 준비법, 인천공항 이동 및 출국법, 러시아 입국하기, 알아두면 쓸데있는 러시아어, 서바이벌 영어와 EASY TRAVER PAPER도 함께 수록되어 있으니 유용하게 활용해볼 수 있다. 얇지만 톡톡한 정보들로 가득한 이 책 한 권 가방에 든든하게 넣어가지고서 가까워 더 매력 있는 러시아 여행의 묘미를 꼭 느껴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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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 - 모든 어른 아이에게 띄우는 노부부의 그림편지
안경자 지음, 이찬재 그림 / 수오서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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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랑하는 세 손자에게 전하는 마음이 담긴 편지!

불안하고 답답한 세상에 큰 어른이 전하는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

 

 

 

   인스타그램에 @drawings_for_my_grandchildren이란 계정을 검색하면 한 노부부의 피드가 나온다. 77세의 나이로 할머니가 글을 쓰고 할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며 자신들의 세 손자들을 위해 일상의 단편과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최근에 올라온 글 중에는 할아버지가 손자 아로에게 자신이 생애 가장 크게 화가 났던 일을 얘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로의 아빠가 두 살 정도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하나 둘 사서 모아두었던 레코드판을 아무렇게나 꺼내놓고 마구 장난을 치는 바람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적이 있다며 웃지 못 할 지난날을 회상하는 내용이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일상의 정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림과 손자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려주는 글들은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나의 부모님이 손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미소가 슬쩍 번지다가도 이내 마음이 뭉클해져서 아련해진다.

 

 

 

땅을 내려다보지 말고 별을 올려다보렴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는 전 세계 35만 팔로워가 사랑하는 인스타그램의 주인공 이찬재, 안경자 부부의 글과 그림이 담긴 따뜻한 그림에세이다. 스물여섯의 나이로 결혼해 1남 1녀를 둔 그들은 1981년에 브라질로 이민을 간 뒤 함께 살던 손주들이 갑작스레 한국으로 돌아가자 허전함과 그리운 마음을 담아 그림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를 멀리 떨어져 있는 손주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생각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고, BBC, NBC, <가디언>과 같은 해외 유력 매체들이 극찬을 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몰론 컴퓨터와 휴대폰을 다루기가 쉽지 않은 나이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일련의 과정들이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손주들에게 세상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바람을 소박하지만 큰 마음으로 담아놓았다.

 

 

 

세상의 모든 엄마와 아이에게

 

아로가 엄마랑 놀이방에서 놀고 있다. 지금 아로는 참 행복할 거야. 함께 노는 걸 좋아하니까. 엄마랑 있으니 더욱 즐거워 보인다. 아니, 그림 속 아이가 아로가 아니어도 좋다. 어떤 아인들 엄마랑 놀 때 행복하지 않을까.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은데.

 

아! 이 그림을 세상의 모든 일하는 엄마에게 주고 싶다. 몇십 년 전 나도 일하는 엄마였지. 오랜 기간 동안 일하는 엄마였어. 그래. 아이가 늘 걱정되는 모든 일하는 엄마에게 바치련다. 그리고 엄마가 일하러 가서 조금은 쓸쓸한 모든 아이에게도. / 25p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이 사계절로 구성되어 있다. 각 계절의 느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할아버지의 그림과 함께 할머니의 따듯하고 애틋한 시선이 담긴 이야기가 가만가만 실려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거창한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다. 손주와의 소중한 순간들, 가난과 고난의 시절을 겪었던 지날 날에 대한 회상,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예찬과 동시에 훼손되고 있는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 이민자로서의 삶과 시선으로 바라본 낯선 땅의 이미지 등 사계절이라는 계절을 수없이 겪었을 그들의 시선으로 기억하고 기록해놓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의 할아버지처럼, 나의 할머니처럼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해서 그 어떤 감동적인 이야기보다 큰 울림을 전한다.

 

 

 

너의 세계

 

아로야,

네가 태어난 지 5개월이 되었을 때 넌 종일 옹알이를 했다.

버둥버둥, 손과 발도 허공에서 열심히 말했지.

