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샤두 지 아시스의 소설 연달아 읽다가 잠깐 브라질에서 건너 안데스에 죽음 사이로 두런거리는 리투마를 띄엄띄엄 읽다가, 녹색장원이 그 녹색장원인 줄 알고 아르헨티나로 건너 팜파스 위 Far away long ago(WH 허드슨) 또 다른 어린시절 자서전적 이야기를 읽어 가다가- 재미 있기는 한데 자서전은 고만 읽자 싶어 건너 브라질로 건너 왔더니 얻어 걸린게 


자저전 소설을 주로 쓰기로 유명한 작가-

Selected Cronicas de [Clarice Lispector, Giovanni Pontiero] 'selected chronicles' CLARICE LISPECTOR 

연대기 선택취합' 말 그대로 자전적 이야기들을 짧게는 세 줄 

길게는 대여섯 장의 에피소드들로 이어지는 어려운 작가의 '어렵지 않은' 책이다. 표지가 예뻐서 이걸로 올려놓아 본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우크라이나 출생 브라질 이민 유태인에다, 그쪽에서 최고 지성들이 다니는 중고등-대학교 그것도 법학대학을 졸업했으며, 포르투갈어권에서는 꽤나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데다 이전에 본 적 없는 글쓰기를 일찌감치 선보였다니 '나탈리 사로트'의 데자부다. 나이 지는 자매쯤으로 여기면 되려나. 

단편작가로 이름이 났지만, 정작 크게 평가를 받는 것은 중-단편들이고 뭐니뭐니 백미는 















(바퀴벌레 보고 놀라 식겁한) G.H에게는 수난이라고 다들 그런다. 그 외 유명한 장편이 대충 아래 두 개 




(보통 읽지 않은 책은 올리지는 않지만 

표지가 예뻐서 올려놓아 본다) 


작가가 무슨 고전영화배우 마냥 아리땁다-










이게 다 자전적인 소설이란다. 


그리고 수난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이 "A hora de estrela/스타의 시간'이고 

국내 번역명이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이다. 




이 스타는 저 하늘에서 뭇사람의 운명을 점지해주는 그 별이 아니다. 올려다보지 않고 영화관에서 화보에서 마주보는 그 스타이고, 작중의 인물, 너도 아닌 '그녀' 마카베아, 타이피스트에게 아무 운명도 점지해주지 않는 것처럼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아무 연관이 없다.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라는 이런 생경한 작명 센스는 

 

1 자전적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이력을 위해서인지 

2 책에 전면으로 드러나 작중 인물을 '쥐고 흔드는' 또 다른 작중인물 나, 리카르두의 '소설쓰기'를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3 작가가 작가의 틀을 벗어나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사회 변두리' 자각도 없고 타자의 인식도 없고 굶주림을 간신히 벗어난 상황이라 불행이 행복인지 아닌지 지각이 딱 언저리에 얹혀있는 (정말 이름말고는 없는) 주인공을 존중하겠다는 의도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굳이 찾자면 자전적인 요소들이 많지만 분류하자면 자전적 소설이 아니다, 소설 쓰기의 거울상, 그것도 그 공허한 허상을 바라보는 책이다. 이 책은 절판이다. 


중편이라 책은 짧고, 아포리즘, 금언처럼 열어가는 처음은 야트막하게 깔아놓고 때놓친 가을보리 처럼 성겨 "다른 작품에 비해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유쾌하지는 않더라도 코믹하다. 





이 비슷하게 멋지구리 여성작가의 옆(으로 누운)모습의 표지는 

좌 "국내판-달걀과 닭'단편"선집'

우 700페이지가 훌쩍 넘은 단편 전집 "complete stories"이다. 

 


표지를 베꼈나 했더니, 포르투갈어, 독일어까지 "전집"이 우와 표지가 동일하다.  

다만 다른 점이 선집이란 건데, (성공하면) 이어서 내겠다는 

출판사의 의도라고 해석하고 싶다. 





