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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인상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레몽 루셀 지음, 송진석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월
평점 :
Out of Africa
너무 기억이 까마득해서 앙드레 지드를 새로 찾아 읽었다. 세권 합본 늘 세번째 자리 쯤 진이 빠질 때 끼여있던 배덕자L'immoraliste 우선 골랐다. 안 읽은 책인지, 까맣게 잊은 건지 본 기억이 없다.
내용은 아버지를 따라 영특한 머리로 문헌학, 역사학의 길을 걷는 20대 중반의 미셀,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염이라 생각하고 애정없는 결혼을 하고 아프리카, 튀니지로 신혼여행을 간다. 역사학자답게 튀니지 내 로마 유적들만 실망스레 둘러보고, 시름시름 앓다가 각혈을 하고 결핵은 진단 받고 열에 들떠 정신없는 가운데 몸보전을 위해 식민지 알제리 비스크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요양으로 회복을 하고 야만의 건강이, '어린' 소년들의 활기가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온다.
이후 활력을 차려 이탈리아를 거쳐 파리, 어머니 장원 노르망디에서 휴식하며 학자로서 첫걸음 떼는데 화려하게 꽃 피운 문명이 맥없이 시들듯 시들고, 옆에서 성심으로 돌보던 아내 시름시름 앓고, 말라리아 진단을 받고 과용량 퀴니네를 울며 겨자먹기로 먹은 9개월 임부 그만 유산을 하고 만다. 이후 각종 산후 합병증에 정맥염에 색전증 게다가 심부전까지 죽을 고비에 말없이 시달리는 동안, 지중해 핏줄, 스페인 모친을 둔 어느 막장 집안의 어린 아들들에게 묘한 호기심에 동해 접근을 시도하며 그 다리로 숲에서 덫으로 밀렵하는 못되어 먹은 아이들과 어울려다니며 순경과 도둑 노릇 동시에 하며 아이들을 망가뜨려 놓는 재미로 지낸다. 그러다 민낯을 들켜 체면을 잃고만다,
학계, 인척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이 젊은 학자, 좋아지던 아내 결국 결핵 진단을 받고-아마 처음부터 결핵이었을 것 같다-그 아내 핑계로 한겨울에! 스위스 요양을 간다. 결국 남쪽 이탈리아로, 그전에 올라왔던 길을 마치 쫓기듯이 되짚어 내려가 물좋다는 팔레르모(레몽 루셀이 삶을 뜬 곳이다)를 거치며, 희망의 불씨를 보지만 이도 잠시 결국 알제리로 간다.아내를 사랑하노라, 극진히 간병하노라, 이 버거운 여행길에 있는 돈을 다 써더라도 치료하리라 다짐은 헛나발, 그 옛날, 그 회복의 기억에 의존해 돌아가지만 기실, 그 아내로부터 '휴식'이 가장 큰 행복인 비활기성 상태로부터 도망가는 길이다. 촌철살인 날카롭게 마음을 집어내는 아내가 버거운지, 뼈만 남은 아내가 그 몸을 내보이며 암묵적으로 호소를 해도 묵살, 벗어나려던 몸부림이 성공하듯, 모랫바람에 스물둘도 안 된 아내, 젊은 남편을 두고 대량각혈로 절명하고 만다.
책 중간에 (일지 못할) 스캔들로 세상의 지탄을 받지만, 주인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기는 학자/정치가 메날끄,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며 부평초처럼 세계각지를 떠돌지만, 어느 누구보다 호사스럽게 호위호식 살아가고 묵고 있는 호텔방(들)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네팔을 비롯, '원시적'인 기념품들이 가득하다. 자신이 받는 질책과 자신을 가를 생각이 없으며, 도덕의 정의 거짓으로 매달린 사람들을 질책하고 현재를 미래를 담보 삼아, 과거를 교사 삼아 희생할 생각이 없다 은근히 부추긴다. 이미 비스크라에서 그런 삶의 단면에 이끌렸던 미셀, 아내의 사후에 떠날 생각이 없는 건지, 떠날 힘이 없는 건지 알제리 사하라를 앞에 두고 살아간다. pedorasty로 로
이런 메날끄 저리 가라로 부유한 삶을 사는 게 아프리카 없는 "아프리카 인상"의 작가 레이몽 루셀이다.
