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sf와도 다른, 아니 굳이 sf라는 틀 안에 가두고 싶지 않은,그저 '이야기'라 칭하고 싶은 세개의 멋진 단편을 모아놓은 책.일단 단편들의 줄거리는 가벼운 sf물 느낌이다. 타임머신을 통해 죽음을 앞둔 친구를 구하고, 초능력을 통해 국정원이 만든 비밀감옥으로부터 탈출하며, 인간에 대한 개의 무한한 사랑을 동력으로 우주를 구한다(늑대인간의 도움을 받아).하지만 이 고급진 소설을 이렇게 폭력적으로 줄이는건, 프로축구 경기를 '다 큰 어른들이 서로 공 가지고 놀겠다고 땀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것'으로 요약하는 것과 같다. 그 바보같은 어른중 호날두라는 아저씨는 마흔 넘어서도 정신못차리고 노는데도 연수백억을 버는데도 말이다.이 책의 고급진 느낌은 잘 쓴 장르소설에서 느껴지는 쾌감이라기 보단 '순문학' 에서 느껴지는 위태위태한 정갈함에 가깝다.심완선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세편의 주인공들 모두 지나치게 감수성이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자신에게 매몰되는' 전형적 순문학 주인공 유형이기에 지켜보기가 불안하지만 그 불안함이 고급진 문장과 잘짜인 구조속에 안정적으로 가둬져 있다.또한, '타는 목마름으로'를 외치는 듯한, 민주주의를 논하며 대학가 술집에서 막걸리 한사발을 나누는 듯한 어찌보면 지금 시대분위기와 다소 어긋나는듯한 갬성도 이러저러한 서브컬쳐의 활용과 무거울만해지면 그 무거움을 덜어주는 소설적장치들 덕에 재출시된 진로 소주처럼 레트로하지 올드하진 않다.이러한 완급조절은 거의 언어의 마술사가 아닌가 싶은 작가의 능수능란한 글솜씨 덕일듯 하다. 그야말로 술술 읽히는 비단결같은 글의 질감덕에 sf적 가벼움과 사회비평적 무거움사이의 균형감이 잘 유지되며 다른걸 다 떠나 '이야기로서 재미가 있다.''감명깊었고 감동적이었으며 재밌는데다 뒷맛까지 상큼한,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추천할만한 책이다.
별생각 없이 집었다가 생각보다 괜찮아서 놀랬던 '낮술'. 힐링과 음식을 결합한 푸드 힐링스토리 장르의 마법사 하라다 히카의 신작이다. 배경이 되는 도서관은 작고한 작가들이 기증한 장서로 운영되며 밤에만 문을 여는 일명 '밤의 도서관'이다. 이 곳의 직원들, 손님, 기증자 등 여러 인물들과 관련된 다양한 인생사가 그려진다.음식 묘사, 특히 음식 자체의 질감-색-맛 보단 그 음식을 즐기는 인물들의 심리묘사와 분위기 묘사에 능한 작가이기에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힐링 소설을 써냈다.이러저러한 이유로 삶에 지쳤을때 맛있게 읽기 좋은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데뷔 35주년인 2020년에 발표한 '녹나무의 파수꾼'의 후속작. 전편 '녹나무의 파수꾼'을 안읽고 봐도 될 만큼 친절한 설명에다 전작은 이 책을 위한 빌드업이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청출어람의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옮긴이의 말에 '악하고 독하기만 한 스토리에 혹해 있던 눈에(헉스..난데..) 이 책의 잘 짜인 선한 이야기는 순한 물처럼 마음을 씻어 주는 영험한 힘이 있습니다.' 라고 할 만큼 작가가 대놓고 착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썼는데, 대놓고 감동해버렸다.이 책은 작가의 자부심과도 같았던 이공계적 지식과 설명을 버리고 이순을 넘긴 후 새로이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듯한 감동과 휴머니즘을 아낌없이 쏟아넣었기에,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을 듯 하다. 또한, 다행히도 작가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페이지가 삭제되버리는 듯한 놀라운 가독성은 어디 안갔다.개인적으로 전작은 다소 심심했었는데, 후속작인 이 책은 글의 짜임새나 완결성이 전작을 뛰어넘는걸 넘어서 '매스커레이드' 시리즈처럼 성공적인 새로운 시리즈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또는 독자로서의 바람)이 보인것 같았다.6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독자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시는 대가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며, 이 책이 아직도 히가시노 게이고를 안 읽어본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용의자x를 넘어 히가시노의 입문서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의 시 처럼 운율넘치는 문장에 덱스와 함께 숲속을 거닐고 별을 바라보며 야영하는듯한 편안하고 희망찬 내용이지만, 한문장 한문장에 담긴 작가의 성찰을 가볍게 날려 보낼 수 없기에 책을 넘기는 손길이 무거워지고 언어가 입가에서 맴도는 책이다.