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실물'책을 샀습니다. 5센트 모자라는 16에우로, 2만원이 훌쩍 넘는 돈입니다. 실물 책은 대학교앞 3유로 떨이판매 전집류, 저렴공격형 문고판 선집류, 뒷골목 반값 중고책으로 사고, 퀴퀴한 도서관 책을 애용하는 버릇해서 간만에 돈좀 썼습니다-만 

책은 한세기가 되었고, 살아생전 저자와 서신 교환으로 번역해낸 번역은 반세기 전 번역판이고, 

인쇄판은 30년전 판형 그대로 "새책"입니다. 아마 식자들은 다들 원서로 이미 읽었고, 모르는 사람은 그대로 모르고 잊힌 책이라 이북은 커녕 해적판도 구할 수 없는 책이니 달리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물가 싼 스페인 책값은 유난히 비싸요) 

노안을 찡그리고 팔은 저만치 멀리 두고 간만에 줄 그어가며 읽었습니다. 이건 다, 아프리카 인상과 별 다르지 않게 건-욕을 그대로 들어먹고 있던 로쿠스 솔루스의 동-출판사 그 연작들을 뒤적거려보고, 

소설 '파리의 농부'초입부 들춰보다가 궁금증이 동한 탓입니다. 




소설이랍니다. 읽어보고 아무리 봐도 간장인데, 맛도 간장인데 된장이라고 우기니, 

즉 이야기도 없고 주인공도 없이 '나'의 이름도 '루이'인데 소설이라고 우기니, 

된장인가 보다 받아들이고 읽었습니다. 아니 보았습니다. 








작가는 소설을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주기'를 원했고, 다른 이미지로 보기를 바랐기에 또 그렇게 받아들이고, 

폭넓은 문화적(통합되기를 원했던, 그래서 구별까지 거부한 광범위 예술) 실험에서 탁월히 성공했다고 

자부할 만한 이런 계열의 소설작은, 시집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기에 그래서 접한 적도 그리 많지 않기에,

19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여러 시대 반항적 혹은 저항적 혹은 전복적 성향의 예술가 (시각적 차원, 좁은 의미의 예술가)들의 비평문을 모은 책, '보는 일에 관해'를 길잡아 삼아, 서로 비춰가며 봤습니다. 이 책은 50년전에 이전 반세기 전을 중심으로 되짚어 보는데, 작가는 노년에 알프스 산자락에 농사 지으며 살던 특이한 경력의 다작 산문작가, 비평가라 이런 특이한 우연도 

이런 선택에 한몫을 했습니다. 



루이 아라공에 비하면 아주 숩게 물리적/정신적으로 

접근 가능합니다. 











이 책은 고대 동물에서 근대 가축, 현대 동물원이라는 신화적 존재에서 '반려동물' 신세의 동물의 시선과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반추하는 일로 시작해서 역사적-사회주의적 관점을 기반으로 크게 '사진가'들과 '사진산문'에 대한 비평, 2부는 아마추어와 프로들의 세계와 작품들을 대비하고 '미술가'와 '조각가'들을 특정 시원의 관점에서 해부해 나가다가, '들판'으로 끝을 맺습니다. 

파리의 농부도 이와 구조가 흡사합니다. 책은 24년과 25년 연재발표한 소설(에세이 아닙니다)과 '농부의 꿈'이라는 짤막한 글로 맺습니다. 


(나름 소설이니까 스포일러! 주의보 발령) 

근대의 신화의 세계, 보이지 않는, 보지 않았던 곳으로 가겠다는 야심찬 포부의 서문을 열면 

대로 확장 공사로 사라질 위기 '파사주 데오페라' 아케이드 주변을 카메라 같은 수법으로 들여다 보는 첫부분, 

친구 둘과 '뷔테 샤몽 공원'에 야간 산책을 하며 가로등 컴컴한 어둠을 뒤로 하고 흩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그림처럼 그려나가는 두번째 부분 '뷔테 샤몽에서 느끼는 자연의 감정'으로 되어있습니다

산책자의 발끝에 따라 좌우로 뒤로 위로 뒷골목으로 드나들며, 보상문제 관련 이슈와 신문사설, 플래카드처럼 '푼돈받고 나가라니 권리금도 못 뽑고 나간다, 폐업 떨이 판매, 혹은 상점인수 광고'를 보여주고, 낡은 각종 상점들, 은밀한 숙박시설, 지인들이 모이는 카페, 남사스러운 목욕탕, 의심스러운 삼류 극장  마사지시설들 관능적으로 그 시대의 관광책자처럼 하나하나 상세하게 나열을 하며 아주 개인적인 감성으로, 현실과 초현실, 속되지 않은 욕망, 의식과 무의식, 비유와 직설들로 상당히 '고전적인' 서체로 그려나갑니다. 흑백 사진에 다다 운동 그리고 초현실의 선명한 색깔을 덧입히며 눈 뜨기 어려운 한낮의 공간이 이어집니다. 

두번째는 그림 속 재현된 혹은 선택된 자연처럼, 도시의 공간에 이탈을 꿈꾸며 세워진 인공적인 공원을 산책합니다 자연에 대해 곱씹는다고 해놓고 계속 지엽으로 흐르고, 다늦은 저녁 심심하던 차 만난 두 친구들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도 아니요, 전체 조망과 인공적인 기념탑과 자살다리, 벨베데레 연못 등은 장의 전환점이지 밤의 공간을 그리 암흑 혹은 심연처럼 시꺼멓게 정면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얼큰히 몇 잔 한 탓인지, 세상에 새로운 신화(여기서는 근대 물질주의로 해석하면 부정적 의미, 판타지, 초현실 혹은 근대의 추상, 철학으로 하면 인식적인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를 찾아서 혹은 반항으로 현존하지 않는 격렬한 사랑과 다름 없는 열정으로 싸워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겠노라 열변을 토해댑니다. 

그러다 또 흥겨운 (술?)기운이 빠지고, 괜히 세상 서운하고, 미워지면 이런 정신없는 책 읽고 투덜댄다고 독자들을 조롱했다가, 이런 책 출판한 출판사 읽지도 않고 출판한다 욕을 싸잡아 해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알 수 없는 추상적/형이상학적 목표에 변증법적인 논리로 매달리는 일, 한계이자 해결책인 방법론을 차분하게 사변적으로 다짐을 하다가, 자가분열한 자신과 열띤 난장판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20세기 초반 백가쟁명 운동들이'보기 드물게 유난히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던 급진적인 시대였다지요. 

큐비즘, 신조형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야수파 짜들이 추상의 물결등이 가지에 가지를 치고, 다모르겠고난내길간다 '나홀로'파까지 예술계에 혁신을, 미학적인 파괴를 반동을, 전복의 기치를 내걸고 으르렁거립니다. 결국 다들 "관찰자가 더욱 날카롭게 작품에 집중하고 말을 거는 기회"를 바라는 일차적인 바람들이었겠지만. 확장와 접근이 외려, 배척과 소외를 가져오길 바라기도 했겠지만, 대부분 그 자잘한 분파들의 분파들, 헛소동만 일으키다 말끔하게 삭제되기도 합니다.


아라공 '이미지는 지식으로 가는 경도'라는 생각에 소설화한 이 사변들은, 그의 구체적 실험의 하나이지 실험이 

목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어쨌든 목적없는 미지/어둠을 향해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자신을 타박한다 해도 따르겠다는 스물다섯(이게 소설) 젊은이의 다짐이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문장이 "시적"으로 옆걸음질을 자주 치는 데- 쳇, 고대 석상처럼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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