왜냐면 동일 출판사에서  출판사마다 중구난방 내용이 줄었다 늘었다 애초부터 불완전한 책,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을 엄청 길게 낸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작가 페소아를 존경했다고도 하고 페소아와도 조금 비슷하다) 문제는- 


생일에 절판으로 정가의 2배가 넘는 귀한 책과 더불어 70 에우로 아MZ 자유이용권을 (한꺼번에 지르지 말고 아껴아껴 쓰라는 당부와 함께) 받았는데, 저 집이 9에우로 밖에 하지 않는다는 -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제껏 읽은 작품이 보리밥처럼 껄끄럽고, 깍지콩처럼 풋내가 감돌아 다음 책으로 선뜻 어째 나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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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lie Sarraute 어린시절 
















나탈리 사로트, 러시아 출신 프랑스 작가, 1900년대 생, 앞의 두 자전적 소설의 작가보다 두서너 살 많은 누님이다. 

그 두 작가가 중년에 자전적 소설을 내던 1938-9년에 늦깎이 첫 소설 'Tropismes'로 화려하게 데뷔하지만 이후 안티-로망 세대의 대표주자로 선명한 한 획을 긋는다. 

(소르본에서 문학과 법학, 옥스포드에서 역사학, 독일에서 사회학 공부를 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가정도 꾸리고

저들 두 사람에게 전혀 뒤지지 않게 '다른 일'로 바쁜 사람이다) 


이 책 역시, 소설의 표피를 쓴 자서전, 자서전의 외피를 뒤튼 소설이지만 당연히 안티로망의 작가답게 전형적인 자서전도, 소설도 아니라서, 그 경계가 아주 애매하다. 

작가는 이 책을 내기 불과 몇년 전 자신은 자서전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을 하였다가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 책을 쓴다. 그래서인지 첫 장면이 '정말 할 것이냐', 쓰지 않겠다던 다짐에 대한 '정말 안 할 것이냐' 스스로의 도전처럼 시작한다. 

가위 들고 (아마 때를 쓰던 아이에게) 정말 이 일을 할 수 있느냐?' 어린시절 어머니의 다그침과 얼림질, 으름장에 불끈 솟구치던 반발심처럼, 그때 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 할 수 있을지 의문처럼, 그때 정말로 했는지 의문처럼 더듬어 나간다. 


내용은 단편/파편적이다. 시간적 흐름을 대충 따라가지만, 구구절절한 설명은 없다. 구성은 두 명의 '나'가 서로 주거니받거니 선명한 기억들만 고운 체로 거르고 있다. 낡은 사진 한 장 덜컥 나오지만 그 사진이 이어져 이야기가 되는 것은 

순전히 '나'라는 자서전으로 소설이 된 남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다. 책 속에서는 마주 앉은 자신과 서로 보듬고, 다독이고, 세월의 단상들을 되짚으며 질문과 대답, 질책과 의문을 주고 받는다. 


읽어가다 보면 여섯 살 소녀의 시선으로 상류계급 이혼한 두 부부 사이에서 핑퐁처럼 오가는 삶을 '지리멸렬'하게 

되풀이 상세하게 그렸던 헨리 제임스의 'what Maisie knew/메이지가 본 세상'의 기본골격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쉽게 쓰여' 가장 접근이 쉬운 작품인 탓도 있겠지만, 

똑부러진 이 어린 소녀의 세상(가정의 담장 안이지만)을 염탐하는 일이 더 와닿는다. 

헨리 제임스와는 달리 작가가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아내였으니 과거 애증의 갈등에 역지사지, 현실 반추도 들지 않았을까 넘겨짚어 본다.  




계속 소설의 외연을 넓히려는, 벗어나려는 작품들을 읽다 보니 소설이 원래 실수가 아닌 허수의 체계, 픽션이라는 외부를 둘러 nonfiction의 내면을 도리어 정의하는 셈인지라, 안티-로망이라는 말, 누보-로망이라는 말을 보면서, 

저널리즘에 가까운 소설, 사실주의를 표방한 소설이 추상과 인상, 표현, 초현실주의 등 른 문화적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수에서 실수로 돌아오는 셈이니, 가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역행인지라 이게 더 반시대적 조류 같아 보이고, 

안티로망 등등은 마치 외연을 넓히려는 몸부림, 방향을 틀려는 키질인 것만 같다. 

