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의 연인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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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하루 타이베이에서 함께 지냈을 뿐이잖아. 그 후로 한 번도 못 만났어.

그런 경우 사랑일까?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은 첫눈에 반해 하루 동안 사랑했고, 결혼했고, 죽었다.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도 하는데 현실에서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저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만 같다. 

요시다 슈이치의 <타이베이의 연인들>의 주인공 하루카와 에릭은 그렇게 딱 하루를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같이 지낸다. 여행객과 그 지역의 사람으로. 왠지 모를 끌림으로 둘은 다시 만나기로 하지만, 에릭이 전해 준 연락처를 잃어버리고 만 하루카는 에릭을 찾아 다시 타이베이로 돌아가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서로 헤어진 후 연락을 기다리던 에릭은 고베 대지진의 소식을 듣고 혹시 하루카가 그 지진에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일본으로 구조활동을 온다. 그렇게 엇갈린 둘은 구 년의 시간이 흘러 하루카는 타이완 고속철도 회사에서 근무하며 타이베이에 살고 에릭은 일본의 건설회사에서 일한다.

서로 엇갈린듯한 인연의 그렇게 교차하며 이어지고 있었다. 한쪽은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다른 한쪽은 일본에서 타이완으로. 그들의 만남은 어쩌면 아주 작은 일이었지만,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

하루카와 에릭이 현재의 엇갈린 두 나라의 연인들이라면 60년 전 일본이 타이완을 지배하던 시절의 안타까운 이별을 겪은 연인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일본의 여인이었고 그를 연모하던 사람은 타이완의 남자였다. 그 사이에 있던 가쓰이치로는 "잠깐. 너는 일본인이 아니야. 요코 부모님이 2등 국민과의 결혼을 허락할까?"라는 한마디로 둘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고, 일본으로 돌아와 그 여인과 결혼했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 뒤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타이완을 다시 찾는다. 물론 그때의 그 친구도. 그리고 진심으로 그 친구에게 사과를 한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에서 사랑이 단지 개인의 문제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사랑은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타이완에서 일본여성을 사랑하는 타이완 남성이 그 말 한마디에 꼼짝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9년의 시간이 흘러도, 아니 60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서로 이어지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는 끊어진 인연을 이어간다. 비록 그 시간과 공간의 벌어짐이 불꽃같은 열정을 식히고 말았겠지만, 그것은 이제 또 다른 시작일 수 있는 것이다.

  

설령 똑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그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단수이 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아파트를 찾던 내가 지금 여기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렌하오가 찾았던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찾았던 그가 여기로 와줬으면 좋을 텐데 하고.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은 역시 내가 찾아내지 못한 그였고, 그가 찾아내지 못한 나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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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 판미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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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블 이야기','매 이야기'는 왠지 남자가 읽어야 어울릴 것 같다. 그리고 저자도 왠지 남자일 것 같았다. 강한 눈을 가진 매가 그려진 표지 또한 남성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전문적인 매 조련사로 맹금류 연구와 보존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헬렌 맥도널드라는 여자분이다.
 
'2015 아마존 올해의 책 1위' '이 책은 노래다.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다.'라는 문구에 마음이 끌려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책 속의 문구에 마음이 잡혀 여기저기 페이지마다 포스트잇을 붙이기 바빴다. 그리고 걱정이 앞선다. 이 작가의 이런 감성을 어떻게 리뷰에 담을지.
 
헬렌(작가)은 어느 날 갑자기 저널리스트 사진기자였던 아버지를 잃었다. 그 상실감에 힘들어하던 그녀는 말라깽이에 볼품없는 외모에 오로지 맹금류에 집착했던 여덟 살의 그때처럼 '참매'를 길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그때 읽었던 화이트의 <참매>도 다시 읽기 시작한다. 헬렌의 <메이블 이야기>는 이렇게 헬렌이 길들이는 참매 '메이블의 이야기'와 화이트의 이야기와 자신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짜놓은 에세이다.
 
참매 길들이기라는 아주 낯설기만 한 내용이 첫 페이지부터 갑자기 가슴으로 들어오는 데는 작가의 솔직 담백한 글 솜씨와 누구나 겪게 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얻게 된 '충격적인 상실감은 아무리 노력해도 공유할 수 없는 고통이었던 헬렌과 사이가 나쁜 부모 밑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화이트가 참매를 길들이는 과정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화이트에게는 그것이 도덕적인 마술이자 그의 고민에서 벗어날 방법이었다. 매를 조련하고, 매와 공감함으로써 그는 이겨내고자 했을 것이다.
 
