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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하루는 없다 - 아픈 몸과 성장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희우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2월
평점 :

누군가에게는 이 하루가 너무나 간절하고 특별할 수 있다!
병명이 아닌 온전한 나로 살고 싶은 이들을 위해!
투석은 또 다른 삶의 방식이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목이 아닌 나를 살리는 길에 가까웠다.
삶을 얻은 것에 비하면 당연했던 일상을 내어준 것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랐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복막투석 환자다. / 20p
“대체 왜? 왜 나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처음 ‘투석’이라는 말이 자신의 생으로 들어오는 순간, 고작 스물다섯이었던 그녀는 가슴을 퍽퍽 치며 물었다고 한다. 루푸스를 앓게 된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나에게만큼은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부정하고, 어떻게 삶이 나를 배신할 수 있느냐고 분노했지만 달리지지 않는 현실. 금세 바닥나는 체력, 깜빡거리는 기억력, 자주 붓는 무릎, 쓰임을 다한 신장. 청춘에게 어울리는 청사진이 아닌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죽음이 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삶. ‘어쩌면 안경과도, 치아 교정과도 같은 것일지 몰라’ 하고 마음을 다독일 새도 없이 한계에 다다른 몸의 아우성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복막투석 환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장애와 성장, 그 사이에서 늘 고민하는 한 청년의 분투기
『당연한 하루는 없다』는 열여덟 살부터 희소 난치병을 앓아온 저자 희우의 십 년 간의 투병기를 담은 에세이다. 루푸스, 만성 염증성 자가면역질환으로 결합조직과 피부, 관절, 혈액, 신장 등 신체의 다양한 기관을 침범하는 전신성 질환. 처음 루푸스 신염이라는 낯선 병명을 듣는 순간 그녀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난데없이 ‘루푸스를 가진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녀는 어렴풋이 느꼈나보다. 다시는 원래의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때부터 그녀는 조금씩 더 먼 과거로 회귀해서 잘못돼 보이는 선택을 꾸짖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 더 빨리 병을 발견했더라면, 주먹밥으로 때우지 않고 건강하게 잘 먹었더라면, 목표하는 대학 진학을 위해 스테로이드를 하루 열한 알, 열두 알씩 먹으며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대학을 포기했더라면. 지금 상황이 밑바닥이라고 느껴져서 뭐든 돌이켜보고 싶은 마음. 그러면 지금과는 달랐지 않았을까 하는 어떤 가정법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언제 치유될지 알 수 없는 이 기나긴 고통 속에서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저 앓으며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며칠이 삭제되어 있다. 이렇게 잃어버린 내 시간은 대체 얼마나 될까? / 22p
병이 남긴 자국이 진흙처럼 덕지덕지 묻어 내가 아래로 아래로 빠지면, 내 곁의 사람들은 내게 ‘나’를 건넸다. 찬란하던 때의 나를, 아픔이라곤 모르고 철없이 밝기만 했던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아프지 않은 내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는 순간, 나는 그 진흙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25p



나의 아픔이 오로지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저자는 나만의 전투인 줄 알았던 고난을 치르는 동안, 동생도 한쪽에서 함께 견디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은 고작 열여덟에 불행을 마주했다고 소리치는 사이, 겨우 열여섯에 아픈 누나의 투정과 울음을 지켜보며 누나보다 더 자라야 했을 동생. 그는 청하고 투정할 자리를 줄여 누나에게 모든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예순에 가까워진 부모는 자신의 신장을 딸에게 내어주기 위해 평생을 가까이 하던 술, 담배를 끊고 기꺼이 건강한 몸을 만들려 애썼다. 애써 덤덤한 척 했지만 아픈 자식이 철없이 자신의 고통만을 말할 줄 알았던 사이, 주름진 손과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만큼 부모의 마음도 새어가지는 않았을까. 나는 문득 두 번의 암투병을 하는 동안 오히려 아픔의 무게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가족에게 짐이 될까 걱정했던 엄마가 떠올라서 울컥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고작 한 줌의 위로도 되어주지 못했던 것 같은데. 환자의 아픔은 환자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고통이 여전히 무겁고 또 무겁다.
얼굴은 하나의 정체성이었다. 얼굴이 달라지고부터 사람들은 나를 이전의 나로 봐주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아닌 것만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날 때까지 얼굴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나도 내 마음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았지만, 이전의 나도 지금의 나도 아닌 채로 버텼다. 어쩌면 이전의 그림자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반쯤은 이방인인 듯이, 또 반쯤은 지워진 듯이. / 54p
나는 꼭 오래된 배터리 같았다. 조금만 써도 얼마 못 가 방전되어버리는 배터리. 그래서 침대에 온종일 붙여 놓아야 겨우 충전이 되는 고물. 닳을 대로 닳아버린 내 몸을 얼마나 더 쓸 수 있을까, 내 몸의 소비기한은 이미 지나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울다가 잠든 다음 날엔 꼭 몸이 아팠다. / 74p
종종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바라본다. 내 배에 그어진 세 개의 선을 또렷이 본다. 손톱만 한 것, 손가락만 한 것, 손 전체로도 가려지지 않는 것. 도관이 자리 잡았던 구멍, 그 호스를 넣기 위해 찢었던 자국, 웅이의 신장이 들어간 곳. 그리고 겨드랑이, 가슴, 골반, 허벅지 곳곳에 자리한 선홍빛의 튼 살도 눈에 들어온다. 과거의 치열과 고통은 내 몸에 이렇게나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10년이 지난 튼 살은 색이 바랠 뿐, 나아지지는 않았다. 내가 생의 끝까지 가져가야 할 어떤 운명의 조각이 몸에 새겨진 것 같았다. 완치가 없는 루푸스는 끝나지 않으니까. 이식된 신장의 수명에도 기한이 있다니까. 완전한 끝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 193p


저자는 여전히 병을 고백하는 것은 어렵고 괴롭다고 한다. 고통을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병은 평생 나와 함께인 듯 아닌 듯 살아갈 것이고, 투석과 이식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겠지만, 많이 울더라도 또 많이 웃으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루푸스의 나’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사랑과 기쁨들을 그러모아 ‘나’라는 사람 자체로 존재하고 싶다고. 루푸스라는 병에는 완치란 없기에, 이식된 신장의 수명에도 기한이 있기에 완전한 끝이란 없을지도 모르지만 부디 그녀가 오래오래 덜 아파하면서 행복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이, 그녀가 보여줄 삶이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