특히 이들 사유적, 고백적인 어조들의 책들, 근자에 읽었던 책들만 한데 묶어 보자면 

이전의 작품들을 반대방향 모색이 아니라 그 자리를 뛰어넘으려고 멀리뛰기를 하다 도움닫기에서 스텝이 꼬인 것 같다는 

느낌도 들기도 하지만, 그거야 정신 헐거운 내 인상이고, 성큼성큼 내딛고 휘엉청 뛰어오른 모습이 마냥 감탄스럽긴 하다.  


어쨌든 이들 세 작가가 공통적으로 흠모하고, 모범을 삼던 작가가 있었으니, 

그 작가, 홍차에 마들렌을 푹 담가 먹었던 덕분에 '자전적 소설'이 부흥을 맞기는 했지만- 



다만, '어린 시절'에 작가가 흠모하던 작가들의 어투를 흉내내 묘사하는 장면들이 몇몇 있는데 

르네 보일레스브(Boylesve)라는 19세기 작가가 언급이 되어 찾아보니 

브리태니커 왈, 이 작가가 프루스트의 전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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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7-1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망을 안티하다보니, ‘읽는 재미‘라는 요소는 확실하게 증발되더군요.

서산_影 2020-07-11 18:33   좋아요 0 | URL
팔팔 끓인 탕약이라 쓰기도 많이 쓰죠. 그래도 이 책은 (이빠진 호랑이 마냥 힘을 많이 빠져서인지) 나름 재미 있었습니다.
 

존 호크스의 소설 '모작travesty'이란 중편에 미셀 레리스 '성년'의 일부를 글머리에 올려 놓았다.  


나는 뮤즈란, 필연적으로 죽은 여자이거나, 접근 불가능하거나 부재해야 한다는 관념에 푹 빠져 있다. 시적 구조는-대포가 그저 강철로 둘러싸인 구멍인 것처럼-지니고 있지 않는 것들로만 토대를 삼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허공을 채우기 위해서만 혹은 아무리 못해도 우리 자신의 가장 명료한 부분과 관련지어, 이런 비교가 안 되는 심연이 우리 속에서 하품을 하는 그 장소의 위치를 배정하기 위해서만 궁극적으로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귀에 혹해서 초현실주의 계열의 작가 미셀 레리스 뒤적거려보니 38년작이 68년 영역되어 꽤나 뒤늦은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고, 이게 다시  2016년 국내 출판이 되었으나  
















실물 책은 접할 수가 없어 작가의 또 다른 '자서전적 소설' 1부, Rules of game, scratches를 읽는다. 

간단한 약력을 보자면 박물관 소속 민족학 관련 문예사, 초현실 예술 관련 잡지 편집과 비평을 부업 삼은 인물이다. 

rules of game 총 4부작으로 이뤄진 책인데, 사실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사과벌레 같은 작가가 40-70년 사이에 쓴 

자전적인 글 모음이다. 그래도 상상이든, 기억이든, '나'를 매개로 가로세로 엮고 묶은 글이라 나름 연결은 다 된다.

그 번역도 장기작전인지 97년부터 시작된 게 2017년에 3부작 fibril까지 나왔고 마지막은 자서전이란 게 살아생전 완성못하듯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를 일이지난 '게임의 규칙/ 긁힌 소리. 긁힌 자국, 휘갈겨쓰기, 요행수'가 오롯이 한 권 노릇을 하니 두 번 읽어도 된다.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되어 종전 아닌 종전을 맞은 40년부터 종전 후 47년까지 글이고, 글은 파리 해방이후, 이전으로 크게 두부분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지만,작가적인 감성, 이건 작법과 그 해제라는 내용의 전환으로 대변되는 변화이지 역사적인 기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자전적 소설답지 않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연대기 순도 그렇다고 프루스트처럼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잘못 인식된 단어, 잘못 발음한 단어, 혹은 최초 인식 과정, 말을 글로 다시 배우며 깨달아 가는 알파벳에 따른 인상을 음성학적인 유사성과 연관에 따라 꼬리를 무는 개인의 역사를 그 음성학의 매개체나 사물들 까지 동원하여 그 순간을 적어내려 간다. 그렇다고 이를 깊이 파고들어가 정신병리학적, 심리학적인 분석에 활용하지도 않고 그저 연상작용 놀이의 일환인지라 괜히 심각한 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작가의 말을 빌면 엉금엉금 기어간 젖먹이가 베란다에 난간을 붙들고 서서 바깥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붙든 난간을 입에 오물오물 넣고 맛을 보는 것과 같다. 

