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임볼로 음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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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범의 아들딸이여, 우리를 해하려는 자, 각오하라. 우리의 포효를 잠재울 수 없을지어니.」



「펙스턴이 파헤치기 시작한 날부터 순수성을 잃은 우리 땅에서 오염된 농작물과 공기에 자욱한 오염물과 물에 섞여 들어간 오염물에 죽은 아이들을 기억했다.」 _13~14


코사와 마을 아래로 유전이 흐른다. 펙스턴은 정부에게서 땅을 샀고 모든 책임은 정부가 지기로 했지만 정부는 코사와 마을의 안위 따위에 관심이 없다. 산수를 제일 잘하던 왐비의 경련 같은 기침과 죽음, 그 뒤로 이어진 친구들의 죽음을 보고서 아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겁에 질린 채로 일어나고, 온종일 두려움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진저리가 났다.」 _19

펙스턴의 대표단이 내뱉는 속 빈 강정같은 말들에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번 실망하고 무력감에 빠지는 모습에 화가 났다. 그 큰 유전회사가 아이들이 마실 생수만 지원해주는 일도 할 수 없다니, 어떤 안정 장비도 없이 종일 고사리손으로 코발트를 채굴하는 콩고의 아이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마을의 광인으로 알려진 콩가가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고 대장(텍스턴 대표)에게 소리치고 노란 가래침을 대장의 발 앞에 뱉었다. 한때는 뭐든 잘하는 미남으로 마을에서 촉망받던 남자였던 콩가는 어느 날 들리기 시작한 목소리 때문에 광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대장의 운전기사를 숨기고 차키를 빼앗아 들고 와선 대표단을 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 고상한 척하던 대장이 새된 소리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고소했지만, 족장이 군인들이 들이닥쳐 모두를 죽일 것이라는 말을 하자 다들 위축되어 콩가를 말리기 시작했다. 광인에게 손을 대면 저주를 받는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함부로 콩가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사람들은 콩가의 몸에 신령이 깃들어 저들과 싸우라고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왐비의 아버지 루사카는 저들을 포로로 잡고 펙스턴과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아빠는 나중에 어른이 되거든 어린 시절을, 내가 너무나도 작고 약해서 보호가 필요했던 기분을 잊지 말라고 했다. 자기 역시 한때는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들이 세상의 많은 고통을 야기한다고 말해주었다. 이런 아빠를,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아빠를 잃은 상실감을 과연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_48



툴라의 동생 주바가 무당 자카니의 도움으로 죽음의 기로에서 돌아서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가족들의 마음이 되어 함께 기도했다. 주바는 살아났지만, 툴라의 아빠는 더이상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며 누가 봐도 덫인 듯한 그곳, 베잠으로 떠났다. 아빠를 기다리는 열흘이 얼마나 긴지 묘사하는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이번엔 툴라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그 시간을 힘들게 버텨야 했다. 스무날이 지나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고 정부에서 일하는 우자베키의 아들 고노는 그들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엄마는 조산하고 아기는 죽었다. 툴라는 복수를 다짐했다.




툴라의 삼촌, 실종된 말라보의 동생 봉고는 일이 이렇게 되고 루사카의 추천으로 지도자가 되었다. 코사와를 도와줄 몇 명의 베잠 사람 이름만을 요구했지만, 대표단은 입을 열지 않았고 한 명은 죽어가는 상황에서 봉고는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그 무거운 책임감을 봉고는 어떻게 헤쳐나갈지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일었다.


「모든 사람이 꼭 해야만 하는 일만 한다면, 아무도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은 누가 하니? 형은 의무와 즐거움은 무관하다고 말했다.」_146

항상 타인의 위해 희생하던 말라보 형이 봉고에게 했던 말이다. 말라보와 같은 마음들만 모인 세상은 정말 얼마나 아름다울지 잠시 상상해 봤다. 애석하게도 세상은 그렇지 못했고, 펙스턴의 대표단 중 ‘아픈 사람’이라 불리던 사람이 기자인 자신의 조카를 소개했고 덕분에 코사와의 비극을 미국에 알릴 수 있었지만 ‘아픈 사람’은 결국 죽어버렸고, 코사와에 학살이 일어났다.


