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온라인 서점이 대세라지만
책냄새로 가득찬 오프라인 서점은
책 좋아하는 사람에겐 참 소중한 공간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오프라인 서점을 이용하려 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기도 했고
근처에 일도 있어서 잠깐 서점에 들렀다.

그리고 신간 코너서 책을 확인하는데...

헤져있는 모서리와 떼가 묻어 있는 표지에 책을 다시 내려놀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책을 유통되기에 모든 책이 깨끗하긴 힘든 일이라건 십분 이해하지만
그래도 난 이왕 살거면 깨끗한 책을 사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제목은 한국전쟁과 기독교라지만 사실 한국전쟁과 장로교라고 하는게 더 어울릴 듯 하다.
장로교 중에서도 특히 한경직 목사가 중심이 되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바로 내가 속한 종파이다.)의 역사가 중심이 되는 책이다.

한경직 목사님을 존경하고 예장 통합측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한기총에도 속해있지 않았고 극보수 근본주의 기독교들과도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 책은 예장 통합 측 역사의 어두운 면(소위 말하는 흑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 흑역사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과정이 예장 통합측에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예장 통합인이고(사실 옮길 다른 교파도 없다. 그나마 여기가 제일 낫다) 한경직 목사님을 존경한다.
뭐 그런게 역사니까....

2. 서북출신의 월남인들과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많은 부분에서 동일시 되어있다. 많은 부분서 싱크로율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좀 아쉽다. (싱크로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싱크로율이 높다는 건 사실이다.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사에서 서북지역의 부흥을 자랑스럽게 말하니까...)

3. 한국에서 기독교의 비율이 가장 낮은 곳이 제주도이다. 이 책을 보면 어느정도 납득이 간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서도 황해도 신천 출신의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치를 떠는 장면이 등장한다. 4.3 사건의 서북인들중 많은 수가 기독교인이었다면, 제주도는 앞으로도 기독교인의 공식적인 사과와 참된 회개 없이는 기독교인이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멘붕에 독서가 가능한가?
물론 어렵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책이라도 읽어야지....

멘붕을 극복하기 위해 꺼내든 책이지만,
이 책은 사실 멘붕 극복용이 아니라 멘붕 방지용이다.
그리스도인의 멘탈 강화 훈련법이랄까?

물론 아직 멘붕이란 단어가 없던 시절 이 책은 쓰여졌다.
하지만 책의 처음부터 책은 멘붕을 다루고 있다.
싱크홀....
멘붕이란 단어보다 멘붕이란 현상이 먼저 있었다.

내면세계가 질서 잡힌 이는 멘붕에 빠지지 않는다.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오랜 훈련과 그에 따른 성장만이 멘붕을 피하는 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회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생기 띤 목소리로 그날의 강의에 대해 말씀하셨다.
˝강사가 말하길 하나님의 생기에 잡힌 사람은 아프지 않는단다. 예수님을 봐라. 사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감기라도 걸리셨다는 구절이 없지 않니?˝

순간 내 머리 속에 떠올랐던 인물은 바로 `장미의 이름`에 등장했던 호르헤수사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감추기 위해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 악인이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감추기 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은 희극에 관한 책이었다.
그는 웃음을 경건치 못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책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 웃음을 경건치 못한 것으로 생각한 이유중 하나가 바로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어제 `창조 신앙과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제목의 강의가 있었다.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계기로 진화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쌓여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는 나의 고민들 중 하나였고, 내가 강의에 참석한 이유이기도 했다.

강의는 기대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강사께서 물리학자이셨던 관계로 강의의 대부분은 진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우주 탄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과 힉스입자는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위해서는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은 이 힉스입자가 없어야만 하는가?
성경 연대기 육천년을 부인하는 이 증거들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말하자면 호르헤 수사는 양립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이 증거들이 없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세상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여 책이 세상에 알려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살인까지 저지르면서도 차마 그 책은 없애버리지 못했던 호르헤 수사....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천문학, 지질학, 물리학, 생물학등)으로 진화하여, 호르헤 수사는 불에 타 죽었지만 그 정신은 밈으로 계승되어 아직도 이 세상에는 신앙과 과학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듯 하다.

아디오스!! 움베르트 에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성모독이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같은 신이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오래 참으시고 온유하시며 시기하지 않으시고 자랑치 않으시고 교만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런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같다니 신성모독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감히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오해되는 거짓신에 대해 생각해보자

 

1. 유대교의 유일신 ‘야훼’

그들의 신과 우리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은 이슬람의 알라와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만큼 당연하다.

그들도 삼위일체를 인정치 않고, 예수를 주라 시인하지 않고 있다.(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다른 것과 똑같은 이유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민족이 아닌가?

더 이상 유대교의 야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은 신이라고 말하지 말자.

 

2. 카톨릭의 하나님

베스트팔렌 조약은 최악의 조약이었다.

신교가 자신감이 있었으면 고작 30년 전쟁했다고 그렇게 냉큼 조약을 맺어서는 안되었다.

백년이 되는 이백년이 되든간에 진리를 지켰어야지 고작 30년 만에 상대를 인정하다니...

진리에는 타협이 없는 법이다.

더 이상 카톨릭의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혼동하지 말도록 하자.

 

3. 조지 부쉬의 하나님

하는 짓을 봐라...

이슬람과 뭐가 다르냐?(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힘이 있다는 점 정도가 되겠다.)

이슬람의 성전이라 일컬어 전쟁을 일으키고 조지부쉬는 있지도 않는 생화학 무기를 핑계로 무슨 ‘자유전쟁’을 일으켰다.

그런 인간이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 자처하고 다닌다.

기독교는 평화와 사랑의 종교가 아니던가?

더 이상 조지 부쉬의 하나님을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말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비유를 들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목사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장로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무슬림’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