글을 적는 이유가, 언어의 사변적 활용이 아니라 그 언어 자체의 맛을 느끼지 위한 것이니, 음식을 만든 과정도, 그 소화되거나 되지 못하는 과정도 아니라 입안에서 (잘못, 잘) 오물거리며 씹고 뱉고, 씹고 뱉는지라, (작가는 신나서 나가지만) 좋은 말도 한두 번, 연결이 끝도 없는데다, 한문장 한문단의 긴 글, 겹겹 중첩된 사유와 반복으로 무척이나 읽어내려가는 글이 지치고, '더럽게' 지루해 곯아떨어지기 일수인-그런데도 차마 손을 떼지 못하고 긴 시간을 들이며 용케도 읽어 내려간다.


작가의 동시대 영국에, 작가보다 2살 어린 '시릴 코널리Cyril Connolly"라는 작가/비평가/잡지편집자가 작가가 대표작 '성년'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내던 바로 그해, 2차대전이 발발하던 때 나라는 자서전을 미끼로 또 다른 방향성의 책을 내었다. 

왜냐면 이 책은 일견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세 부분, 크게 두 부분인데 비평전문가다운 50년 사이의 문학경향과 (제목처럼)"될성부른 작가"의 걸림돌, 자서전적 소설이라는 소설을 그 한 돌파구로 결론을 짓고, 자신의 학창 시절 매맞고, 조리돌림당하며 (그 시대 다 그랬듯이) 커가는 험한 남학교 시절을 고전 중심의 문학 교육과 그 내용 비평으로, 당시 내로라하는 동기동창 인물들과 맞물려 써놓았기 때문이다. 



시작은 전쟁으로 발이 묶인 시대 제멋대로 자란 자신의 정원을 앞에 두고 

내일이면 모두 잊힐 그 많은 책들이 적어도 10년은 가려면 어떠해야 하나 사유로 시작을 하고 

먼저 현대의 문학 사조를 크게 과거의 '댄디즘'과 지금 조류 '저널리즘'경향으로 나누고서 

그 잘잘못으로 저널리스트답게 단도직입적으로 재어들어간다. 

간단, 명료, 당연 아쉬운 점은 없지는 않으나 읽어가는 재미는 톡톡. 

성년을 낸 뒤 또 자전적인 이야기(하지만 완전히 다른 틀)로 들고 나온 레리스의 변명과 똑같이 

생업이 발목을 잡는 비전문 작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자서전적 소설을 쓰는 일'이라는 생각하에 쓴 뒷부분은 

하지만, 문제로 짚었던 부분에 오답 표기가 원래 의도였는지 사실 자서전 부분은 

이미 애증으로 밥벌어 먹고 살던 저널리즘에 인이 박힌 탓인지 

'아름답지'가 않고 고루하다. 





그래도 이 책은 나름 명쾌한 비평과 날카로운 인식으로 내일이면 잊힐 저널리즘의 운명은 벗어나 세간에 살아남아 읽힌다. 

이 작가의 지론이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을 빌어) '신문,저널은 한번 읽고 버리는 글, 문학은 두번 읽는 글(혹자는 두고두고 읽는 글)'이다. 생


다시, 미셀 레리스, '일요일'이란 하부 표제 이후로는 전쟁의 그늘 아래 그저 어린시절 '말'장난으로 침착하다가 파리 해방을 맞아 나열 위주의 글에서 이런 글을 쓰게 된 자신에 대해  제법 과거와 현재의 선명한 이야기들을 오가며 설명을 해나간다. 이 에세이격의 이야기가 사실, 이후 애먼 비평에 볼멘소리를 해대는 자조이긴 하지만. 자신이 실패라고 끝내 자인하는 시도보다 더 와닿는다. 시릴 코널리와 똑같이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 하나로 죽음, 혹은 망각에 전전긍긍하는 우울이라는 작가, 그래도 끝끝내 손을 놓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어에 대한 사랑, 그 '시적인 표현/언어'가 작중에 달짝하게 스며있다.


둘 다 어떻게 조금 되다만 작품/ 이상한 틀의 자서전적 소설인지라, '될성 부른 나무의 적들'은 스윽 한번은 읽어봄직하고, '놀이의 규칙들'은 한번 반쯤 곱씹어 읽어봄직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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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딴 거 말고 

방망이와 공 두개를 넣어주오. 