코사와의 이야기가 미국에 전해지고 복원 운동 단체가 힘을 쓴 탓에 펙스턴으로부터 얼마간의 보상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들이 코사와를 방문하고 떠나는 길에 여인들과 소녀들이 입을 모아 노래했고 가슴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와 나의 눈시울도 붉혔다.

「우리의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 해. 모두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말하는 사람의 입을 기쁘게 하는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우리의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 해.」 _189




툴라는 남달랐다. 그녀는 복원 운동 단체 사람을 통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코사와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고향에 남겨진 동기들과 편지로 서로의 용기를 북돋우며 펙스턴에 대항하고,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사랑도 뒤로 하고 남은 삶을 바친다. 혁명을 꿈꾸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 이 소설은 소설답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이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는, 그렇기에 주먹을 불끈불끈 쥐게 된다. 표범의 피가 흐르는 코사와의 사람들, 그들은 아름다웠다.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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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도어 프라이즈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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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에 만족하시나요? 솔직히 저는 지난 제 삶에 아쉬움이 참 많아요. 어릴 때 책을 더 많이 읽지 못한 것, 내가 좋아하는 것에 매달려 보는 욕심을 내지 못한 것, 변화와 모험을 피하고 안전한 길만 선택해왔던 것들 같은 것들이죠.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DNA MIX 기계 앞에 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덮으며 생각이 바뀌었어요.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그 열정을 잘 다스리기만 한다면 더 활력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겠다고 느꼈거든요. 더글러스 허버드가 DNA MIX 기계와 상관없이 어느 날 문득 잠자고 있던 트롬본에 대한 열정을 인정하고 용기를 내면서 경험하는 행복감과 충만감을 누군가는 DNA MIX 기계의 결과지를 통해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테스트 결과가 지금이 자기 모습 그대로 나오거나 한 학생처럼 ‘접착제’ 같은 게 나온다면 다소 의기소침해질 순 있겠지만요.

미국 남부에 위치한 디어필드라는 작은 마을, 식료품 가게에 DNA MIX 기계가 들어오면서 단조롭던 사람들이 일상이 바뀌기 시작해요. 볼 안쪽을 면봉으로 문지른 뒤 글자가 적힌 구멍 안으로 넣으면 곧 결과지가 나와요.

「더글러스 앨런 허버드. 눈 색은 갈색. 머리색도 갈색. 가능한 신장은 188센티미터. 가능한 체중 88킬로그램. 가능한 자녀 수 없음. 가능한 신분 ‘휘파람 부는 교사’」

이런 식으로 말이죠. 마술사, 인형 조종사, 제빵사, 왕족, 수영 국가 대표, 연인, 카우보이, 투수 등의 결과를 받아든 사람들은 당장 자기 신분에 맞는 옷을 주문하러 옷가게를 찾고 수영장을 만들고, 엄청난 습도와 더위 속에서 거구의 몸으로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요, 타인의 반응과 상관없이 여자들이 자기에게 빠질 거라는 자신감에 휩싸이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인기도 없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학생들이 이 결과에 집착하는 모습은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현재 자기 모습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니 더욱 결과를 맹신하게 되는 것 같았어요.

이런 사람들의 반응을 걱정스러워하는 고등학교 교사 더글러스는 갑자기 달라진 아내 셰릴린의 차에서 발견한 아내의 이름이 적힌 푸른 종이에서 ‘가능한 신분 왕족’을 발견해요. 둘은 제가 부러울 정도로 소문난 잉꼬부부예요. 그런 그들 사이가 ‘왕족’이라는 결과 하나로 인해 조금씩 틈이 생기기 시작해요.

