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숲과 그림책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이야기.숲과 그림책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이야기. 숲은 하나의 몸이다. 숲을 아는 것은 몸을 아는 것이고 몸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다. 몸의 감각을 깨우는 것은 제대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저, 크게 제한하지 않고 아이들과 숲속을 거닐다보면 숲이 걸어오는 말이 들리고 숲에게 걸고 싶은 말들이 솟아날 것이다. 숲과 그림책과 아이들의 행복과 충만한 삶. 이런 어휘가 결론처럼 남는다.
최근에 고독에 대해 가장 영감 깊게 읽은 책이다. 김규항 작가는 외로울 기회가 적기 때문에 고독하다고 했다. 아직 그 말이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 속에서도 외로웠으며, 그 외로움이 고독을 찾아 침잠하게 한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겠다.외로워야 고독할 수 있는 것인지, 외롭다고 다 고독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혼자가 혼자에게>를 읽으면서 고독의, 혼자의 풍성함을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결국 외부의 영향보다는 자기 자신의 내재된 힘을 켤 때 더 큰 변화를 맞이하리라..외부의 자극이 절대적일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교육의 환상이자 권력욕이 아닐까. 교육은 아주 작은 최소한의 것이라 생각한다. 톨스토이의 <서민 교육론>도 그의 농민에 대한 계몽적 교육 운동도 얼마나 유의미해 보였나. 그러나 그저 한순간을 흐르는 바람처럼 몰아쳤다가 사라졌다. <에밀>은 읽어도 <서민 교육론>을 읽으라는 말은 못 들은 것 같다.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춘기 아이들을 보아도 교육으로 아이들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한 걸음 물러나 아이의 혼자 됨을 지켜보아야할 시간이 왔음을 인정했다. 앞이 아닌 뒤에서 보는 아이들의 미래의 거울이 되기 위해 혼자서도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지금의 나와 주변부를 고려하여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능력이 있다.”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게 된다. 알고 나면, 그 이후는 달라진다. 사랑을 잘 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앎이 선행 된다. 잘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알아가는 성실을 발휘해야만 하는 것이다. 쉽게 얻어지는 사랑도 있지만 그게 익숙해지면 견디고 기다려주는 사랑을 하기 어려워진다. 고아로 자라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겠다는 어느 청년에게 김동호 목사님이 이런 조언을 했다. “반려 동물을 키워보라” 받음으로 사랑을 알기도 하지만 줌으로써 사랑을 알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장 사랑할 대상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 반려동물을 사랑해보라는-이들은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받은 이상을 돌려준다- 조언이 인상적이었다. 성경을 돌려준다는 말이, 사랑을 돌려준다는 말로, 삶을 돌려준다는 말로 읽힌다. 성경도, 사랑도, 삶도. 돌려받은 하루로 살아보자.
중3 남학생은 스토리는 재밌는데 결말이 별로라고 했다. 결국 진아와 동생이 아버지의 사망 신고를 무사히 하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해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냐. 해피 엔딩이고 해피한 시작이지. 수진은 다할 진과 나아갈 진을 한자로 써내려가며 다시 시작하지 않느냐. 젊은 날의 고생이 나이 들면 보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지만 삶이 내내 고단하다는 것을 눈물로 받아들이고 (노래방에서) 노래로 승화시키지 않았냐. 전독시(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웹소설)와 같은 이야기의 판타지성과 극적인 구성 등 그 자극적인 맛에 너무 취해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결국엔 우리가 살아가야할 생의 고단함을 외면하고 회피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삶의 핍절함을 자주 들여다보아야한다. 그 필절함의 이유도 선명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은 고단하다. 쓴맛의 덩어리에 자꾸 설탕만 처발라서 단 것인양 삼키면 안 될 거다. 심심한듯한 전개의 진진, 칙칙한 만화체(?)의 진진. 같은 삶의 모습은 표면적으로 같을지 모르지만 어떻게 의미를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새롭게 쓰여지는 진진. 진아도 수진도 이 시대의 표상이다. 이 두 여성에게서 무수한 나를 발견한다. 통념과 길게 이어져 온 차별과 배제, 무례함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인간성을 훼손하고 소외 시킨다. 화려한 그늘과 기교 넘치는 가면에 가려진 일상을 통찰해야 한다. 또한 흥진비래(興盡悲來)의 시간과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크고 작은 반복에 지치지 말아야한다. 아니 지쳐도 된다. 그 지침을 함께 할 사람들이 있길 바란다. 나에게도 내가 필요한 누군가에게도.
“학습보다 중요한 것은 양육”이 둘의 큰 차이는 기능 강화이냐, 잠재력과 재능 계발이냐의 차이이다. 당연히 후자가 우선이고, 후자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부모와 교육자과 학생의 연합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식상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말이기에 안타까운 지점이다. 부모,교육자가 우순 자신의 소질과 재능에 관심을 갖고 성장 시킬 때 학생의 소질과 재능을 발견하고 도울 수 있다고 한다. 가르침에 대한 옳은 자세, 타고난 본능을 지키고 키우면서 전인적 인간으로 양성할 수 있는 과학적 접근과 방식이 무척 선명하게 제시 되어 있다. 무엇이든 단 한 영역이라도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면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