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전집 2 다시 읽는 우리 문학 2
이효석 지음 / 가람기획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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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학 시절 읽었던 이효석의 소설들을 다시 펼쳐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가을 저녁의 공기를 먼저 떠올렸다. 그것은 특정한 장면이나 문장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문장들이 품고 있는 어떤 온도 같은 것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이효석의 세계는,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입체적이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이효석을 '서정적 작가'로만 기억해왔다. 메밀꽃이 피는 달밤의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해서, 그의 다른 면모들을 가려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집을 통해 만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서정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작품을 쓰던 청년이 어떻게 자연과 감각의 작가가 되었을까. 이 변화를 '전향'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오히려 그는 현실을 보는 방식을 바꾼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접근하는 경로를 바꾼 것은 아니었을까. 정치적 언어 대신 감각의 언어를 선택했고, 이데올로기 대신 인간의 내면을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었을 것 같다.

이효석의 문장을 읽다 보면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시간은 오히려 천천히 흐르거나 정지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소설에서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겪는 인물의 내면이 어떤 색깔로 물들어가는가 하는 것이다. 향나무가 시들어가는 장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 머루를 먹으며 느끼는 행복감과 그 직후 찾아오는 불행의 예감.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처음 발견한 순간의 놀라움. 이효석은 이런 순간들을 포착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의 문장은 사진처럼 순간을 고정시키면서도, 동시에 그 순간 안에서 흐르는 감정의 물결을 놓치지 않는다. 대학 시절에는 이런 문장들이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으니, 그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씁쓸함이 보인다. 이효석이 그린 세계는 결코 목가적이지 않다. 그곳에는 늘 상실이 있고,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으며, 행복과 불행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맞닿아 있다.

전집 속 여러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탐구다. 그런데 이효석이 그리는 사랑은 낭만적이기보다는 실존적이다. 7년을 짝사랑한 끝에 내린 결론이 "외롭고, 적적하고, 얄궂은 것"이라는 문장은, 사랑의 본질이 결핍과 거리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지만 닿지 못한다. 하늘 위의 별처럼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존재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이것은 단지 연애소설의 문법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독에 대한 통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효석이 이런 비극적 정서를 다루면서도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문장에는 체념이 아닌 수용이 있고, 절망이 아닌 애잔함이 있다. 닿을 수 없기에 더 아름답다는 역설. 이것이 그의 서정성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이효석의 소설에서 자연은 인물의 감정과 공명하고, 때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처럼 행동한다. 메밀꽃이 피는 밤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이 열리는 시간이다. 머루 냄새가 가득한 집은 행복의 공간이자 동시에 불행이 잠입할 틈새다. 대학 시절에는 이런 자연 묘사가 다소 과장되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문학적이고, 너무 의도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이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효석에게 자연은 인간의 감정을 투사하는 스크린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를 증폭시키고 변형시키는 매개였다. 그가 묘사하는 자연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막연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냄새와 촉감과 소리를 가진 실재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단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효석을 향토 작가로만 이해하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그는 당대 가장 세련된 도시적 감각을 가진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서양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 근대 문명에 대한 예민한 감각,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 이 모든 것이 그의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가 전통과 근대를 대립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향토적 배경과 도시적 감수성은 그의 작품에서 이질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것은 단순히 두 세계를 병치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학적 영토를 개척한 것이다. 거울을 보는 원숭이의 비유를 통해 자기 인식의 탄생을 설명하는 대목이나, 사랑의 본질을 교육적 행위로 승화시키려는 인물의 독백 같은 장면들은, 이효석의 지적 깊이를 보여준다. 그는 단지 감각적인 작가가 아니라, 사유하는 작가였다.