화이트에게 이것은 도덕적인 마술이자 그의 수수께끼에서 벗어날 방법이었다. 솜씨 있게 사냥하는 동물을 조련함으로써, 그것과 밀접하게 교류함으로써, 그것과 공감함으로써, 모든 생생하고 진지한 욕망을 완전한 순수 속에서 경험할 수 있을 터였다. 비록 가장 잔인한 욕망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런 그의 노력을 쓴 책이 바로 <참매>였다. 비록 그 책은 '매를 훈련시키는 지루한 일은 하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서술한 목록'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헬렌에게 참매 길들이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면서 모든 것을 보는, 지켜보기는 하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카멜레온, 즉 자신을 다른 인물이나 상황으로 재창조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자아의 상실과 이성의 상실을 견디는 능력,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관찰 중인 대상 속에 자신을 넣는 일이었다.
 
그러나 화이트에게 고스는 화이트가 오랫동안 억제하려 애쓴 내면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모든 욕망의 살아있는 표현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신사가 되려고 애쓰며 살았다. 문명사회의 모든 규칙에 맞추고 그것을 고수하려고, 정상적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는 매를 위해 인간을 외면했지만, 자신에게서 도망치지는 못 했다. 그는 매 안에 그것들을 몰아놓고 교화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헬렌은 점차 매를 통해 상실의 슬픔을 이기고 행복해지는 법을 알아간다. '제발 와. 여기가 네가 있고 싶은 곳이야. 내게 날아와. 솟는 구름, 뒤에서 나무를 흔드는 바람은 무시해. 나한테 집중하고 네가 있는 곳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와.'라고 불안해하며 애원하던 헬렌이 매가 돌아오는 것에 먹먹한 가슴에 약이 되며 상실의 아픔을 잊어간다.
 
나는 본다. 거기 있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매가 가져오는 계속되는 마음의 끌림, 매의 눈을 갖고 싶은 내 오랜 갈망, 안전하고 고독한 삶을 사는 것,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속 세상을 거기에 두는 것, 지켜보는 사람이 되는 것. 상처받지 않고 거리를 두고 온전하게.
 헬렌은 화이트와 다르게 메이블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인정하고 바라본다. 매는 매로, 인간은 인간으로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분리된 채 각자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배운다.
 
살다 보면 세상이 항상 새로운 것들로 넘쳐나기를 바라는 때가 있다. 그러다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온다. 삶이 구멍들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안다. 부재, 상실, 거기 있었는데 이제는 없는 것들. 그리고 또 깨닫는다. 그 구멍들을 피해 가며 구멍들 틈새에서 성숙해져야 된다는 것을. 비록 전에 그것들이 있던 곳에 손을 뻗으면, 추억이 있는 공간이 가진 특유의 긴장되고 빛나는 아련함이 있긴 해도.
 
손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라고 있는 것이다. 손은 매의 횃대 노릇만 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야생은 인간 영혼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야외에 너무 노출되는 것은 영혼을 좀먹어서 무(無)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야생으로 돌아가,  난 그렇게 치료를 받았어.'라는 메시지가 아니어서 좋았다. 너희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지만, 난 야생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았어. 그런 일은 쉽지 않을 거야. 그러니 놀랍지?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각자가 독립한 채 자신의 상처를 차분히 '매의 눈으로' 들여다볼 때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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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죠?˝ 작가의 말에 조르바는 ˝자유라는 거지!˝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대답해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드리리다.˝ 이렇게 두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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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야간비행 - 정혜윤 여행산문집
정혜윤 지음 / 북노마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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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페인 야간비행

작가
정혜윤
출판
북노마드
발매
201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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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혼을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한 작가의 글에 끌리다 보니 저 사람의 영혼으로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멀리는 헤르만 헤세가 그렇고 요즘 읽고 있는 곰브리치가 그렇다.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또 한 명의 작가는 정혜윤이다. 정혜윤 작가의 글은 '왜 이렇게 아는 책이 많아?'였다. 그녀는 수많은 책을 넘나들며, 작가를 불러내며 끝없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녀의 책만 읽었을 때 그저 이곳저곳에서 발췌해서 옮겨 적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강연을 들으면서 그녀가 불러낸 책 속의 구절들은 수많은 작자들은 모두 그녀의 가슴속에 영혼 속에 같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 순간 '아, 나도 저런 영혼을 닮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었다. 

이번에 읽은 그녀의 여행 에세이는 그래서 기존의 여행서와는 달랐다. 많은 여행서가 보여주고 냄새 맡게 해주고 궁금하게 해준다. 글을 읽다 보면 그곳으로 뛰쳐가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스페인 야간 비행>은 그녀의 생각처럼 살고 싶게 만든다. '내 눈만으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던' 그녀의 말처럼 난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그녀의 감성으로 세상과 만나고 싶었다. 셀카봉을 치켜들고 하는 여행이 아니라, 카메라가 우리를 대신해서 경험하는 여행이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만나든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여행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느꼈다.

