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호크스의 소설 '모작travesty'이란 중편에 미셀 레리스 '성년'의 일부를 글머리에 올려 놓았다.  


나는 뮤즈란, 필연적으로 죽은 여자이거나, 접근 불가능하거나 부재해야 한다는 관념에 푹 빠져 있다. 시적 구조는-대포가 그저 강철로 둘러싸인 구멍인 것처럼-지니고 있지 않는 것들로만 토대를 삼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허공을 채우기 위해서만 혹은 아무리 못해도 우리 자신의 가장 명료한 부분과 관련지어, 이런 비교가 안 되는 심연이 우리 속에서 하품을 하는 그 장소의 위치를 배정하기 위해서만 궁극적으로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귀에 혹해서 초현실주의 계열의 작가 미셀 레리스 뒤적거려보니 38년작이 68년 영역되어 꽤나 뒤늦은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고, 이게 다시  2016년 국내 출판이 되었으나  
















실물 책은 접할 수가 없어 작가의 또 다른 '자서전적 소설' 1부, Rules of game, scratches를 읽는다. 

간단한 약력을 보자면 박물관 소속 민족학 관련 문예사, 초현실 예술 관련 잡지 편집과 비평을 부업 삼은 인물이다. 

rules of game 총 4부작으로 이뤄진 책인데, 사실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사과벌레 같은 작가가 40-70년 사이에 쓴 

자전적인 글 모음이다. 그래도 상상이든, 기억이든, '나'를 매개로 가로세로 엮고 묶은 글이라 나름 연결은 다 된다.

그 번역도 장기작전인지 97년부터 시작된 게 2017년에 3부작 fibril까지 나왔고 마지막은 자서전이란 게 살아생전 완성못하듯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를 일이지난 '게임의 규칙/ 긁힌 소리. 긁힌 자국, 휘갈겨쓰기, 요행수'가 오롯이 한 권 노릇을 하니 두 번 읽어도 된다.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되어 종전 아닌 종전을 맞은 40년부터 종전 후 47년까지 글이고, 글은 파리 해방이후, 이전으로 크게 두부분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지만,작가적인 감성, 이건 작법과 그 해제라는 내용의 전환으로 대변되는 변화이지 역사적인 기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자전적 소설답지 않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연대기 순도 그렇다고 프루스트처럼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잘못 인식된 단어, 잘못 발음한 단어, 혹은 최초 인식 과정, 말을 글로 다시 배우며 깨달아 가는 알파벳에 따른 인상을 음성학적인 유사성과 연관에 따라 꼬리를 무는 개인의 역사를 그 음성학의 매개체나 사물들 까지 동원하여 그 순간을 적어내려 간다. 그렇다고 이를 깊이 파고들어가 정신병리학적, 심리학적인 분석에 활용하지도 않고 그저 연상작용 놀이의 일환인지라 괜히 심각한 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작가의 말을 빌면 엉금엉금 기어간 젖먹이가 베란다에 난간을 붙들고 서서 바깥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붙든 난간을 입에 오물오물 넣고 맛을 보는 것과 같다. 

글을 적는 이유가, 언어의 사변적 활용이 아니라 그 언어 자체의 맛을 느끼지 위한 것이니, 음식을 만든 과정도, 그 소화되거나 되지 못하는 과정도 아니라 입안에서 (잘못, 잘) 오물거리며 씹고 뱉고, 씹고 뱉는지라, (작가는 신나서 나가지만) 좋은 말도 한두 번, 연결이 끝도 없는데다, 한문장 한문단의 긴 글, 겹겹 중첩된 사유와 반복으로 무척이나 읽어내려가는 글이 지치고, '더럽게' 지루해 곯아떨어지기 일수인-그런데도 차마 손을 떼지 못하고 긴 시간을 들이며 용케도 읽어 내려간다.


작가의 동시대 영국에, 작가보다 2살 어린 '시릴 코널리Cyril Connolly"라는 작가/비평가/잡지편집자가 작가가 대표작 '성년'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내던 바로 그해, 2차대전이 발발하던 때 나라는 자서전을 미끼로 또 다른 방향성의 책을 내었다. 

왜냐면 이 책은 일견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세 부분, 크게 두 부분인데 비평전문가다운 50년 사이의 문학경향과 (제목처럼)"될성부른 작가"의 걸림돌, 자서전적 소설이라는 소설을 그 한 돌파구로 결론을 짓고, 자신의 학창 시절 매맞고, 조리돌림당하며 (그 시대 다 그랬듯이) 커가는 험한 남학교 시절을 고전 중심의 문학 교육과 그 내용 비평으로, 당시 내로라하는 동기동창 인물들과 맞물려 써놓았기 때문이다. 



시작은 전쟁으로 발이 묶인 시대 제멋대로 자란 자신의 정원을 앞에 두고 

내일이면 모두 잊힐 그 많은 책들이 적어도 10년은 가려면 어떠해야 하나 사유로 시작을 하고 

먼저 현대의 문학 사조를 크게 과거의 '댄디즘'과 지금 조류 '저널리즘'경향으로 나누고서 

그 잘잘못으로 저널리스트답게 단도직입적으로 재어들어간다. 

간단, 명료, 당연 아쉬운 점은 없지는 않으나 읽어가는 재미는 톡톡. 

성년을 낸 뒤 또 자전적인 이야기(하지만 완전히 다른 틀)로 들고 나온 레리스의 변명과 똑같이 

생업이 발목을 잡는 비전문 작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자서전적 소설을 쓰는 일'이라는 생각하에 쓴 뒷부분은 

하지만, 문제로 짚었던 부분에 오답 표기가 원래 의도였는지 사실 자서전 부분은 

이미 애증으로 밥벌어 먹고 살던 저널리즘에 인이 박힌 탓인지 

'아름답지'가 않고 고루하다. 





그래도 이 책은 나름 명쾌한 비평과 날카로운 인식으로 내일이면 잊힐 저널리즘의 운명은 벗어나 세간에 살아남아 읽힌다. 

이 작가의 지론이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을 빌어) '신문,저널은 한번 읽고 버리는 글, 문학은 두번 읽는 글(혹자는 두고두고 읽는 글)'이다. 생


다시, 미셀 레리스, '일요일'이란 하부 표제 이후로는 전쟁의 그늘 아래 그저 어린시절 '말'장난으로 침착하다가 파리 해방을 맞아 나열 위주의 글에서 이런 글을 쓰게 된 자신에 대해  제법 과거와 현재의 선명한 이야기들을 오가며 설명을 해나간다. 이 에세이격의 이야기가 사실, 이후 애먼 비평에 볼멘소리를 해대는 자조이긴 하지만. 자신이 실패라고 끝내 자인하는 시도보다 더 와닿는다. 시릴 코널리와 똑같이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 하나로 죽음, 혹은 망각에 전전긍긍하는 우울이라는 작가, 그래도 끝끝내 손을 놓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어에 대한 사랑, 그 '시적인 표현/언어'가 작중에 달짝하게 스며있다.


둘 다 어떻게 조금 되다만 작품/ 이상한 틀의 자서전적 소설인지라, '될성 부른 나무의 적들'은 스윽 한번은 읽어봄직하고, '놀이의 규칙들'은 한번 반쯤 곱씹어 읽어봄직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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