내 묘비에는 딴 말 말고 

스트라이크 아웃(struck out)되었다 적어주오. 

              -유니버설 야구연맹, 샌디 선수의 자작곡 중에서


미국은 장고한 역사라고 자랑할 게 별로 없지만, 그 역사가 긴 문학 이벤트 하나가 "best american short story올해 최고의 단편"가 있다.백년은 훌쩍 넘었고, 이 일만 전담하느라 편집자는 눈이 빠지도록, 어느 누구보다 많이 수천편 읽고 수백여 편 추려내면 

여기서 특이하게 한해 명예 편집장처럼 소설가 한 명 선정되는데 이 사람 전권을 발휘 최종 몇 편을 고른다. 

고르고 끝이다. 일이삼등 주는 치사한 짓은 않는데, 돈을 주고 받는지, 상패도 주며 시상식하는지, 자축하고 넘기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지 알 수는 없지만. 

뽑힌 사람들은 책 한 권 못 내어보고 십년 세월에 잊히기 십상이지만 몇년도 해당 무소불위 심사위원에 촉구되면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지 않을까.(다들 이미 명예의 전당에 오른 스타 작가라도) 


1986년 죽기 이태 전의 레이먼드 카버가 선정작을 뽑았다. 당연히 그의 작품처럼 치고 들어오는 단타, 간결한 문장, '옆눈으로만 

흘긴 현실의 단면/단편/단원'그리는 작품이 주로다. 이미 필명이 난 작품들도 배분 차원에서 몇 편 끼워넣었는데, 

카버의 분위기 좋아하고, 유명 작가들도 겸사겸사 만나고 아예 방향 전환을 한 작가들의 초기작을 만나고 싶으면 일독을-. 

딱 하나 싹 다른 분위기 돈 드릴로의 작품이지만. (그래서 편집진에서 우기지 않았을까 넘겨 짚어 보기도 했다) 

어쨌든 비슷한 분위기를 이어가는데, 어째 소재들이 '청소년기 경험'우세하고 '사냥'에 치우치더니, 급기야 청소년이 사냥에 나가는 '스포츠 라이터'의 작가, 리처드 포드의 단편에 불현듯 나는 사냥 이야기를 싫어하는구나' 깨달았다. 

뒤이어 안드레 드뷔스의 단편집을 읽다가 유난히 '야구'이야기가 많이 나오기에 못 알아먹을 이 '전문용어'에 나는 야구 이야기도 싫어하는구나 절감했다. 


그렇게 싫은 이야기들 솎아내어 보니, 

'사냥'(낚시는 이상하게 괜찮다), '군대'(군대가 벌이는 전쟁, 주둔지 이야기도 동일), 야구(및 스포츠)도 싫어하고 

정치, 성공담, 대놓고 연애 이야기, 소재로만 접근하는 사회문제 이야기도 싫다. 특히나 병원에서 피흘리는 이야기 질색이다. 

즉, 군비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쥐잡듯이 잡아대던 재선 국회의원들이 뒤풀이 회식에서 군대에서 야구하던 이야기 하다가

아니꼬웠던 한 의원이 '니 어느 부대 출신이고' 삿대질로 물었다가, 뜨금한 상대가 주먹질로 화답, 병원으로 실려가는 이야기?

이렇게 입맛 안 맞는 이야기들 다 빼면 읽을 거리가 동화책 말고는 몇 권 남지도 않지만 계속 읽어가는 이유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야구'처럼 역시나 실망할 줄 알면서도 혹시나 맥주캔 옆에 끼고(?) 구장을 향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1. 로버트 쿠버, 유니버설 야구연맹 법인, 부제 소유주 J. 헨리 워는 야구로 가득한 이야기다. 


유니버셜 야구연맹 56회차 연맹전에 갓 스물의 '루키' 데이먼 러더퍼드가 퍼펙트 게임에 여섯 이닝 남겨놓고 있는데서 

시작을 하고, 이를 관전하는 헨리는 똥줄이 탄다. 연맹 역사에 한번도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들고 나고, 치고 달리고, 고전을 하며 아슬아슬하게 이 젊은 선수 '퍼펙트 게임'을 이뤄내고, 관중들이 몰려내려와 어깨에 걸머 매고 축하를 하는데

이 현란한 게임은 사실-


  

(스포일러----------) 

먼지 가득한 야구장이 아니라, 50대 후반 회계사, 헨리 워의 부엌 식탁위에서 벌어지는 야구 게임이다.