먼 데 있는 할머니에게도 들리는 듯했어.

너만의 생각, 너만의 이야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겠지?

보이지 않는 아로의 세계가. / 77p

 

 

코, 코, 코

 

할아버지에게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아로.

“코, 코, 코~ 입!”

“코, 코, 코~ 귀!”

“코, 코, 코~ 이마!”

집게손가락으로 코를 계속 두드리다가

갑자기 귀에다 갖다 대며 “입!” 한다.

이때 덩달아 귀를 잡으면 안 되는 거야.

얼른 입을 가리켜야지.

옛날부터 내라오는 말 배우기 놀이! / 251p 

 

 

  유독 세 손주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로서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글들이 가슴을 두드린다. 아로가 아플 때 “할아버지가 호오- 해주면 안 아파.” 하고 불어주는 따뜻한 입김과, 꺄르르 웃으며 그것도 맨발로 달리는 아로를 보고 조마조마해지는 마음 하며, ‘꼭꼭 숨어라’ 놀이를 하자고 해놓고서는 자기를 찾지 못할까 봐 조바심 내며 금세 얼굴을 내미는 아이의 모습들까지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데가 없다.

 

 

 

 

 

 

마지막 코뿔소

 

아프리카 대륙 한복판에서 살던 마지막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이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를 읽었어. 동물의 멸종 위기라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마지막 한 마리라니! 힘이 넘치는 얼굴로 묵직하게 버티고 서 있는 수간이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너희에게는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 71p

 

 

해바라기

 

(중략) 영화. 1970년대 한국에서는 상영되지 않아 전혀 몰랐던 유명한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흘러간 영화. 대사 한 마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자막 한 글자 읽지도 못하면서 펑펑 울고 흐느끼며 끝까지 본 영화, <해바라기>. 이제 내게는 잊지 못할 영화가 되었단다. 그날 그렇게 울어버린 건, 영화 속 사랑을 잃은 한 여인의 숨죽인 통곡이 이민자의 외로움을 대신해주어서였을까? / 191p

 

 

 

   책을 읽으면서 참 인상적이었던 것은 문득 기억하고 싶고 되새기고 싶은 것이 생길 때면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보았던 것, 혹은 있었던 일을 들려주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아내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그것을 상상해가며 그림으로 그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참 다정하다. 그 마음이 그림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것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페이지 곳곳에 담긴 소박한 그림들이 더 마음을 울리는 이유다.

 

 

 

 

 

 

   책에 실린 마지막 글귀에 “우리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고 보니 문득 지나온 인생이 보이더라. 어떤 때는 눈앞에 놓인 하루하루 살아내는 게 무척 힘들고, 벅차고, 피곤하기만 했을 때가 있었지. 그런데 여기 서서 돌아보니까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더라. 찬란했더라. 참으로 삶은 아름다운 것이었더라. 너희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 라고 써 있다. 살아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더 많고, 숨이 차고, 다 내려놓고 싶을 만큼 힘들 때가 종종 찾아온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싶을 만큼 잘 견뎌냈고, 또 힘을 내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노부부의 이야기는 이처럼 모든 순간을 잘 견뎌내고 힘내서 살아온 어른들의 삶이 담겨져 있어서 더 아련하고 애틋했다. 그래서 언젠가 내 아이들이 힘들고 지탱할 것이 없고 외로운 순간이 찾아올 때 나의 이야기가 조금은 의지가 될 수 있도록 나와 나의 남편 역시 많이 기록하고 기억하려 한다. 이 아름다운 부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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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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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이후 계속되는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저마다 달라도 너무도 익숙한 그녀와 나의 이야기!  

