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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5년 3월
평점 :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PHOTOCOPIES》
존 버거 John Berger 作/ 열화당 出
가을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키워드 가운데 이것만은 꼭 챙겨야 한다는 것, 이것이 빠지면 미처 챙겨 오지 못한 준비물 같을 것은 뭘까. 바로 여행과 책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의 동반자로서 선택사항 일 순위에 안톤 체홉의 단편집을 놓았다. '진정 마음이 맞는 여행길의 동무가 없다면, 차라리 홀로 여행을 떠나라.' 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이 구절은 자주 홀로 여행길에 오르는 나에게 하나의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난 그 길에서 완전한 혼자가 아니었다. 항상 내 옆구리에 앉아 부담주지않고 조용히 말을 건네는 '책'과 '음악'이 있었다. 이 친구들은 가끔은 단조로운 여행길에서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이 말없는 친구들이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을 성실하게 볼 수 있도록 눈까지 맑게 닦아 준다면, 이것은 더없이 멋진 여행의 동반자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읽은 존 버거의 '포토카피'가 꼭 그런 친구였다.
'포토카피'...이 책에는 존 버거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시각적인 문체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그들을 분석하지 않는다. 단지 순수한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할 뿐이다. 글로써 복사된 장면이지만, 그의 글을 읽어가면 마치 직접 사진을 들고 클로즈업 시켜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작가는 그 만큼 성실한 자세로 장면들을 치밀하게 표현해 냈다.
작가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런던 광장에서 병든 비둘기를 돌보는 사프카를 쓴 노숙자 여인, 팔리지 않는 부랑아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명성에 무관심한 채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오로지 그리기에만 몰두하는 무명 화가, 따뜻한 한 끼의 식사 초대에 생애 처음 받아 본 대접이라며 뜨거운 눈물을 흐리던 늙은 목동, 인도의 종교적 탄압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향하며 라이플총을 빗겨 매고 결국 혁명군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열 세살의 인도 소년, 1993년 러시아 유혈 사태 속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사프카를 눌러 쓴 한 소녀, 개인적 양심을 끝까지 지키며 '민중에게 권력을, 꽃을, 따뜻한 빵과 불꽃과 사랑을!'을 외치다 외롭게 죽어간 안티고네를 닮은 환한 검은 빛의 시몬 베유, 총과 펜을 메고 멕시코 민중을 위해 싸우는 사바티스타의 마르코스 부사령관 등... 문장과 문장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존 버거의 애정어린 눈길을 만났다.
작가는 스스로를 나름대로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고질적으로 유행에 뒤진 사람이라 말했지만, 먼지를 뒤집어 쓴 중고품에서 그것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을 얘기을 읽어 낼 줄 아는 존 버거의 시선은 이 가을, 청량함 그 이상을 것을 보게 한 좋은 길동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