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 어른을 위한 동화 14
재연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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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연스님의 어른을 위한 동화

 

 

 

"꼬마야, 마음에 새겨둬라!

결국 우리를 얽어매는 가장 질긴 사슬은 우리 가슴에 꼬물거리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자유는 외로운 것이란다."                                                   

 .....황소가 건네는 말

 

 

재연스님과의 만남은  이년 전,《달마 고양이》로 거슬러 올라 간다. 

이 책은 그보다 이 년이나 앞선 책이지만 이제야 읽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복잡할 때면 《달마 고양이》집어 들곤 위안을 구한다.

최근 이 책을 다시 집어 들고 덤으로 얻게 된 책이 바로《빼빼》이다.

 

'빼빼'는 《갈매기의 꿈》의 '조나단 리빙스턴' 과 같은 존재이다.

자신의 종족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벗어나 실존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빼빼마른 못생긴 아기 오리이다. 그래서 이름이 '빼빼'이다.

 

조나단 리빙스턴이나 빼빼는 둘다 창공을 높이 그리고 멋지게 날고 싶어 했지만 조나단은 그 꿈을 성공시켰고, 빼빼는 그렇지 못했다. '빼빼'는 날지 못하는 오리 아닌가.

날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 '빼빼'는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자기가 찾고자 한 모습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빼빼'는 날기를 꿈꾸며 떠도는 과정에서 수행자로서 거듭난 것이다.    

 

이 책은 '빼빼'가 '왜 날개가 있으면서 날지 못 할까?' 라는 의문을 품고 시작하는 험난한 여정의 이야기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 하나마다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다. 

물론 대견한 모습보다 얼굴을 붉혀야 하는 부끄러운 모습들이 더 많았다. 

 

빼빼는 나에게 말한다. '사랑과 우정, 그 신비로움에 대하여', 그리고 '언제까지 세상의 틀에 박혀 주어진 조건에 만족해 살아가는 집오리로 지낼거냐'고...

 

내 속에 조심스럽게 날아든 오리 한 마리. 이 녀석을 숨막히게 길들이고 싶지 않다.

창공을 향해 눈부신 날개짓을 하도록 날려 보내고 싶다. 그러나 용기가 부족하다.

자유를 갈망하는 만큼 방황이 두렵다. 그 만큼 짙어질 외로움에 뒷걸음 치고 있다.

 

그러나... 날려 보내야만 한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와 세계 곧, 나와 나 아닌 것들과의 관계를 꿰뚫어 보는 것이란다."

 

                                                                                      .....늙은 두루미가 건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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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이다 - 김홍희의 사진 노트
김홍희 글.사진 / 다빈치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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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작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인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인가?"
이 말을 접하고 난 뒤 이것은 나의 사진찍기에 있어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카메라를 들면 렌즈 속으로 들어 오는 빛처럼 이 말이 머리 속에 섬광으로 스친다. 물론 이렇게 거창하게 말한다고 해서 사진을 전업으로 하는 프로 사진작가는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을 좇고, 담는 아마추어일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있어 사진은 단순히 주위의 아름다운 추억을 담는 기록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카메라의 렌즈는 제2의 사유의 눈이 된 것이다.


김홍희 작가의 "나는 사진이다"를 통해, 이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봤다.
더불어 책을 읽는 내내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해 봤다. 그에게 있어 사진은 거울인 동시에 창문인 것 같았다. 작가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사진찍기가 '자기 치유의 한 과정'이라 밝혔듯이, 책을 통해 작가의 그런 일련의 고민의 과정을 그의 거울과 창으로 바라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자 오랫동안 머뭇거리던 셔터를 누른 기분이다. 이 셔트의 누름이 앞으로 서투른 나의 사진찍기에 어떤 결과물로 나올련지는 아직은 미지수이다. 그러나 그 느낌을 단편적으로나마 본문 중에 수록된 사진(2003년 네팔 카두만두의 몽키 사원에서 찍은 사진)속 한 구절을 인용해 나름대로 써 본다. "사진과 사진 사이의 간격, 글과 글 사이의 간격, 사유와 사유 사이의 간격"

 

 

작가는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하며, 그 전에 다양한 경험과 진지한 사유를 두터운 배경지식으로 깔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것이 수반되어야 어떤 피사체를 보았을 때 과감히 셔트를 누를 수 있고, 그 사유의 흔적이 사진 속에 남는다고 한다. 작가의 이 같은 말은 사진 가운데 꽃처럼 떠있는 그의 글들을 통해 쉽게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사유의 흔적을 나의 사진 속에서 충분히 담아 낼 수 있을까? 그것의 해답은 작가가 말하듯이 사진찍기가 육화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셔트를 눌러야 얻어질 것이다.