더글러스의 학교 학생 제이컵은 쌍둥이 형 토비를 잃은지 얼마 되지 않아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예요. 운동선수에 잘 웃고 밝은 성격의 그야말로 인기남이었던 토비와 달리 제이컵은 포켓몬 마니아인 소극적인 아이였지만 둘은 더없이 좋은 친구이자 형제였어요. 토비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가 사고가 나던 날 옆에 있어 주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는 제이컵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음주운전 사고로 죽은 줄 알았는데 토비의 전 여친이었던 음침한 분위기의 트리나가 제이컵에게 형의 사고의 책임이 그 친구들에게 있다고 말하면서 접근해요. ‘복수’를 꾸미면서 혼란스러워하는 제이컵을 끌어들이려고 하죠.

트리나의 외삼촌이자 카톨릭 제단 고등학교의 신부인 피트는 마을 사람 모두의 고민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신앙심도 배려심도 유머러스함까지 나무랄데 없는 피트는 트리나의 불안전한 환경을 걱정하고 살피는데요. 아내를 잃고 아들을 잃은 제이컵의 아버지 행크 리슈 시장과 교사 더글러스와 즐거운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가던 길에 남의 집 창문에서 기어나오는 트리나를 보지만 못 본체 해요.

책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비극을 가지고 있어요. 셰릴린만을 짝사랑한 듀스의 입장에선 단 한번도 그녀에게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 엄청난 비극이죠. 아내와 아들을 연달아 잃은 행크, 쌍둥이 형제를 잃고도 슬픔 속에 홀로 방치된 제이컵,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고 있지만 단조로운 자신의 삶이 왠지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셰릴린, 트리나의 삶은 어디부터 비극이 시작된 것인지 찾아야 할 만큼 아프기도 해요. 그럼에도 이 책은 희망과 사랑과 소통과 꿈을 이야기하고 있어 매력적인 소설이에요. 월시의 전작 『마이 선샤인 어웨이』를 꼭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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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의 거장들 - 매 순간 다시 일어서는 일에 관하여
데비 밀먼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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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의거장
#데비밀먼
#한지원 옮김
#윌북



데비 밀먼은 16년 전 자비 프로젝트로 시작했던 <디자인 매터스>는 그녀의 열정과 센스와 노련미로 프로그램 계약을 갱신하고 프로그램의 평판이 높아져 지인이 아닌 디자이너들도 초대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400명의 게스트와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이어왔다. 뻔한 질문을 가장 싫어하는 데비는 한 인터뷰이에 대해 몇 주 전부터 하루 몇 시간씩 공부를 한다. 어떤 강의에서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미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비도 인터뷰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질문들로 흥미로운 인터뷰를 만들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내게 있어 최상의 인터뷰는 오로지 그들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을 했을 때 이루어진다....이제 <디자인 매터스>는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들의 삶을 창조하는 방법에 관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겠다.」 _16,17





#밀턴글레이저 ; 전설적이다. 기발하다, 지적이다, 독창적이다. 천진난만하다.

그를 묘사하는 수식어 중 나는 ‘천진난만하다’에 끌렸다. 『신곡』 중 「연옥」에 들어가는 삽화 작업을 하다가 ‘디자이너가 지옥으로 가는 12단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는 밀턴의 말은 어쩌면 천진난만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12단계는 ‘1.진열대 위에 놓았을 때 상품이 커보이도록 디자인하기’에서 ‘5.파괴된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강철을 이용해 이윤 목적으로 팔릴 9·11 기념품 매달 디자인하기’와 ‘7.영양가는 없고 달기만 한 어린이용 식품 포장재 디자인하기’를 거쳐 ‘12.인체에 치명적인 원료가 사용된 상품의 광고 디자인하기’로 끝을 맺는다. ‘천진난만하다’의 유의어를 보면 ‘순박하다’, ‘순수하다’ 등이 있다. 보통 상위 다섯 단계 근처에서 ‘여기서 더 가면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겠구나’하고 깨닫는다고 하니 밀턴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평소에 개인적으로 색소와 화학첨가물 덩어리 불량식품을 뜯기는 순간 쓰레기로 전락하는 온갖 휘황찬란한 포장까지 해 생산하는 업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그런 일을 맡은 디자이너의 윤리의식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모든 디자이너가 밀턴과 같은 단계에서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를 외친다면 좋겠지만, 영리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신디갤럽 ; <포르노 말고 사랑을 하세요> 비디오 공유 사이트와 섹스의 사회화