이효석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형식에 대해 고민한 작가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전통적인 플롯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고, 인과관계보다는 정서의 흐름이 구조를 지배한다. 나폴레옹을 다룬 작품 같은 경우, 역사 소설도 전기 소설도 아닌 독특한 형태를 취한다. 1인칭 회고 형식을 통해 역사적 인물을 내면화하는 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실험이었을 것이다. 이효석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에 맞춰 형식을 자유롭게 변형시킬 줄 아는 작가였다.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의 찬사다. 그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관습에 안주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경계를 시험했다. 그의 산문은 시와 소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며, 바로 그 애매함 속에서 독특한 미학을 창조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십여 년이 흐른 지금, 이효석을 다시 읽으며 드는 생각은 문학의 생명력에 관한 것이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청춘의 감수성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상실감과 그리움의 깊이가, 이제는 조금 더 가슴에 와닿는다. 이효석이 그린 세계는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 감정의 지도다. 사랑의 불가능성, 행복의 덧없음,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위로. 이런 것들은 시대를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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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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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겨울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었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보이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얼음 아래로 물이 흐르고, 얼어붙은 나무 가지 안에서 수액이 조금씩 이동하며, 땅속 깊은 곳에서는 뿌리들이 봄을 준비한다. 클레어 키건의 첫 단편집 <남극>을 읽는 경험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표면은 고요하고 차갑지만, 그 아래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1999년에 처음 출간된 이 작품집을 손에 들었을 때, 나는 이미 키건의 후기작들을 통해 그녀의 문장이 지닌 힘을 알고 있었다. <포스터>와 <작은 것들이 빛나는 순간>에서 보여준 그 절제된 문체, 한 단어도 허투루 쓰지 않는 정교함, 그리고 독자에게 여백을 남겨주는 관대함. 그런데 그녀의 데뷔작을 읽으며 나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이미 그 시작점에서부터 키건은 완성된 작가였다는 것을. 물론 후기작들에서 보여준 극도의 절제와 완벽함에는 미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첫 작품집에는 젊은 작가의 실험정신과 대담함,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구석을 들여다보려는 용기가 있었다.

나는 이 책을 늦은 밤에 읽었다. 집 안은 조용했고, 창밖으로는 간간이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한 편 한 편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키건의 이야기들은 결코 큰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속삭이듯 조용히 다가와, 어느새 독자의 가슴 한편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 울림이 사라지지 않는다. 15편의 단편 중 일부는 아일랜드를, 일부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배경이 어디든, 키건이 탐구하는 것은 동일하다. 인간 관계의 복잡성,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무게,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몸부림. 특히 여성들의 삶에 대한 그녀의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냉철하다. 동정이나 미화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저항과 희망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표제작 「남극」을 읽으며 나는 처음에 혼란스러웠다. 왜 하필 '남극'이라는 제목일까? 이야기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여성의 일탈을 그린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는 문득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면 어떨지 궁금해진다. 이것은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다. 단지 경험하지 못한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 자신이 살지 않은 또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 때문이다. 그녀는 다음 주말에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마치 오랫동안 미뤄왔던 여행을 떠나듯, 마치 너무 늙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처리하듯. 키건은 이 여성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걷는 도시의 풍경, 차가운 공기, 얼음처럼 단단해진 거리를 통해 그녀의 심리를 드러낸다. 빛이 빠져나가고 어둠이 밀려오는 황혼의 묘사는 단순한 시간적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넘어서려는 경계, 익숙한 삶에서 낯선 영역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의 불안과 떨림을 상징한다.

바에서 만난 남자와의 대화는 평범하다. 그들은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함께 밤을 보낸다. 키건은 이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다음날 아침의 감각, 낯선 침대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어색함과 혼란을 통해 독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 만남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 불안은 점점 커지고, 도시의 차가운 밤 풍경은 위협적으로 변한다. 키건은 결말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독자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나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저 불안과 공포의 가능성만이 남을 뿐이다.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남극'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이해했다. 남극은 지구상에서 가장 차갑고 황량한 곳이다. 인간이 살 수 없는, 생명이 존재하기 어려운 극한의 공간. 이 여성의 일탈은 어쩌면 그런 곳으로의 여행이었는지 모른다. 따뜻하고 안전한 일상에서 벗어나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거기에는 낭만이나 자유가 아니라 얼어붙은 고독과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의 욕망과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 사이의 긴장. 키건은 이 주제를 비난이나 교훈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섬뜩하다. 20세기 중후반 아일랜드 사회에서 여성의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부엌에서 닭을 채우고, 파슬리를 다듬고, 일요일 경기의 소음을 참아내는 것. 남자들로부터 격리되고, 숨겨지고, 문제가 되지 않도록 관리되는 존재다. <노래하는 계산원>에서는 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공짜 생선 소포를 받기 위해 으스스한 우체부와 관계를 맺는 젊은 여성 코라. 이 이야기는 코라의 어린 여동생의 시선으로 전달되는데, 그 순진한 목소리가 상황의 추악함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우체부가 올 때마다 심부름을 나가야 하는 화자는, 집에 돌아와서 냄새를 맡는다. 끈적해진 잠 같은, 오트밀이 넘쳐흐른 듯한 냄새. 키건은 직접적인 묘사를 피하면서도 모든 것을 느끼게 만든다.