 

 

 

   최근 연예 뉴스 게시판이 브라를 하지 않고 공공장소에 나타난 한 여자 연예인에 대한 기사로 연일 뜨겁다. 분명 성적 비하 및 노골적이라 여겨질 만큼 민망한 댓글이 득시글거릴 것 같아서 기사를 미처 다 읽지도 않고 창을 닫아버렸다. 특히 꼴펨이니 워마드니 메갈이니 남자와 여자의 대결 구도로 번져서 서로 물고 뜯는 댓글이라면 이전에도 수없이 보았다. 사실 이 땅에서 서른여섯 해를 살아온 여자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실천한 그녀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어느새 우리 사회가 ‘드러내고’, ‘뱉어내고자’ 하는 자유 의지를 더 이상 감추고 짓누를 수만은 없을 만큼 변화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도 놀라워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두 해 전, 페미니즘을 화두에 내걸고 <현남 오빠에게>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조남주 작가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젊은 작가들이 한 데 모여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모두가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하고자 쓴 소설집으로 당시 이러한 시도는 상당히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책으로 읽는 페미니즘과 SNS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 내가 아는 페미니즘과 희망하는 페미니즘, 내 집에서의 페미니즘-딸들에게 설명하는 페미니즘과 남편을 설득하는 페미니즘, 내가 쓰고 싶었던 소설 속의 페미니즘과 결국 내 소설 속에 갇혀버리고 만 페미니즘이 모두 다 다른 언어’여서 ‘무엇보다도 실제의 내가 실천하는 페미니즘이 그 모든 페미니즘을 따라잡을 수 없어 나는 너무 자주 곤란해지곤 했다’는 김이설 작가의 고백처럼 여성들의 삶에 대해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와 고민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고, 이는 많은 독자들에게 페미니즘의 진정성과 가치를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웅크리고 숨죽이고 있던 여성의 언어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 함께 공감하고, 고민하고 또 이야기해볼 수 있는 이러한 시도들이 있었기에 비록 더디지만 우리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야만 한다

 

 

   <현남 오빠에게> 후속작 <새벽의 방문자들>이 출간되었다.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 장류진, 하유지, 정지향, 박민정, 김현, 김현진 등의 6인이 모여 저마다 다르지만 어쩌면 모두가 익숙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충격적이리만큼 사실적이고,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소외를 솔직하게 다룬 이 여섯 편의 작품들은 소설이라 하기에는 나와 내 이웃 혹은 친구들에게도 충분히 있어났을 법한 일들이어서, 마음이 불편해지다가도 금세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소설 속에는 여러 여성들이 등장한다. 포털사이트 관계사에서 댓글 모니터링 업무를 하며 홀로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는 삼십대의 나(장류진, 「새벽의 방문자들」), 무례한 남자 상사를 대차게 한 방 먹이고 자발적으로 공장을 나온 나 그리고 아이를 잃은 상처로 인해 버스정류장에서 하염없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는 룰루(하유지, 「룰루와 랄라」), 클럽의 밴드 멤버와 그루피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성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요구하는 섹스를 받아들여야 하는 나 그리고 태연한 척 했으나 이혼한 부모의 힘 싸움에 상처를 받고 자신의 몸에 자해를 하는 초(정지향, 「베이비 그루피」), 자신의 정치적 신념만 앞세우며 곁에 있는 연인에게조차 훈계와 조소를 퍼붓는 연인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보라’(박민정, 「예의 바른 악당」), 선생들의 추행을 고발하기 위해 학교 복도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유미(김현, 「유미의 기분」), 사내 추행 때문에 그만둔 여자 친구를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녀를 꾸짖고 함께 저축한 데이트 통장까지 들고 가버린 남자 친구 때문에 이성을 잃어버린 나(김현진, 「누구세요?」)가 있다.

 

 

 

누구에게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고 누군가 이해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김과 함께 있으면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갑갑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단지 그런 모호한 이유로 김과의 결혼을 포기한 여자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고 굴러들어 온 복을 차버렸다고도 했다. 네 주제에, 라는 말도 들었다. 여자는 그런 말들을 흘려보낼 정도로 덤덤하지는 못했다. 왜 결국에는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고 남들이 미쳤다고 할 때마다 내가 정말 미친 짓을 한 거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초조한 적도 있었다. / 「새벽의 방문자들」 중에서 16p

 

 

가난하고 불안정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도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 어머니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떤 빛깔이고 어떤 소리인지 안다. 가난에서는 쓴맛이 아니라 짠맛이 난다. 그 소금기를 혀끝에서 느껴본 사람은 부르르 몸서리치게 되고, 인생에 시간과 사랑의 양념을 치는 일에 인색해진다. 우리 사이에는 아이가 없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 「룰루와 랄라」 중에서 51p

