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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황경신의 한뼘노트
황경신 글, 이인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4월
평점 :
[에세이/서평]「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꼭꼭 씹어먹는 맛있는 문장

노래를 들을 때도 내 마음이 원하는 '듣기'는 항상 다르다. 어떨 때는 감성적인 가사에 집중해 그 안에 이야기를 만들며 듣고 싶기도 하고 어떨 때는 신나는 비트에 맞춰 흥을돋구고 싶다. 그런가하면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을 따라서 벅찬 느낌을 맛보고 싶기도 하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압도적인 이미지에 꼼짝없이 묶이고 싶을 때가 있는가하면 치밀한 구성에 혀를 내두르고 싶은 때가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지고 싶을 때, 잔잔한 에세이에 취하고 싶을 때... 그 외.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는 어떤 상황에 어울리는 책일까? 작가의 문체, 그가 선택한 단어로 이루어진 그 절묘한 문장 자체를 즐기고 싶을 때라면 적당하다. 이미지가 있는가하면 이야기도 있고 알것 같으면서도 추상이 과한 느낌이 드는 이 시인지 소설인지 모를 책은 문장을 즐길 때 가장 좋게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이 발현하는 순간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감정, 불현듯 불길로 솟아오르는 마음이나 물길을 만들며 흘러가는 느낌이 심장에 새겨질 때, 또는 시간의 무수한 겹이 쌓여 층을 이루고 그것이 어떤 아름다운 무늬로 완결될 때, 그리고 사람의 생에 촘촘하게 박힌 슬픔이나 결핍 같은 것이 노래나 춤, 그림이나 글로 모습을 드러낼 때.
P. 6
이 책의 문장은 꼭 밥알 같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밥은 맛없어" 라고 투정 부리면 엄마는 오래 씹으면 맛있다고 나를 달랬다. 밥알에 들어 있는 녹말 성분이 녹으면서 단맛이 퍼지기 때문이라고 아주 오랜 후에 배웠다. 황경신의 문장은 곱씹을 수록 맛있다. 소설 창작을 배울 때 묘사의 감각이 트이지 않은 습작기 작가, 학생들에게 교수님은 이런말을 했다. 오로지 묘사밖에 쓸 게 없다는 듯이 묘사로만 글을 써라. 황경신은 오랜 시간 농익은 글로 습작기 작가처럼 그렇게 묘사밖에 모르듯이 책에 채워넣었다. 문법 같은건 안중에도 없다는듯이 그저 지금 그 문맥 사이에 하고 싶은 말이나, 절묘하다 못해 짜릿하기 까지 한 단어나 표현을 끼워 넣은 글은, 내용과 관계없이 즐거움을 준다. 도무지끊기지 않고 계속 템포를 이어나가는 독특한 문체는 '문장은 짧게 쓸 것' 이라고 말한 헤밍웨이를 무색하게 할 지경이다.
지난 일기장을 들춰본 적이 없다. 이미 아는 이야기인데, 굳이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의 인생 정도는 다 기억하고 있다고 .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살아온 길이 흐려졌다. 닦아도 닦아도 김이 서리는 유리창 너머에서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보는 것처럼, 무관하고 무의미해졌다.
P. 82
거의 모든 책은 출판한다. 출판되는 책의 목적은 바로 소통이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걸 글로 적어 너에게 전달하겠다, 라는 목적을 지닌 게 바로 책이다.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라는 제목은 제목부터 바로 책의 본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소통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마다 내는각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칫 소음이 될 수 있는 무질서함을 글로 바로 잡아 멋진 화음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항시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창조의 그 '무엇'들, 인간이 만들어 내고 있는 '근사함' 전부를 황경신은 들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글로, 책으로 표현한다.
무언가를 조율한다는 것은, 의견이나 삶을 조율한다는 것은, 다른 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고유한 음을 찾아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므로.피아노의 팽팽한 현을 잡아당겨, 도로 태어난 건반이 도의 소리를 낼 수 있또록 조율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도인 당신과 미인 내가 한 음 높아지고 한 음 낮아져 레가 되는 것이아닐, 당신은 당신의 소리로 빛나고 나는 나의 소리로 당신의 세계를 밝혀, 멜로디는 화음이 되고 화음은 노래가 되고 노래는 시가 되어주기를, 이렇게 우리 하나의 세계에 담겨, 어깨를 나란히 하고.
P.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