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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망명지
유종호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3월
평점 :
유종호의 글은 한없이 고즈넉하고 유순한 데다 늙기까지 했다. 그래, 그의 글은 늙었다. 좋게 늙은 할아버지의 글 같은 느낌.
서문에 나와 있듯 그가 여기저기 쓴 조각글을 두루뭉실한 카테고리에 집어넣고 묶었다.
그래서 좀 성의 없어 보인다. 노 교수고 뭐 따로 글을 많이 써서 책을 묶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역시 성의 없다.
그가 쓴 글 전체를 관통하는 구절은 이것이다.
"작은 것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첫 장이 그의 책읽기에 대한 단상을 적은 것인데 이 장은 무척 유익하면서도 재밌다. 요즘 젊은이에게서는 쉽게 듣기 힘든 이름들이 등장한다. 물론 그가 지향하는 것은 고전처럼 보인다. 서머싯 몸이나 김동인, 레비 스트로스 같은 이름이 그렇다. 개중에는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도 있다. 아이자이어 벌린이나 서기원 같은 작가. 서기원이 설마 무협 작가인 서기원은 아니겠지? 그리고 좌파 평론가였다는 김동석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었다. 궁금했다.
유럽문학을 영문으로 읽기를 권하는 것은 시도해볼 만한 독서법이라고 생각했다. 쌓인 한글로 된 책들도 제대로 못 읽고 있는 주제에..-.-"
가끔 날카롭고 공리를 꿰뚫는 시각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부분이다.
--가령 현대인의 교양 체험에서 가장 큰 영향력으로 떠오르는 마르크스 니체 혹은 프로이트가 모두 '의심의 대가들'이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소여라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이 실은 개인들이나 공동체가 혹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의 결과이고 구성물이란 것을 그들은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폭로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작동을 폭로하고 프로이트는 성의 작동을 폭로한다.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의 기원과 그 작동을 폭로한다. 한 사회학자가 사회학의 기본충동으로 거론한 폭로의 모티프는 모든 인간과학의 기본적 충동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관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단없이 설파하는 폭로의 모티프에 향도되는 교양 체험에 감염된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일단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적실하게 이해되면서도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을 줬던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일부 눈에 뜨이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글은 그냥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얘기다. 그리고 비슷한 대목이 여러 글들에서 중복된다. 유종호가 지은 다른 글을 보지 못해서 내가 이 글에서 느낀 것이라곤 그 정도다. 본격 문학평론은 좀더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