작가는 사진찍기를 일러 '손가락 끝으로 생각하기' 라고 했다.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들은 방바닥에 흩어 놓고 바라 본다. 무엇을 찍으려고 했을까, 이 사진들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가, 치유받기 원하는 상처는 무엇인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보고 있는가 등등 수많은 질문이 포화처럼 쏟아진다. 이 질문들은 당장 답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직도 답을 구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질문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의 힌트를 '나는 사진이다'를 통해 조금은 얻는다.


'셔터를 끊는 행위가 곧 그가 본 세계를 자신의 사유의 틀 속에 가두어 버리는 행위' 라고 말하는 사진의 숙명.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라면, 의미있는 사유의 틀에 가두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삶의 진실의 한단면을 짧은 운율로 풀어 낼 줄 아는 하이쿠의 명인들처럼,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결정적으로 담아 낼 수 있다면 나의 사진찍기는 신명을 얻을 것이다. 작가 김홍희가 전해주는 말들을 추임새 삼아, 나의 낡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즐거운 사진찍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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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만필
황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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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만필仁淑慢筆》
황인숙 作 / 마음산책 出 

 

 

분문 중에 '가장 휴가를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방금 휴가를 돌아온 사람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을 '가장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방금 마지막 책장을 넘긴 사람이다.' 고 쓰면 어떨까.

 

                     

 

'인숙만필'을 읽어 가는 내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질거렸다. 그 누군가는 이제 막 알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랜 추억을 공유하여 은근한 묵은내 나는 지인(知人)이다. 황인숙 시인의 속도 더딘 만담 같은 만필을 읽어 가면서 가끔 키득키득 거리기도 했고, '옳지' 맞장구 치기도 했다. 잠시 유년의 뒷골목에 되돌아 서서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라며 옛기억을 더듬었고, 생활 속에서 미처 챙기지 못 했던 소소한 것을 발견하는 놀라움도 맛보았다. '인숙만필'에는 마치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웃음 섞인 수다를 떨수 있는 친근함이 있었다. 또한 '무엇이 들었을까' 어린 가슴 조바심치며 설레게 하던 종합선물상자이기도 했다. 물론 '인숙만필'에는 여러가지 과자가 꿈처럼 담겨 있지는 않다. 그 대신에 특별할 것 없지만 사람 냄새, 웃음 냄새 나는 사람들의 풋풋한 이야기가 소복히 담겨 있어 즐겨웠다.

                                                                                                                              

나만은 비켜 갈 것 같았던 세월이 어느새 일찍감치 나를 관통해 버린 쓸씁한 사실과 마닥들일 때, 사람은 서글펴진다. 인생을 구십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의 삼분의 일을 살았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어중간한 시간이다. 이 어중간한 시간을 살면서 그나마 알게된 사실 하나, '모든 세상사에는 주기가 있다.'다. 이런 인생의 주기 어디 쯤에 있는 것일까. '인숙만필'에서 작가는 자신이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글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눈길은 분명 시인은 원숙의 단계에 발을 수줍게 디디고 있었다. 아직 한참 덜 익은 나에게 시인의 말들은 정신이 번쩍드는 회초리처럼 느껴졌다.

'울음, 눈물은 정말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상비약처럼 아껴둬야 된다'는 말에 뜨끔했다. 평소 눈물에 대해 그닥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서 일까. '흐르면 흘리는 거지' 정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였다. 가슴 찡한 것들을 보고 곧잘 눈물을 흐리기 때문이기도 할테다.  왠지 내가 흘린 눈물을 보고 값었다 할까봐 눈치가 보였다.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아 남을 위해 흘릴 수 있도록 눈물에 가치있는 희소성을 부여해야겠다.