이 책은 '필리핀 보홀에서 쓴 스페인 여행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두 지역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두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양서류', 양쪽 다에 복잡하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한 애정을 갖고 있는 인간 양서류를 상정하고 그에게 글을 쓰기도 하고, 미스 영장류라는 실제 인물, 그녀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인간이라는데, 그런 영장류에게 말을 걸며 여행을 한다.  끝없이 세상에,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그녀의 글이 특별한 이유는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잘 전달하는데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그녀의 말처럼 '보이기'가 아니고 '보기'와 '존재하기'를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한 장 없이 오로지 글로써 여행을 펼쳐간다는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한 장으로 담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설명하기에는 글이 나을 테니까.

 

경험의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하락한 것 같지?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밤마다 '아, 오늘도 피곤한 하루였어'라고 되뇌다가 새로운 경험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 그런데 여행지에서는 카메라가 우리를 대신해서 경험을 해. 개인의 유일무이하고 대체 불가능해지는 것은 환경의 차이이기도 하고 경험의 차이이기도 할 텐데 여행자의 경험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세계에 자신을 투영해보고 이전의 나와는 조금 다른 내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여행은 자기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로 이동해보는 것이고 원래는 자기 것이 아니었던 것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변해가면서 현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 아니었던가? 그래서 모든 탁월한 여행자들은 '보이기'가 아니라 '보는 것'에, '보이기'가 아니라 '존재하기'에 마음을 빼앗기곤 하지 않았던가?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세상을 보여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뒤를 따라서 비로소 다르게 보기 시작할 수 있어. 거울 속에서 우리는 길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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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생 강의 -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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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혹 이 질문은 삶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지 않을까?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뒤 우리가 믿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 휩싸인 짙은 허무주의의 한 표현은 아닌지..... '우리 삶의 근거가 발밑으로 사라져' 버렸을 때 우리는 '왜'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우리에게 니체는 많은 상징과 은유를 담은 말을 건넨다. 그래서인지 니체는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얼마 전 읽은 한 일본의 유명한 작가의 글에서 만난 니체는 자기 계발서의 긍정의 화신처럼 느껴졌다. 니체의 실체가 모호한 건지, 아니면 신의 모습처럼 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건지 헷갈린다. 그래서 자칫 오독의 가능성이 많은 철학자는 아닌지 괜한 걱정이 들었다.

니체에게 강하게 유혹당한 나에게 니체는 잡고 싶으나 잡을 수 없는 먼 빛과 같은 존재였다. 큰 동경을 품고 있지만 조금 알 것 같으면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버리는 잡을 수 없는 빛이던 니체가 이진우 교수의 <니체의 인생 강의>에서는 아주 가까이 다가와 그 빛과 향기를 내 손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니체는 머리로 하는 철학(데카르트, 칸트, 헤겔), 가슴으로 하는 철학(플라톤, 마키아벨리, 홉스)와는 또 다른 '삶으로 하는 철학'을 했던 사람이었다. '네가 산보하면서 사유하지 않은 사상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어라.'라고 말한 니체는 그의 삶이 곧 사상이라고 말한다. '모든 심오한 사상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모든 철학적 개념은 도 다른 하나의 가면을 쓰고 있다.'며 철학은 결국 가면 벗겨내기임을 말하는 니체의 철학은 계속되는 자기부정의 힘을 가진 강렬한 철학이다.

그 힘은 니체의 정직성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위험하다. '아무것도 진리가 아닌 세상'에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은 어쩌면 의미 없는 존재다. 그런데 의미 없는 존재가 의미 있는 이유는 '의미에 질문을 던질 줄'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감추면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장에서 독파리같은 삶을 사는 최후의 인간이 아니라, 사랑과 창조와 동경과 별을 품은 초인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야 하는 위험하게 사는 인간이다. 항상 자신을 넘어서는 창조 과정에 있는 초인은 의미와 목표도 없는 그렇지만 피할 수 없이 회귀되는 늘 같은 것이 반복되는 삶을 인정하고 춤을 추듯이 사는 사랑이 가득한 인간이다. 무거운 것을 견뎌내는 낙타나 자신의 자유를 위해 명령할 줄 아는 사자를 지나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춤을 추듯이 사는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한 삶의 의미였다.

책을 덮고 나니 책 띠지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많은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모르 파티는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내 삶의 무게처럼 묵직하고 힘겹기도 하지만, 춤처럼 가볍고 흥겹기도 한 많은 이야기를 품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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