 

 

지긋지긋하다고, 작작 좀 하라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내가 지겨워졌다. 평화와 고요를 원하는 사람에게 얘기 좀 하자며 추근거리기는 싫었다. 어차피 우리는 싸움닭 체질이 아니었다. 도전을 포기하자 관계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결혼, 거기가 우리의 목적지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전진했을까, 후퇴했을까. 아니면 결혼이란 관계의 제자리걸음인 것일까. / 「룰루와 랄라」 중에서 62p

 

 

 

 

 

 

   각각의 소설에는 여성들이 아직도 뿌리깊이 박혀 있는 각종 편견과 배려 없는 농담들에 좌절하는 순간들이 등장한다. 느닷없이 침범하곤 하는 초인종 소리에 혼자 사는 여성으로써 불안에 떨고, 성적 판타지를 해소하는 출구로 거래를 하는 남자들과 그들의 소비 대상이 되는 여성들은 길바닥에 뿌려진 전단지만큼 하찮은 것이 되며(장류진, 「새벽의 방문자들」), 결혼을 앞두고 동거 중인 남자의 바나나를 손수 칼로 잘라 먹이는 정성은 들여도 정작 자신이 먹을 건 챙기지 못하는 것이나, 상사라는 권위를 앞세워 반말을 찍찍 내뱉는 과장의 권위의식은 번번이 불쾌하기 짝이 없다(하유지, 「룰루와 랄라」).

 

 

   P가 섹스를 하면서 콘돔을 쓰지 않고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 하는 사이 나는 생리가 하루만 늦어져도 아침저녁으로 테스트기를 사러 다닐 만큼 불안해해야 하고(정지향, 「베이비 그루피」), 월급다운 월급을 받지는 못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내 삶을 살기로 자처한다는 것이 고모의 눈에는 안정적이지 못한 일에 빌빌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다(박민정, 「예의 바른 악당」). 또 ‘여자는 꼬리가 아홉이라서 꼬리를 잘 친다는 얘기’를 농담이라고 던지는 남자들이 도처에 존재하고(김현, 「유미의 기분」), 밤낮 미스 리 미스 리 어쩌고 하며 툭하면 허벅지며 엉덩이를 주물럭대고 은근슬쩍 점심 먹으러 가는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제 물건을 밀어대던 직원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겠다는데, 정작 연인이라는 자는 “네가 사회생활 하는 법을 몰라서 그래!”하고 철딱서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다(김현진, 「누구세요?」).

 

 

 

사리 판단에 어두운 유권자일수록 선택의 기로에서 그저 익숙한 쪽을 선택할 것이다. 보라의 생각에 그따위 선택이란 폭력을 일삼는 남편에게 돌아가는 촌부들의 그것 같았지만 그런 이유라고 해도 간단히 무시해버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 「예의 바른 악당」 중에서 159p

 

 

그 종이 한 장 한 장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놈 한 놈을 떠올리게 했다. 그 노랗고 작은 것들이, 그 보잘것없는 종이 쪼가리가 한데 모이자 크고 넓고 거대한 것이 이루어졌다. 많은 여학생들이 포스트잇으로 이루어진 그 네모난 세계에 연결됐다. 그것이 마치 자유로의 입구라도 되는 양 환호했다. 또한 많은 남학생들이 포스트잇으로 이루어진 그 정체불명의 세계에서 눈을 돌렸다.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내면으로 향하는 입구라도 되는 양 헐, 존나, 대박, 메갈, 꼴펨, 진지충이라는 말을 내뱉고 사라졌다. / 「유미의 기분」 중에서 214p

 

 

그 통장의 체크카드는 언제나 재영의 지갑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가끔 근사한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떠날 때 실은 각자 먹은 대로 낸 셈이건만, 나는 늘 이 정도는 한다는 듯 여유롭게 카드를 지갑에서 꺼내 자연스럽게 서버에게 건네는 그의 손짓이 늘 이런 파인 다이닝에서 여자 친구를 호강시켜주는 남자 행세를 하는 것 같아 간혹 찜찜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누구 하나라도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에 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 「누구세요?」 중에서 248p 