 실제 게임도 지루하고, 카드게임들, 핀볼도 너무 단순해 마음에 차지 않던 이 중년 독신, 

주사위 세 개를 굴러, 수많은 확률들을 일일이 통계에 철저를 기하며 배분을 하고, 선수별 경우의 수에 따라 또 세분, 

여덟팀, 스물한 명 이름까지 붙여가며, 그들의 퇴진과 이군 방출, 향후 진로까지 신경쓰고 그 코치와 구단주, 노조와 언론, 협회장,  내용까지 살을 입히며 보고서를 쓰고 기록하였다. 땀과 지력으로, 시간낭비와 체력 소모, 사직 위험까지 무릅쓰고 

일상의 대부분을 야구장 위에서 살고 있다. 남다르게 애착이 가는, 애지중지하는 신입 루키 투수 녀석, 

연맹의 규칙을 살짝 어겨 얼마 쉬지 못하고 투수로 투입, 기특하게도 세계 기록을 향해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는 게 아닌가. 

하지만 세계 기록까지 딱 2이닝 남겨 두고 타석에 섰다가, 확률이 똑같지만 더 의미를 두는 연속 숫자 111,세번, 그 1/216의 3승의 확률을 맞아, '아주 드문 경우/벼락 맞을 확률'의 차트에 따라,

 '투수의 빈볼에 맞아 머리가 쪼개져'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여기까지 책 1/3)



2 이 책 리뷰글 중에 야구는 비극이라고, 미국의 질병이라고 하더라만. 














기다림과 실망과 좌절, 패배와 울분으로 점철한 비극이라고. 


돈 드릴로의 (좌익 외야) 벽 앞에 선 파프코는 부제가 '언더월드의 프롤로그'라고 붙은 90페이지 중편이다. 이게 먼저 나왔고 

조금 갈무리해서 칠백여 페이지 언더월드에 들어갔다고 한다. 

1951년 뉴욕 자이언츠와 브루클린 다져스 사이 최종전 실제 있었던 시합과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와 버무렸다. 

크게 흑인 소년 코터, 몰래 틈입하려던 무리에 운좋게 숨어들어 사람들이 로프코가 올 때마다 닿아보겠다고 종이쪽을 흩어대는 외야 3루수 관중석에 있고, 박스 석에 프랭크 시나트라와 3인방이 에드거 후버와 관람을 하고, 목이 쉰 아나운서 러스는 

중계석에서 중계를 하고 있다. 이 주요 인물들 외에 '파편'으로 부서지는 여러 인물들이 한문장, 한 구절로 섞여 들고 

자이언츠의 톰슨이 1:4로 뒤지던 9회말 상황에 막판 뒤집기 홈런을 치고, 사람들은 야구장 내외로 온통 광란의 환희에 

휩싸이고 이순간 에드거 관중석에서 집어던지는 온갖 쓰레기 중 하나에서 잡지 두 쪽 그림 브뤼겔의 '죽음의 승리'를 집어들고 그 공 쫓아간 망연자실 파프코 벽을 넘긴 공을 쳐다보고 있다. 코터는 운동장 내 난리와 또 다르게 떨어진 공 잡으려는 그 짧은 싸움에 휘말리는데-


3 필립 로스도 야구광으로 유명해. 그래서 '위대한 미국 소설'을 썼다고 한다. 




43년 2차 대전 신병 훈련장소로 구장을 내준 

야구단이 전국을 떠돌며 순회 시합을 벌이는 내용이라고 하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책. 