신디는 ‘죽음’만큼이나 ‘섹스’에 대해 말하기 꺼려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청소년들이 잠자리에서 가져야 할 상대에 대한 존중과 공감, 솔직함, 너그러움 등을 배울 기회가 없으며, 하드코어 포르노를 통해 잘못된 성교육이 이루어지게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성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고 ‘올바른 성 가치관을 가르칠 정도로 성에 개방되어야 성범죄를 막고 강간 문화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운영하는 <포.말.사>는 전적으로 사용자 생성 콘텐츠에 기반하고 현실 세계의 섹스를 예찬하는 곳이라 한다. 성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현실 부부, 연인의 섹스 동영상을 보여주는 사이트가 섹스의 사회화에 진정으로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어쨌든 초지일관 당당한 여성의 포스를 보여주던 신디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에 대한 그녀의 조언을 소개해본다.

「인생의 모든 것은 당신과 당신의 가치에서 시작해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지지하는지,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발견해보세요. 당신의 가치관을 결정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세요. 그러면 사는 것이 훨씬 쉬워진답니다. 인생은 여전히 당신에게 온갖 똥을 투척할 테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스스로에게 진실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법을 정확히 알게 될 거예요.」 _58




고작 ‘전설들’이라는 이름의 첫 part를 읽었을 뿐이다. 도저히 한 번의 피드로 리뷰를 끝내기 어려운 책이다. 남은 네 개의 part들은 후에 한 번 더 리뷰하기로 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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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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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73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진희가 화자였고, 화자가 곧 작가 자신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리 일찍 속이 찬 아이라도 이 모든 상황을 어른들처럼 이해할 순 없었겠지. 그럼에도 저자가 진희의 시선으로 모든 상황, 모든 사람의 내면을 낱낱이 훑어내는 것은 보호받아야 할 아이에게 주어지지 못한 어른들의 어른스러움을 비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진희의 시선으로 아프고 고통받고 소외된 모든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본다.

새의 선물이란 제목의 의미가 궁금했는데 독파 북토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것 모두가 의미 있는 의미있을테지만 말이다.

책의 첫 페이지에  -자크 프레베르의 '새의 선물' 전문이 소개되어 있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새의 선물을 받지 않는 모습이 마치 진희 같았다고 한다. 왜 씨앗을 받지 않는지, 세상의 위약과 위선에 대해서 진희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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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소설, 잇다 1
백신애.최진영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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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근대 시대를 반영한 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함께 읽는 시리즈 소설, 잇다의 출간은 너무나 반갑다. 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님의 뒤를 잇는 ‘2세대 여성 작가에 속하는 백신애 작가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최진영 작가의 콜라보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백신애 작가는 1908년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해설에서는 사회주의 운동가 오빠가 있었다고 나와 조금 혼란스러움)로 태어난다. 그는 적당히 학문을 익히고 좋은 집안에 시집을 가는 평온한 삶을 등지고 뜨거운 마음이 이끄는 방향대로의 삶을 선택한다. 사회주의 여성단체에 가입해 여성운동을 하고, 1926년 오로라를 보겠다고 시베리아를 방랑하다가 귀국길에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한다. 그런 그녀도 외동딸로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결혼을 하지만, 5년 만에 별거하게 되고 그로부터 1년 뒤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작품 안에서 이런 작가의 모습, 고민, 울분, 사랑 등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소신, 신념과 자식으로서의 도리 사이에서 느끼는 번뇌를 <혼명(混冥)에서>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보여준다.