Out of mind
이 책의 아프리카는 오페라와 고전비극 속 일차원적 대립관계와 일직선적인 해결, 불규칙한 계단식 진행과 뜬금없는 전환이 통하고, 다다이즘 전시공간 간접체험 아프리카처럼, 원시성과 야만성으로 넘겨짚는 곳, 쥘 베른의 마법적, 상상적 과학이 통하는 곳이라면 극동이든, 남극이든 어디든 해당하는 곳이다.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선보이기 위해 지역적인 특색, 여행기 수준 지식은 철저히 지양하기' 때문이다. 쥘 베른를 사모하고 빅토르 위고를 존경했던 작가, '남들이 자신이 무얼 읽는지 훔쳐보지 못하도록' 장정본 책 껍데기를 다 뜯어낸 뒤 들고 다녔는데, 그 반대로 자신의 작품보다, 적어도 그 작품만큼이나 그의 껍데기와 그 뒷장의 수식어가 더 화려하고, 그 기행으로, 그 정신병력(정동성 장애는 다른 작가들이나 앓으라지, 이 작가 분열성장애 갖고 있다.)으로, 소수적인 성적취향으로 유명하다.
작가만큼 화려하고 기이했던 어머니, 땅짚고헤엄치는 곳이면 못 가는 데 없을 정도로 부자이니, 열한 살 루셀 식민지 남아프리카 여행까지 한다, 아들 사랑이 유달랐는지, 피아노 영재 아들과 여장과 인형놀이를 즐겼으며, 또래 아이들에게 가장무도회를 열어주고, 어느 누구보다 잘 차려 입은 그 아들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하며 우레 같은 찬사를 맛본다. 콘세르바토르에서 피아노 (아마도 여섯 명 쯤 준?) 이등상까지 받았으니, 기고만장한 젊은이, 열아홉에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이 찬란한 빛이, 저 중국까지 뻗어나가 떨치는 환상에 도취되고, 출판과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의 대열로 들어서 각광을 받으리라는 오진 망상에 식음 전폐하며, 왜냐 '음식은 자신의 명정함을 해치므로' 두문불출 시를 쓰고 자비출판했는데, 아무도 길거리에서 아는 체는 커녕 돌아보지도 않아 찬물이 싸악.
아마 그 시대 접근이 쉬웠던 아편, 등장과 함께 중독자부터 생긴 몰핀, 바비츄레이트도 일조하지 않았을까만 중독적인 성향의 이 작가, 이런 것쯤 쉽게 극복할 막대한 유산이 있겠다, 매주 2번씩 정신치료를 받으며 쉽게 치료되지 않는(아마 전혀 치료될 기미가 없는) 작가욕심은 떨치지 못한다.
18세기 말 마장마술에 막간 공연을 끼우다가 온갖 진기명기 볼거리, 구경거리로 늘어나던 서커스가 20세기 들어 레일과 기계장치와 자동인형으로 범위를 넓혀가며 전성기를 맞고, 어느 술집 한켠에서 발전한 뮤직홀이 삿된 영혼들을 망치고, 벨에포크 시대 이후 카페-카바레가 온갖 버라이어티극장으로 흥행을 하고, 오페라와 발레가 자리를 잡고, 정통고전극 뒤편으로 저급코미디극장들이 취객의 웃음보를 이끌던 이 시대, 온갖 발명의 환등기들이 미혹을 하고, 연쇄사진들들이, 그림자공연이 영화로 발전해가던 때, 이 모든 유흥거리들을 아낌없이 구경시켜주시는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 자란 덕에 이 모든 곳들과 공연과 장면들을 야심차게 글로 써내려간다.
들뢰즈에 따르면 분열형망상 과정에 문학적인 과정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그 유사성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이런 파라프레닉스키조 작가는 이를 유지하고 원래 명제와 전향의 의미 차이에 메울 수 없는 균열이 가해지지만(볼프슨의 말), 루셀은 그렇더라도 상징적인 의미는 견지한다고 한다.
Out of Text
그렇게 만들어낸 기상천외/진기명기 쇼단의 갈라 전반부 '지문설명' 후반부 마라톤 공연 '줄거리 요약'과 '제작과정 설명문'이다. 앞에 수수께끼를 내고 뒤에 상상력내기 정답풀이 과정이다. 수학풀이집처럼 무미건조-복잡하다.
