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 생일선물을 받았다는 소피를 찾는다. 스노클링 마스크를 받았다는 문구를 보고서야 찾을 수 있을 맘큼 카누 경기를 보러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북적인다.누가 일등을 할 지. 물 밖 사정만큼 치열한(?) 물 속 사정. 경기의 끝은 어찌 될지. 참지 못하고 스모쿨링 마스크를 쓴 소피 덕에 소피의 시선으로 물 속 사정을 살핀다.아이의 눈이라 엉망진창이 되러 버린 카누 대회에 낄낄 거릴 수 있었다. 어른의 눈으로 봤다면, 카누 경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가지 않았을까. 아이들에게 이 책은 공정한 경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다 읽어 냈다. 이게 시크한 멋이지. 하고픈 말을 문장으로 대놓고 써놓았다면, <노오올라운 카누 대회>를 읽는 재미가 그야말로 뚝 떨어졌으리라. 공정한 경쟁에 대해 말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이현 작가의 신작 《라이프 재킷》은 잡으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밖에 없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역시 끝까지 읽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을 가진 작가이다.마지막 책장을 덮고 적란운이 끝없이 밀려드는 푸른 여름 하늘을 먹먹하게 올려다 봤다. 바다가 가까이 있었다면, 아마도 수평선을 바라 봤겠지만. 아쉽개도 여기는 바다가 없는 곳이다. 저 망망한 바다 어디 쯤 천우신조호가 아직도 표류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우연도 겹치면 필연이 된다고 했던가. #우리요트탈래. 이 해시태그 하나 올리지 않았다면. 그걸 읽지 않았다면. 요트를 타지 않았다면. 《라이프 재킷》 만큼 ’만약’이라는 가정을 많이 한 책도 드물다. 그만큼 어처구니 없이 바다를 표류했던 아이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사고가 일어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천우신조호의 경우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책 제목이기도 한 ’라이프 재킷‘을 책임의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변명하는 사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현실 속 안타까운 대형 참사들 앞에선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을 지는 이가 없었다. 용서는 책임을 진 뒤에 이뤄진다. 진짜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라이프 재킷》 속 살아남은 아이들이 만들어 갈 다음 이야기가 긍금한 이유다.
열정이 무시되고 모험이 사라진 시대라는 요즘 그래서 판타지가 더 주목받는 것일까. 나 대신 열정을 존중받고 모험을 떠날 대상들이 있는 판타지는 그래서 매력적일까..연일 쏟아지는 폭우 그리고 사이 사이 찌는 폭염은 맑게 찰랑거리는 바다를 간절하게 한다. 이 바다는 실제 바다가 아니라 이상적인 바다 이미지에 가깝다. <마지막 지도 제작자> 를 읽는 동안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게 항해를 했다. 읽다 보면, 서서히 책 밖에 있던 내가 책 속에 있다. 다만 무게가 없는 존재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 공간을 가볍게 날아 다니는 기뷴이랄까.모험을 이야기 할 때, 책임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지도 제작자>는 이 흔하지 않은 모험에 따른 책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임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사람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상황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나도 안다. 사이. 나도 한때는 똑같이 말했으니까. 우리의 여왕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 위해 동서님북으로 함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내 장담하는데 우리 함선이 도달한 곳은 전부 다 이미 옛날에 발견된 땅이야. 발견한 사람이 우리가 아닐 뿐이지.(…)“파이윤 사부와 사이가 제작한 선더랜드 지도가 마지막이길 나 역시 빌어 본다..
세상이 음악으로 가득차 있다면!어때, 하루를 한 곡의 음악으로 상상해보면. <모두 다 음악> 속 자전가를 탄 아이 뒤를 따른다. 노란색 힌트를 놓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음악의 문외한이라도 귓가에 들려 오는 밝고 맑은 노란색을 닮은 곡 하나쯤 생각나 흥얼거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나의 하루가 음악으로 다시 보인다. 나의 하루 속에 숨어 있던 음악을. 내가 만든 하루의 음악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한다. 시선의 변화가 더 넓게 보이는 세상을 본다. <모두 다 음악> 을 읽고도 이런 경험을 못했다면, 다시 천천히. 세심히 귀를 기우리길. 장마다 새겨진 음악이 들릴 때까지.가만 보자. 어제는 바빴지. 포르테로 타악기로 연주되는 하루였지. 오늘은 어떻게 연주 될까. 하루에 귀를 기우려 본다.
어릴 적 빠지지 않고 보던 ‘들장미 소녀 캔디’. 그 캔디를 떠올리면 자동재생 되는 주제곡,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 그 때는 이 가사가 꽤나 멋져 보였는데. 살다보니, 독이였다. 캔디가 울지마라 노래하지 않아도 울음은 금기어였다. 울지마라, 뚝!울음에 멍이 든다는데, 그래서 울지 마라 했나. 사실은 울지 않아서 멍보다 깊은 상처가 생기는 줄도 모르면서. <눈물을 참았습니다> 속에서 눈물을 꾹 참아 오던 내가 보였다.첫째니깐, 어른이니깐, 엄마니깐. 그 때 그 때 울어야 했는데 울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갖다 대며 참았다. 가슴 속에 구덩이가 깊이 파이는 것도 모르고. 그래서 난 아이들에게 울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실컷 울어라.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울음도 웃음만큼이나 경험이 필요하다. 연습이 없으면 어색하다. 어색하지 않게 진짜 울음을 울 수 있도록 울어라 한다. 가슴 속에 못 운 울음으로 구덩이 파지 말라고.<눈물을 참았습니다> 속 울음은 그저 눈물정도 주루룩 흐르는 게 아니라 ‘엉엉’ 소리내어 온몸으로 우는 울음이다. 캔디야, 이젠 안녕! 눈물 한방울 남기지 말고 쏟아 낼 테니. 나만큼 나를 닮은 울음이 날 위로할테니. <눈물을 참았습니다> 가 건내는 위로와 응원을 꼭 부여 잡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