 

나의 결혼은 하늘을 향하여 돌멩이를 던진 것과 같은 결혼이었어요. 그러면서도 나의 주위는 그 던진 돌멩이가 무사히 그대로 공중에 매달려 있을 기적을 신념하고 있었고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었지요마는_69.

 

화자는 어쩔 수 없이 한 결혼과 이혼, 이혼 후 조신하게 얌전하게 쥐죽은 듯이 살게 하려는 주변의 압박, 그래도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묻어둬야 하는 숨 막히는 심정이다. 그런 화자 가 옛 동지였던 ‘S’와의 우연한 세 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갈 용기를 얻는다. 소설 속에서 화자는 위병으로 고생 중이고 그것 또한 자신이 용기를 내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기에 ‘S’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피자 연구하고 얻은 결론을 말하기로 약속한다. 그 약속으로 화자는 건강도 회복하고 어머니를 설득하며 자기를 찾아 나간다. 만남을 앞에 두고 갑작스레 ‘S’의 죽음을 맞이한 화자, 슬프지만 당신이 두고 간 맹렬하던 의기의 한 조각죽는 날까지 힘껏 틀어잡고삶을 지탱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소설처럼 작가 백신애도 그러할 수 있었다면 지금 얼마나 훌륭한 작품들이 탄생했을지 모른다. 아깝다. 억지 결혼이 아니었다면, 식민치하와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으로서 더 강하게 느꼈을 억울함과 부당함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단명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아이고, 맙소사. 아이고, 빌어먹을 도둑놈. 네가 하느님이야? 도둑놈이지. 그만치 내가 정성을 들였으면 조금이라도 효험을 보여주어야 되지 않느냐?_34.

 

<광인수기狂人手記>의 한 대목이다. 시작부터 하느님에게 반말에 욕지거리를 퍼붓는 화자는 광인의 상태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나님을 그렇게 욕할 수는 없겠지..) 비가 모질게도 들이치는 다리 아래에서 걸레 같은 옷을 입고 추위와 배고픔에 벌벌 떨며 하느님에게 원망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말들로 화자의 사연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첫날 밤 그리도 다정하던 남편, 괴팍하고 못돼처먹은 시누이와 시어머니, 사회주의 운동으로 맘 졸이게 하던 세월을 버티고 나니 뒤늦게 바람난 남편. 그 현장을 급습하자 미친년 취급하며 꽁꽁 묶어 가둬버리는 남편의 행태에 미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

 

 

여자가 정말로 미치는 때는 남편의 배신을 알게 된 순간이 아니라 자식들이 걱정되어 남편이 있는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_해설 중에서

 

그렇다. 그와중에도 자식 걱정에 온전히 미치지도 못하는 게 여자고 엄마다. 그 부당하고 불합리한 시대를 거치며 자식들을 건사했던 우리 어머니들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_최진영

 

이 소설은 백신애 작가의 <아름다운 노을>30대 여성과 16세 소년의 로맨스에서 창안했다고 한다. 낯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사로잡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생각할 때 지금의 나를 엄습하는 단어는 가스라이팅, 스토킹 범죄, 그루밍 범죄, 데이트 폭력, 교제살인, 디지털 성범죄, 불법촬영...’ 여자와 남자의 로맨스에는 위험한 요소가 너무 많다는 우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밤엔 편의점과 펍에서 알바를 하고 낮에는 공부를 병행하는 20살 정규는 괜한 시비를 거는 거친 남자 손님에게서 자기편을 들어주는 또 다른 40대 여자 손님 순희와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되고 끌리게 된다. 저자는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느껴야만 하는 불안감, 두려움을 항상 안고 살아가는 정규를 통해 남성을 대할 때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게 되는 현실에 대해 꼬집는다. 동성으로서 느끼는 편안함을 넘어서 사랑으로 발전하는 모습은 존중할지언정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소설, 잇다를 통해 백신애 작가를 알게 되어 감사하다. 두 번째 소서, 잇다는 어떤 근대 작가와 현대 작가를 이어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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