 

작가가 스승의 부친상에 갔을 때, 그 부친을 두고 사람들은 젊은 시절, 바람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멋있는 평가인 것 같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겨야 한다지만, 구지 이름은 남기지 않아도 '그사람은 그랬었지.' 라는 따뜻한 회상과 안타까움은 남아야 한다. 먼훗날 세상을 등지게 되었을 때 남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까. 이것을 생각하니 느슨한 허리춤을 고쳐 메게 된다.

추억 속의 장소와 사람들은 세월이 가도 낡거나 늙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 속의 것들은 어제와 같은 것이 드물다. 이런 냉정한 사실과 부딪치는 것도 서글프다. 작가가 흔적만 남은 낯익은 장소와 잊혀져 가는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언젠가 십년 전에 살던 동네에 가 본 적이 있다. 제법 걸어야 건넜던 다리는 단 몇 걸음에 건널 수 있는 작고 좁은 다리였고, 대문을 두드리면 반갑게 웃어 줄 친구도, 그의 집도 흔적이 없었다. 추억은 현실 속에서 환영처럼, 환청처럼 그렇게 아득해져 있었다.

 

 

작가는 나이에 맞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를 알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이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래서 '아름답기'가 힘든 갑다. 그 나이에 맞게 잘 살지 못하는 나도 작가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부럽지만 가끔 나이를 망각한 채 살아가다 찌릿한 '나이듦'의 충격이 가져다 준 자극이 삶의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적어도 그것은 시인처럼 런닝머신 한 번 더 뛰게 하니 말이다.

작가가 풀어 낸 이야기 보따리 속에서 '사는 게 별거냐' 라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한 발은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에 딛고, 다른 한 발은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쌓이는 정(情)에 딛고 살아 가면 되지. 그러나 세상에 무디게 살지는 말아야지. 책을 덥고 오랫만에 시원하게 불어 오는 바람냄새를 맡는다. 시인의 말처럼 아주 먼 곳에 사는 인간들과 인간이 닿지 않는 먼 곳의 냄새를 듬뿍 지닌 바람이 불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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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나
C. 라자고파라차리 지음, 허정 옮김 / 한얼미디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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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최고의 시di-kvya'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라마야나>는 7편, 2만 4000시절(詩節)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하바라타>와 더불어 세계 최장편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학 작품의 저자는 BC 3세기 경의 시인 발미키(Vlmki)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그는 수세기 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글로써 엮은 편자(編者)이다. 이 작품의 성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략 BC 11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오늘날 전해지는 모습을 갖춘 것은 BC 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 전 7편 중 제1편과 제7편이 첨가되었다고 전해진다.

 

인도인들의 정서적, 종교적 생활에 토양과도 같다는 이 책은 얼핏 서양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빠진 이야기들, 아시아인들의 보편적 정서 같은 것이 <라마야나>에는 분명 존재했다. 그래서 더 쉽게 받아 들여 졌는지 모른다. 올림푸스의 신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때론 인간보다 더 치졸하고 욕정에 쉽게 휩싸이는 그들을 보곤 기가 찼다. 

 

이번에 읽게 된 <라마야나>는 인도의 저명한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였으며, 마하트마 간디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C. 라자지(본명 : 차크라바르티 라자고 파라차리)가 새롭게 창작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라마야나>의 수많은 판본 가운데 '소박한 문체, 독창성, 긴장감을 잃지 않은 표현력에 있어서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 받고 있다. 구지 이러한 평가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라마야나>의 대표적인 판본으로 일컫어지는 발미키와 캄반의 <라마야나>를 비교해가며 이야기를 풀어 가는 C.라자지의 <라마야나>는 쉽고 재미있는 한 편의 소설이다. 그가 이처럼 <라마야나>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쓴 데에는 인도의 문화가 고스란히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기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한 민족의 문화는 아이들에 의해 이어져 나간다. 그리고 이처럼 민족의 태반이 되는 그 이야기들은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전해져 그들의 무의식 깊이 뿌리내리고 그렇게 다음 세대의 피 속으로 이어진다.

