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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 판미동 / 2015년 8월
평점 :
'메이블 이야기','매 이야기'는 왠지 남자가 읽어야 어울릴 것 같다. 그리고 저자도 왠지 남자일 것 같았다. 강한 눈을 가진 매가 그려진 표지 또한 남성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전문적인 매 조련사로 맹금류 연구와 보존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헬렌 맥도널드라는 여자분이다.
'2015 아마존 올해의 책 1위' '이 책은 노래다.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다.'라는 문구에 마음이 끌려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책 속의 문구에 마음이 잡혀 여기저기 페이지마다 포스트잇을 붙이기 바빴다. 그리고 걱정이 앞선다. 이 작가의 이런 감성을 어떻게 리뷰에 담을지.
헬렌(작가)은 어느 날 갑자기 저널리스트 사진기자였던 아버지를 잃었다. 그 상실감에 힘들어하던 그녀는 말라깽이에 볼품없는 외모에 오로지 맹금류에 집착했던 여덟 살의 그때처럼 '참매'를 길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그때 읽었던 화이트의 <참매>도 다시 읽기 시작한다. 헬렌의 <메이블 이야기>는 이렇게 헬렌이 길들이는 참매 '메이블의 이야기'와 화이트의 이야기와 자신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짜놓은 에세이다.
참매 길들이기라는 아주 낯설기만 한 내용이 첫 페이지부터 갑자기 가슴으로 들어오는 데는 작가의 솔직 담백한 글 솜씨와 누구나 겪게 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얻게 된 '충격적인 상실감은 아무리 노력해도 공유할 수 없는 고통이었던 헬렌과 사이가 나쁜 부모 밑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화이트가 참매를 길들이는 과정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화이트에게는 그것이 도덕적인 마술이자 그의 고민에서 벗어날 방법이었다. 매를 조련하고, 매와 공감함으로써 그는 이겨내고자 했을 것이다.
화이트에게 이것은 도덕적인 마술이자 그의 수수께끼에서 벗어날 방법이었다. 솜씨 있게 사냥하는 동물을 조련함으로써, 그것과 밀접하게 교류함으로써, 그것과 공감함으로써, 모든 생생하고 진지한 욕망을 완전한 순수 속에서 경험할 수 있을 터였다. 비록 가장 잔인한 욕망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런 그의 노력을 쓴 책이 바로 <참매>였다. 비록 그 책은 '매를 훈련시키는 지루한 일은 하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서술한 목록'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헬렌에게 참매 길들이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면서 모든 것을 보는, 지켜보기는 하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카멜레온, 즉 자신을 다른 인물이나 상황으로 재창조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자아의 상실과 이성의 상실을 견디는 능력,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관찰 중인 대상 속에 자신을 넣는 일이었다.
그러나 화이트에게 고스는 화이트가 오랫동안 억제하려 애쓴 내면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모든 욕망의 살아있는 표현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신사가 되려고 애쓰며 살았다. 문명사회의 모든 규칙에 맞추고 그것을 고수하려고, 정상적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는 매를 위해 인간을 외면했지만, 자신에게서 도망치지는 못 했다. 그는 매 안에 그것들을 몰아놓고 교화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헬렌은 점차 매를 통해 상실의 슬픔을 이기고 행복해지는 법을 알아간다. '제발 와. 여기가 네가 있고 싶은 곳이야. 내게 날아와. 솟는 구름, 뒤에서 나무를 흔드는 바람은 무시해. 나한테 집중하고 네가 있는 곳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와.'라고 불안해하며 애원하던 헬렌이 매가 돌아오는 것에 먹먹한 가슴에 약이 되며 상실의 아픔을 잊어간다.
나는 본다. 거기 있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매가 가져오는 계속되는 마음의 끌림, 매의 눈을 갖고 싶은 내 오랜 갈망, 안전하고 고독한 삶을 사는 것,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속 세상을 거기에 두는 것, 지켜보는 사람이 되는 것. 상처받지 않고 거리를 두고 온전하게.
헬렌은 화이트와 다르게 메이블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인정하고 바라본다. 매는 매로, 인간은 인간으로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분리된 채 각자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배운다.
살다 보면 세상이 항상 새로운 것들로 넘쳐나기를 바라는 때가 있다. 그러다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온다. 삶이 구멍들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안다. 부재, 상실, 거기 있었는데 이제는 없는 것들. 그리고 또 깨닫는다. 그 구멍들을 피해 가며 구멍들 틈새에서 성숙해져야 된다는 것을. 비록 전에 그것들이 있던 곳에 손을 뻗으면, 추억이 있는 공간이 가진 특유의 긴장되고 빛나는 아련함이 있긴 해도.
손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라고 있는 것이다. 손은 매의 횃대 노릇만 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야생은 인간 영혼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야외에 너무 노출되는 것은 영혼을 좀먹어서 무(無)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야생으로 돌아가, 난 그렇게 치료를 받았어.'라는 메시지가 아니어서 좋았다. 너희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지만, 난 야생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았어. 그런 일은 쉽지 않을 거야. 그러니 놀랍지?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각자가 독립한 채 자신의 상처를 차분히 '매의 눈으로' 들여다볼 때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