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만필
황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인숙만필仁淑慢筆》
황인숙 作 / 마음산책 出 

 

 

분문 중에 '가장 휴가를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방금 휴가를 돌아온 사람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을 '가장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방금 마지막 책장을 넘긴 사람이다.' 고 쓰면 어떨까.

 

                     

 

'인숙만필'을 읽어 가는 내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질거렸다. 그 누군가는 이제 막 알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랜 추억을 공유하여 은근한 묵은내 나는 지인(知人)이다. 황인숙 시인의 속도 더딘 만담 같은 만필을 읽어 가면서 가끔 키득키득 거리기도 했고, '옳지' 맞장구 치기도 했다. 잠시 유년의 뒷골목에 되돌아 서서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라며 옛기억을 더듬었고, 생활 속에서 미처 챙기지 못 했던 소소한 것을 발견하는 놀라움도 맛보았다. '인숙만필'에는 마치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웃음 섞인 수다를 떨수 있는 친근함이 있었다. 또한 '무엇이 들었을까' 어린 가슴 조바심치며 설레게 하던 종합선물상자이기도 했다. 물론 '인숙만필'에는 여러가지 과자가 꿈처럼 담겨 있지는 않다. 그 대신에 특별할 것 없지만 사람 냄새, 웃음 냄새 나는 사람들의 풋풋한 이야기가 소복히 담겨 있어 즐겨웠다.

                                                                                                                              

나만은 비켜 갈 것 같았던 세월이 어느새 일찍감치 나를 관통해 버린 쓸씁한 사실과 마닥들일 때, 사람은 서글펴진다. 인생을 구십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의 삼분의 일을 살았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어중간한 시간이다. 이 어중간한 시간을 살면서 그나마 알게된 사실 하나, '모든 세상사에는 주기가 있다.'다. 이런 인생의 주기 어디 쯤에 있는 것일까. '인숙만필'에서 작가는 자신이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글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눈길은 분명 시인은 원숙의 단계에 발을 수줍게 디디고 있었다. 아직 한참 덜 익은 나에게 시인의 말들은 정신이 번쩍드는 회초리처럼 느껴졌다.

'울음, 눈물은 정말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상비약처럼 아껴둬야 된다'는 말에 뜨끔했다. 평소 눈물에 대해 그닥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서 일까. '흐르면 흘리는 거지' 정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였다. 가슴 찡한 것들을 보고 곧잘 눈물을 흐리기 때문이기도 할테다.  왠지 내가 흘린 눈물을 보고 값었다 할까봐 눈치가 보였다.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아 남을 위해 흘릴 수 있도록 눈물에 가치있는 희소성을 부여해야겠다.

 

작가가 스승의 부친상에 갔을 때, 그 부친을 두고 사람들은 젊은 시절, 바람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멋있는 평가인 것 같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겨야 한다지만, 구지 이름은 남기지 않아도 '그사람은 그랬었지.' 라는 따뜻한 회상과 안타까움은 남아야 한다. 먼훗날 세상을 등지게 되었을 때 남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까. 이것을 생각하니 느슨한 허리춤을 고쳐 메게 된다.

추억 속의 장소와 사람들은 세월이 가도 낡거나 늙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 속의 것들은 어제와 같은 것이 드물다. 이런 냉정한 사실과 부딪치는 것도 서글프다. 작가가 흔적만 남은 낯익은 장소와 잊혀져 가는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언젠가 십년 전에 살던 동네에 가 본 적이 있다. 제법 걸어야 건넜던 다리는 단 몇 걸음에 건널 수 있는 작고 좁은 다리였고, 대문을 두드리면 반갑게 웃어 줄 친구도, 그의 집도 흔적이 없었다. 추억은 현실 속에서 환영처럼, 환청처럼 그렇게 아득해져 있었다.

 

 

작가는 나이에 맞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를 알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이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래서 '아름답기'가 힘든 갑다. 그 나이에 맞게 잘 살지 못하는 나도 작가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부럽지만 가끔 나이를 망각한 채 살아가다 찌릿한 '나이듦'의 충격이 가져다 준 자극이 삶의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적어도 그것은 시인처럼 런닝머신 한 번 더 뛰게 하니 말이다.

작가가 풀어 낸 이야기 보따리 속에서 '사는 게 별거냐' 라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한 발은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에 딛고, 다른 한 발은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쌓이는 정(情)에 딛고 살아 가면 되지. 그러나 세상에 무디게 살지는 말아야지. 책을 덥고 오랫만에 시원하게 불어 오는 바람냄새를 맡는다. 시인의 말처럼 아주 먼 곳에 사는 인간들과 인간이 닿지 않는 먼 곳의 냄새를 듬뿍 지닌 바람이 불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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