 

                                            

산스크리스트어로 <라마야나>는 '라마가 걸어간 길'을 뜻한다. <라마야나>는 힌두교 3대 신(神) 중의 한 명인 비슈누(섭리의 신)신의 아바타(화신)인 라마의 이야기이다. 라마는 코살라 왕국의 제왕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다사라타 왕의 부당한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이복 동생 바라타에게 왕위를 넘겨 주고 그의 아내, 시타와 또다른 이복동생 략슈라마와 함께 14년간 변방의 숲 속으로 추방당한다. 라마는 아버지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모두가 그것을 바랬고 그의 아버지, 다사라타왕조차도 어쩔 수 없이 내리게 된 자신의 명령에 라마가 그렇게 하기를 바랬지만, 라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이것은 옳은 부모의 말씀조차도 한낱 비웃음으로 무시해버리는 요즘 세태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어떨결에 왕위를 물려 받게 된 바라타 역시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말하며 라마에게 그의 자리였던 코살라 유바라자(왕세자)가 되기를 간구하며 숲 속의 라마를  찾아 간다. 힘든 추방 생활에서 파수꾼을 자처하며 함께 떠난 략슈라마나 부당한 권력을 사양할 줄 아는 겸양을 지닌 바라타의 행동은 형제간의 우의나 신의를 생각케 한다. 고행자들은 괴롭히던 략샤사(마귀, 악마)들을 처치하며 숲 속에서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라마 일행은 13년 째 되던 해 커다란 시련을 맞게 된다. 란카(스리랑카)의 마왕 라바나(Ravana)에게 아내 시타(Seetha)가 납치된 것이다. 라마(Rama)는 시타를 구하기 위해 원숭이들의 왕 수그리바와 동맹을 맺고 특히 수그리바의 원숭이 장군 '하누만'의 큰 도움으로  마왕 라바나를 무찌른다. 마침내 라마는 온갖 고초 끝에 시타를 구한다. 한마디로 <라마야나>는 신들까지도 벌벌 떨게 하던 마귀의 제왕 라바나를 무찌르기 위해 비슈누 신이 여섯번째 아바타(화신)으로 환생한 인간 라마가 라바나를 처치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스릴넘치게 적은 대서사시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라마야나> 속 라마의 일생과 행적을 좇아가다 보면, 언제부터이고 우리게게 잊혀져 버린 君臣之義, 부자 간 지켜야 할 도리, 형제간의 우의, 부부 간의 애정과 정절, 善惡 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의무이자 힌두교의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르마(Dharma)를 깨우치기에 최고의 교과서이다. 이 다르마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책무'이다.

 

일설에 의하면 <라마야나>를 읽거나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죄와 슬픔으로부터 구제된다고 한다. 특히 어떤 재난을 피하고 싶거나 어떤 일의 성공을 기원할 때 인도인들은 '하누만'이 란카에서 겪은 탐혐을 다룬 시편인 <순다라 칸다>를 읽는다고 한다. 하누만이 란카에서 되돌아 올 때까지 발생한 모든 것을 적은 이 장을 읽으면 하누만이 성공한 것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냐며 피식거릴 수도 있지만. 기적이란 그것을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법이니 <라마야나>의 부적 같은 효험을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그런 인도인들의 소박한 믿음이 되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소박한 믿음은 단순한 흥미꺼리가 아닌 종교적 단계까지 심화 되었다고 하니 <라마야나>의 영향력은 가히 놀랄 만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예수에게도 인간적 고뇌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라마 또한 화신이었으나 <라마야나> 곳곳에 인간적인 고뇌가 눈에 띤다. 그들이 더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신이지만 인간적인 그들의 모습.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면서 그 인간적 고뇌가 최고조에 달했고, 라마는 라바나로부터 시타를 구하고 그녀와 마주하면서 인간적인 회의를 품었다. 혹시나 라바나에게 잡혀 있는 동안 정절을 잃지 않았는지...라마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온갖 고행과 유혹을 견뎌왔던 시타에게 라마의 그와 같은 행동은 더없는 모욕이었으리라. 시타의 자신의 결백을 중명하기위해 급기야 훨훨 타오르는 장작더미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다. 보통 이즈음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오해를 뉘우치며 아내의 옷깃을 잡아야 마땅하지만 라마는 끝내 묵묵부답이다. 라마의 회의의 정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이 광경을 보다 못한 천상의 신들이 내려와 시타를 장작더미에서 구해내며 라마가 비슈누신의 화신이며 시타는 락슈미 여신(복락의 여신, 비뉴수의 부인)의 화신임을 알려 준다. 그 뒷이야기는 대충 그렇고 그런 해피엔딩이다.  