책에서 '당신이 방금 걸어온 그 짧은 걸음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작은 생물들의 죽음이 있었는지 아느냐'라고 말 하듯이 인간과 자연, 생물과 비생물이 공존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수많은 인간중심적 편견과 아집, 탐욕을 극복해야 할 지 생각하게 한다.솔라펑크란 장르가 생소하긴 한데 희망적인 작품의 분위기만 제외한다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명작 소설 '더 로드'가 떠올랐다. 비록 수도사 덱스의 여정이 물질적 결핍과 생존의 위기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지만 배고픔 못지 않은 영적 결핍의 고통과 정신적 고갈의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이기에, 그의 여행은 '더 로드'의 생존을 위한 여정못지 않게 엄숙하면서도 숭고하다.책을 읽어나가면서 모스캡의 편견없는 태도와 삶의 자세?에 묘하게 힐링이 됐다. '죽음'과 '순환'을 받아들이는(야생조립체라는 제목은 다른 로봇이 사멸하면 그 부품의 잔재가 다른 로봇에게 계승되어 공장이 아닌 자연에서 조립되는 로봇을 뜻한다) 이 철학적 로봇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식의 위로가 아니라 '나는 당신처럼 아픔을 느끼진 못하지만 당신이 아파하고 있다는건 알 수 있습니다'식의 묘한 로봇적 공감?을 해준다.감상평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로봇 모스캡의 묘한 위로에 이기적인 떼쟁이 덱스가 변해가는 모습을 함께 감상해 보시길 바란다.
'용사'라 불리는 RPG 게임의 주연이 아닌, 조연에도 못미치는 거의 무생물 수준의 npc(non-player character)를 주인공으로 삼는 신박한 판타지 소설이자, 재미반 교양반으로 이루어진 경제 교양 소설이다.용사가 게임을 시작하는 마을의 도구점에서는 최상급 무기와 방어구를 살 수 없다. 드래곤 블레이드 같은 최강의 무기를 들고 시작한다면 마왕까지 이르는 그 험난한 길이 훨씬 편해지며, 용사들의 생존확률도 훨씬 높아질 텐데 말이다.(이 세계에서는 마왕에게 도전한 용사가 전부 사망한다)동생이 용사로 선정되어 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게 되자 견습상인 마루는 동생에게 최상급 무기를 구해주고자 하나, 상인길드가 정한 규칙으로 인해 상점에선 동검밖에 팔지 않는다고 한다. 마루는 이런 불합리한 규칙에 의문을 갖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상인길드를 찾아 모험을 떠나면서 각종 경제원리들을 몸소 배우게 되며, 결국 이 세계가 숨기고 있던 비밀에 도달하게 된다.중국식 양산형 모바일 게임들이 망쳐놓은 mmo rpg가(요즘엔 무슨 5성뽑기 1000회 이러면서 렙1에 드래곤블레이드를 들고 시작해버린다..) 아닌 그때 그 시절의 롤플레잉 게임. 소위 레벨 노가다를 강요했고 불편하고 불친절하지만 왠지 정감이 가는 도트 그래픽의 jrpg 갬성이 이 책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이룬다.이 갬성을 공유한다면 이 책은 거의 어린시절 앨범 보듯이 울고 웃으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 거기다 그때 게임하면서 부모님께 혼났던 억울함을(쓸데없이 게임하지말고 공부해!) 독점, 담합, 시장경제 원리 등의 경제학적 소양으로 보상받을 수 있기에, 즉 게임을 통해 공부도 할 수 있기에 일석이조다.하지만 옛날 rpg의 감성을 모른다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커리어 컨설턴트이자 3억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인기 유튜버인 저자가 전문지식과 화려한 글빨로 게임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독자를 용사와 마왕, 모험이 존재하는 세계로 자연스럽게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