드릴로의 '언더월드'는 마오 II에 준하여 중요한 작품인데다, 호평을 받은 책이라 번갈아 출판해대는 

작금의 경쟁적인 분위기에 십중팔구 번역되어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68년 어언 50년 먹은 쿠버의 작품은 글쎄, '파프코'에 버금가지 않을까 싶은데, 개인적으로 

중견작가 드릴로에 꿀리지 않는 작품들이 많은데, 그 많은 장편들은 다 제쳐두고 겨우 출판된 게 몇 편 안되는 단편선,

역시나 이번에도 '메타픽션/이게 동화라는 걸 너도알고나도안다' 재해석/해석거부 동화류 단편 (요술부지깽이, 민음사)이 전부이고, 아마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중 화형식, public burning(로젠버그 이야기와 닉슨 이야기가 섞인 정치가 한몫을 하는 작품)은 아마 두어 발짝 뒤쳐진 '작가'라서 나올리는 없지 않을까 넘겨짚어 본다. 


SF라고 보기에 무겁고, 블랙 코메디라기에는 가벼운 책, 

야구 이야기로 가득 넘쳐나는 책, 따라가지도 못할 이름과 용어들로 범벅인 책 그래도 끝까지 읽은 이유, 

하지 않은 이야기, 뺀 이야기, 숨은 이야기가 다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밀린 공부가 산더미라 동계 휴식에 들어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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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실물'책을 샀습니다. 5센트 모자라는 16에우로, 2만원이 훌쩍 넘는 돈입니다. 실물 책은 대학교앞 3유로 떨이판매 전집류, 저렴공격형 문고판 선집류, 뒷골목 반값 중고책으로 사고, 퀴퀴한 도서관 책을 애용하는 버릇해서 간만에 돈좀 썼습니다-만 

책은 한세기가 되었고, 살아생전 저자와 서신 교환으로 번역해낸 번역은 반세기 전 번역판이고, 

인쇄판은 30년전 판형 그대로 "새책"입니다. 아마 식자들은 다들 원서로 이미 읽었고, 모르는 사람은 그대로 모르고 잊힌 책이라 이북은 커녕 해적판도 구할 수 없는 책이니 달리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물가 싼 스페인 책값은 유난히 비싸요) 

노안을 찡그리고 팔은 저만치 멀리 두고 간만에 줄 그어가며 읽었습니다. 이건 다, 아프리카 인상과 별 다르지 않게 건-욕을 그대로 들어먹고 있던 로쿠스 솔루스의 동-출판사 그 연작들을 뒤적거려보고, 

소설 '파리의 농부'초입부 들춰보다가 궁금증이 동한 탓입니다. 




소설이랍니다. 읽어보고 아무리 봐도 간장인데, 맛도 간장인데 된장이라고 우기니, 

즉 이야기도 없고 주인공도 없이 '나'의 이름도 '루이'인데 소설이라고 우기니, 

된장인가 보다 받아들이고 읽었습니다. 아니 보았습니다. 








작가는 소설을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주기'를 원했고, 다른 이미지로 보기를 바랐기에 또 그렇게 받아들이고, 

폭넓은 문화적(통합되기를 원했던, 그래서 구별까지 거부한 광범위 예술) 실험에서 탁월히 성공했다고 

자부할 만한 이런 계열의 소설작은, 시집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기에 그래서 접한 적도 그리 많지 않기에,

19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여러 시대 반항적 혹은 저항적 혹은 전복적 성향의 예술가 (시각적 차원, 좁은 의미의 예술가)들의 비평문을 모은 책, '보는 일에 관해'를 길잡아 삼아, 서로 비춰가며 봤습니다. 이 책은 50년전에 이전 반세기 전을 중심으로 되짚어 보는데, 작가는 노년에 알프스 산자락에 농사 지으며 살던 특이한 경력의 다작 산문작가, 비평가라 이런 특이한 우연도 

이런 선택에 한몫을 했습니다. 



루이 아라공에 비하면 아주 숩게 물리적/정신적으로 

접근 가능합니다. 











이 책은 고대 동물에서 근대 가축, 현대 동물원이라는 신화적 존재에서 '반려동물' 신세의 동물의 시선과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반추하는 일로 시작해서 역사적-사회주의적 관점을 기반으로 크게 '사진가'들과 '사진산문'에 대한 비평, 2부는 아마추어와 프로들의 세계와 작품들을 대비하고 '미술가'와 '조각가'들을 특정 시원의 관점에서 해부해 나가다가, '들판'으로 끝을 맺습니다. 

파리의 농부도 이와 구조가 흡사합니다. 책은 24년과 25년 연재발표한 소설(에세이 아닙니다)과 '농부의 꿈'이라는 짤막한 글로 맺습니다. 