 

 

 

  하여 소설 속의 여성들은 부조리와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을 시도하거나 연대를 도모한다. 성매매를 하기 위해 찾아온 새벽의 낯선 방문자들의 얼굴을 캡처하고(장류진, 「새벽의 방문자들」), 첫 아이를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잃고 홀로 심연에 빠진 룰루에게 다가가 자신도 함께 기억해주겠노라 말해주기도 하며(하유지, 「룰루와 랄라」), 연예와 우정 사이에서 소외를 느끼면서도 늘 침묵하기만 했던 보라는 결국 스스로 떠나기로 작정하고 그간 친절함으로 포장된 위선과 기만에 이제 저항하려 한다(박민정, 「예의 바른 악당」). 수많은 여학생들을 배려하지 않는 어른들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까발리고(김현, 「유미의 기분」), 대상화되기만 했던 ‘보이는 자’에서 스스로 ‘보는 자’가 되어보기 위해 발칙한 시도를 감행한 (김현진, 「누구세요?」) ‘나’ 역시 그러하다.      

 

 

 

룰루의 눈 속에서, 조그만 꼬맹이가 조그만 손으로 터뜨린 조그만 폭죽 같은 불빛이 타올랐다가, 사그라졌다. 룰루의 그리움은 나의 고독이 되었다. 우리 것이 되었다. 나는 그 눈부시고 고결한 고통을 받아들였다. 내 뒤에 올 또 다른 여자의 고통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룰루,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당신의 권리예요. 그러니까 계속 싸워줘요. / 「룰루와 랄라」 중에서 82p

 

 

그러니까 나는 그때 내가 가진 밑천을 모두 털어 초대되지 않은 세계에 편법으로 침투했다는 생각. 그리고 끝내는 부끄러운 몰골로 추방당하고 말았다는 생각.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걸어 다닐 때마다 몰려드는 그런 감정을 아주 오래 의심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힘들었겠네.

초가 말했다.

너도. 힘들었겠네. / 「베이비 그루피」 중에서 143p

 

 

형석은 사과할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자신을 만만히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고, 승우는 사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평생 기억하는 인간이야말로 누군가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다. / 「유미의 기분」 중에서 221p

 

 

 

 

 

 

   여섯 편의 작품 중 특별히 의미 있게 읽힌 작품이 있다면 바로 「유미의 기분」이다. 5편의 작품이 모두 화자가 여자인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주인공이 남자다. 특히 형석은 동성애자이지만 이를 숨긴 채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다. 어느 날 수업을 15분 정도 남겨두고 학생들과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다가 농담 삼아 “여자는 꼬리가 아홉이라서 꼬리를 잘 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학생 중 유일하게 유미가 정색을 하고 나서는 바람에 아이들 앞에서 멋쩍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형석은 유미의 그 거침없는 행동에 속으로는 ‘뻣뻣한 년’이라고 뇌까린다. 그런데 복도 한쪽 벽면에 그간 여학생들에게 성적 수치심이 가득 담긴 말을 함부로 내뱉고, 예의 없이 굴었던 선생들을 고발하는 포스트잇이 나붙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간 유미에게 불쾌감을 느꼈던 형석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마땅히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할 자신들의 존엄을 지키려한 유미의 용기 있는 행동에 이제 그녀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하기에 이른다. 이 땅의 수많은 유미들에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우리 모두가 고민해봐야 하는 것처럼.

 

 

 

 

 

 

   김현 작가는 자신의 작가노트에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피해의 이야기를 생존의 이야기로 바꿔 쓰고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전한다. 계속 말하겠다.’고 써 놓았다. 언제부턴가 페미니즘이라는 말만 나와도 불편함과 불쾌감을 드러내고, 대체 언제까지 그런 소리를 해댈 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말은 많고 해야만 하는 말도 많다. 변화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현남 오빠에게>를 비롯하여 <새벽의 방문자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시도와 또 계속된 새로운 시도들이 변화와 더불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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