사후에 푸코를 비롯해 초현실주의(정작 루셀 초현실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자, '조금 모호/이해불가라고 말을 흐린다),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고무적인 각광을 받았다가 그것도 60년전, 지금은 다시 원래자리 가까이 돌아가, 두물은 가버렸다, 작가 동시대에서 쇤베르크 등 현대음악은 그와 비슷하게 토마토 세례와 야유를 받고 표현주의 그림들과 그 작품들이 좁은 입지를 다져 나가고 있었다, 사실 서술적 이미지로 전달하는 책 내의 오감, 표현하는 악기는 상궤를 벗어난다고 해도 고전적인 음악이론, 특히나 바로크의 음색을 유지하고, 앙드레 지드의 상징주의와 더불어 피어나던, 감정의 표출과 자아를 전면에 참신하고 대단한 방식으로 내세우는 표현주의와 달리 고전 명작의 아방가르드적인 잔인한 변형에 숨은 쾌락을 찾을까 표면적인 묘사 외 주관적 개입은 없다. (즉물시?) 아마 화려한 색감을 즐길 뿐 그 도료를 빚는 일은 관심 밖이었나 보다.
아니면 경멸했든가, 두려워했든가 남의 속 모를 일이 모르겠고,
남들 다하는 일 관심 없다, 유다른 강박들을 특권처럼 휘둘러대어도
'남들이 뒤에서 욕할까 모임에 나올 화제들을 철저하게 사전 연습하며' 가면 속에 철저히 몸을 숨긴 이 인물.
'배덕자' 딸쌍둥이, '좁은문'의 조숙한 두사촌 에피소드 주인공이자, 그 당시 인기많았던 최면치료의 대상자이자, 숨은 나래이더 에피소드의 온갖 굳은 일은 도맡아 '작품개요서 초벌'을 이어붙이는 Seil-Kor, 모든 공연의 대상 관객이자 모든 것을 관장하는 주관자, 모든 것에 능통한 참여자 드랙-킹 속에 본심을 슬금 숨겨 놓고 실패한 예술가는 작은 구경거리로 내몬다.
그랬거나말거나 당시에 '경천동지'하리라, 기대한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른 부르주아가 누리고 자랑하는 특혜가 가장 못마땅한 부르주아' 야심차게 두벌 작업한 작품을 무대로 작품을 올려 쓰레기 우레를 벌어들이고, 게다가 시로 개작까지 해서 출판을 한다. 비슷하지만 다르리라 짐작하는 다른 작품도 실패와 실패와 실패 사이의 삽질에, 오기좋게 희망의 묵직한 닻돌을 놓지 않고, "자비" 출판 전시와 공연의 악순환 자선을 계속 베푸는데--
이 사라방드와 푸가와 지그와 파반이 엇모리 장단으로 "여기"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선명한 (발생기) 초현실주의의 심상들이
빠지고, 변경되고, 치환되고, 착각과 오해까지 따라 붙으니 어떤 때는 안경벗은 제임스처럼 흐릿하고, 어떤 때 양눈에 안대를 다 한 조이스처럼 까막눈이 된다.
작가는 다중적 의미의 언어로 언어적 유희를 꾀하자고 했지 의미의 전복을 의도하지 않았을 터인데 장날 야바위판에 받은 롯데 이브껌과 해태 아카시아 껌을 단물을 빠질 때까지 먹고 갈기갈기 찢어진 껍데기에와 뭉치고 섞어 내다버린 것처럼
문장이 풍덩풍덩 자리를 바꿔 의미가 실성을 해버린다.
책의 전반에 리듬은 애초에 없긴 해도, 단문은 고전적 장단을 답습하려 애썼는데, 그만 여기서는 그 문장의 가락은 휘모리로 쉼표없이 어지럽게, 도통 종잡을 수 없는 12음계 막다른 골목이 턱-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
텍스트 밖, 조금 괴롭히려면 미주로 학자연하게, 많이 괴롭히려면 각주로 달아주는 주석이 이 책은 세로로 누워있는데,
이 공간은 독자의 공간이다. 덧붙여 해석하거나 인상을 남기거나 감탄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넣거나 저녁약속 시간을 적더라도 독자에게 암묵적으로 배분하던 공간이건만 고약한 선례가 될까 심히 저어된다.
그러니, 이런 정신머리 상그러운 글은 저짝으로- 던져두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