(나름 소설이니까 스포일러! 주의보 발령) 

근대의 신화의 세계, 보이지 않는, 보지 않았던 곳으로 가겠다는 야심찬 포부의 서문을 열면 

대로 확장 공사로 사라질 위기 '파사주 데오페라' 아케이드 주변을 카메라 같은 수법으로 들여다 보는 첫부분, 

친구 둘과 '뷔테 샤몽 공원'에 야간 산책을 하며 가로등 컴컴한 어둠을 뒤로 하고 흩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그림처럼 그려나가는 두번째 부분 '뷔테 샤몽에서 느끼는 자연의 감정'으로 되어있습니다

산책자의 발끝에 따라 좌우로 뒤로 위로 뒷골목으로 드나들며, 보상문제 관련 이슈와 신문사설, 플래카드처럼 '푼돈받고 나가라니 권리금도 못 뽑고 나간다, 폐업 떨이 판매, 혹은 상점인수 광고'를 보여주고, 낡은 각종 상점들, 은밀한 숙박시설, 지인들이 모이는 카페, 남사스러운 목욕탕, 의심스러운 삼류 극장  마사지시설들 관능적으로 그 시대의 관광책자처럼 하나하나 상세하게 나열을 하며 아주 개인적인 감성으로, 현실과 초현실, 속되지 않은 욕망, 의식과 무의식, 비유와 직설들로 상당히 '고전적인' 서체로 그려나갑니다. 흑백 사진에 다다 운동 그리고 초현실의 선명한 색깔을 덧입히며 눈 뜨기 어려운 한낮의 공간이 이어집니다. 

두번째는 그림 속 재현된 혹은 선택된 자연처럼, 도시의 공간에 이탈을 꿈꾸며 세워진 인공적인 공원을 산책합니다 자연에 대해 곱씹는다고 해놓고 계속 지엽으로 흐르고, 다늦은 저녁 심심하던 차 만난 두 친구들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도 아니요, 전체 조망과 인공적인 기념탑과 자살다리, 벨베데레 연못 등은 장의 전환점이지 밤의 공간을 그리 암흑 혹은 심연처럼 시꺼멓게 정면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얼큰히 몇 잔 한 탓인지, 세상에 새로운 신화(여기서는 근대 물질주의로 해석하면 부정적 의미, 판타지, 초현실 혹은 근대의 추상, 철학으로 하면 인식적인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를 찾아서 혹은 반항으로 현존하지 않는 격렬한 사랑과 다름 없는 열정으로 싸워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겠노라 열변을 토해댑니다. 

그러다 또 흥겨운 (술?)기운이 빠지고, 괜히 세상 서운하고, 미워지면 이런 정신없는 책 읽고 투덜댄다고 독자들을 조롱했다가, 이런 책 출판한 출판사 읽지도 않고 출판한다 욕을 싸잡아 해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알 수 없는 추상적/형이상학적 목표에 변증법적인 논리로 매달리는 일, 한계이자 해결책인 방법론을 차분하게 사변적으로 다짐을 하다가, 자가분열한 자신과 열띤 난장판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20세기 초반 백가쟁명 운동들이'보기 드물게 유난히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던 급진적인 시대였다지요. 

큐비즘, 신조형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야수파 짜들이 추상의 물결등이 가지에 가지를 치고, 다모르겠고난내길간다 '나홀로'파까지 예술계에 혁신을, 미학적인 파괴를 반동을, 전복의 기치를 내걸고 으르렁거립니다. 결국 다들 "관찰자가 더욱 날카롭게 작품에 집중하고 말을 거는 기회"를 바라는 일차적인 바람들이었겠지만. 확장와 접근이 외려, 배척과 소외를 가져오길 바라기도 했겠지만, 대부분 그 자잘한 분파들의 분파들, 헛소동만 일으키다 말끔하게 삭제되기도 합니다.


아라공 '이미지는 지식으로 가는 경도'라는 생각에 소설화한 이 사변들은, 그의 구체적 실험의 하나이지 실험이 

목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어쨌든 목적없는 미지/어둠을 향해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자신을 타박한다 해도 따르겠다는 스물다섯(이게 소설) 젊은이의 다짐이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문장이 "시적"으로 옆걸음질을 자주 치는 데- 쳇, 고대 석상처럼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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