 

라마는 다르마(Dharma : 종교의 가르침, 법, 정의,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의 모델로서 신성과 천국을 얻는 방법을 보여준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인도인들은 이런 그를 경애한다. 전설 속의 인물이 아닌 인도인들의 생활 속 깊이 들어 앉은 라마, 그래서인지 인도인들은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쳐 줄 때, '라무 라무' 라고 가르쳐 준다고 한다.

 

<라마야나>의 그 방대한 이야기를 딱 두 단어로 추려내라면, 바로 '다르마'와 '사랑' 이리라. 이 보편적 진리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보통의 인간에게도 있다는 신성(神性)이 자주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러한 신성이 드러난다고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동물처럼 본능대로만 살아 가려는 사람들이 점점 들어가는 세상에 이것은 효과적인 하나의 예방약이자 치료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라지푸트회화...

16∼19세기 전반에 걸쳐 북서인도에서 라지푸트 여러 왕후들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회화.

비슈누신 신앙과 깊이 연관되어 발달한 서민적인 종교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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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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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PHOTOCOPIES》

존 버거 John Berger 作/ 열화당 出

 

 

가을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키워드 가운데 이것만은 꼭 챙겨야 한다는 것, 이것이 빠지면 미처 챙겨 오지 못한 준비물 같을 것은 뭘까. 바로 여행과 책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의 동반자로서 선택사항 일 순위에 안톤 체홉의 단편집을 놓았다. '진정 마음이 맞는 여행길의 동무가 없다면, 차라리 홀로 여행을 떠나라.' 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이 구절은 자주 홀로 여행길에 오르는 나에게 하나의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난 그 길에서 완전한 혼자가 아니었다. 항상 내 옆구리에 앉아 부담주지않고 조용히 말을 건네는 '책'과 '음악'이 있었다. 이 친구들은 가끔은 단조로운 여행길에서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이 말없는 친구들이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을 성실하게 볼 수 있도록 눈까지 맑게 닦아 준다면, 이것은 더없이 멋진 여행의 동반자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읽은 존 버거의 '포토카피'가 꼭 그런 친구였다.

 

 

'포토카피'...이 책에는 존 버거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시각적인 문체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그들을 분석하지 않는다.  단지 순수한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할 뿐이다. 글로써 복사된 장면이지만, 그의 글을 읽어가면 마치 직접 사진을 들고 클로즈업 시켜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작가는 그 만큼 성실한 자세로 장면들을 치밀하게 표현해 냈다.

 

작가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런던 광장에서 병든 비둘기를 돌보는 사프카를 쓴 노숙자 여인, 팔리지 않는 부랑아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명성에 무관심한 채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오로지 그리기에만 몰두하는 무명 화가, 따뜻한 한 끼의 식사 초대에 생애 처음 받아 본 대접이라며 뜨거운 눈물을 흐리던 늙은 목동, 인도의 종교적 탄압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향하며 라이플총을 빗겨 매고 결국 혁명군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열 세살의 인도 소년, 1993년 러시아 유혈 사태 속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사프카를 눌러 쓴 한 소녀, 개인적 양심을 끝까지 지키며 '민중에게 권력을, 꽃을, 따뜻한 빵과 불꽃과 사랑을!'을 외치다 외롭게 죽어간 안티고네를 닮은 환한 검은 빛의 시몬 베유, 총과 펜을 메고 멕시코 민중을 위해 싸우는 사바티스타의 마르코스 부사령관 등... 문장과 문장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존 버거의 애정어린 눈길을 만났다.

 

작가는 스스로를 나름대로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고질적으로 유행에 뒤진 사람이라 말했지만, 먼지를 뒤집어 쓴 중고품에서 그것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을 얘기을 읽어 낼 줄 아는 존 버거의 시선은 이 가을, 청량함 그 이상을 것을 보게 한 좋은 길동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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