키건의 이야기들은 처음에는 조용하고 절제되어 있어 평범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독자를 부드럽게 이끌어 그 리듬에 맞춰 걷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울리는 소리들을 듣게 된다. 말하지 못한 것들, 억눌린 욕망들, 폭발하지 못한 분노들이다. <남극>은 재능 있는 작가의 초기작이 지닌 모든 매력을 담고 있다. 아직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생생하고 대담하다. 이후의 작품들에서 보여줄 완숙함의 씨앗들이 여기 있고, 동시에 다시는 시도하지 않을 실험들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추위를 느꼈다. 그것은 아일랜드의 겨울 바람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냉혹함, 가부장제의 얼음장 같은 구조,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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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 풍수다 - 대자연활용법 창조론
박무승 지음 / 집사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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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데이터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미신으로 치부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현상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현대인들은 여전히 '운'을 믿는다. 취업 면접을 앞두고 미역국을 피하고, 중요한 시험 전날 엿을 먹으며,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도 결국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번에 박무승 저자의 저서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풍수라는 것이 묘 자리만을 정하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세계관이라는 점이었다. 저자는 개인의 운명부터 국 가의 흥망성쇠까지 모두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극도로 개인주의화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연결성에 대한 통찰처럼 느껴진다. 현대인은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여긴다. 에어컨과 난방으로 사계절을 무력화시키고, 인공조명으로 밤을 낮처럼 바꾸며, 온라인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는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풍수가 말하는 '자연과의 조화'는 어쩌면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할 근본적인 생존 원리일 수도 있다.


저자는 풍수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1994년 방송 프로그램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기전달을 정자 실험으로 입증했다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전통 지식을 현대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도 든다. 과학적 증명이 되지 않으면 풍수는 가치가 없는 것일까? 서양 과학은 재현 가능성과 보편성을 중시한다. 같은 조건에서 실험하면 누가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고, 시공간을 초월해 동일한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풍수가 말하는 '명당'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맥락 의존적이다. 특정한 산의 형상, 특정한 방향, 특정한 가문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서양 과학의 패러다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론이다. 조선 왕릉 이야기는 이런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당대 최고의 풍수가들이 선정한 왕릉이었지만, 27명의 왕 중 단 7명만이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 저자는 이를 중국 풍수의 한계로 설명하지만, 다르게 보면 권력과 정치라는 인간사의 복잡성이 자연의 법칙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아무리 좋은 명당에 묻힌다 해도 당파 싸움, 외세의 침략, 역병과 기근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풍수가 미신으로만 치부되지 않고 천 년 넘게 한반도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신행정수도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도 ' 배산임수' 라는 이름으로 풍수적 요소가 고려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자연 조건이라 불렀지만, 그 뿌리는 분명 풍수 사상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풍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변형된 채로 살아있는 것이다.


책에서 불편했던 부분은 극단적인 운명론이다. '운이 구, 노력이 일‘이라는 주장은 개인의 노력과 선택을 거의 무의미하게 만든다. 조상의 묘 자리가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논리는, 현대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우리 시대는 '자수성가'와 '노력의 배신'이 공존하는 시대다. 한편으로는 흙수저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가 지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 찬스와 금수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풍수의 운명론은 이 불편한 진실, 즉 출발선이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인정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보다 더 솔직한 세계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위험할 수 있다. 만약 모든 것이 조상 묘 자리로 결정된다면,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불행은 운명이므로 받아들이고, 행복은 조상 덕분이므로 감사하면 되는가? 이는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를 무력화시키고, 사회 변화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동시에 '대자연 활용법'이라는 능동적 개념을 제시한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활용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순전한 숙명론과는 다르다.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결국 풍수는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했던 부분은 '장소가 힘을 갖는다'는 생각이다. 풍수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와는 별개로, 특정한 장소가 특정한 감정과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으로 안다. 산속 계곡에 있을 때와 도심 빌딩 숲에 있을 때 느껴지는 기분은 분명히 다르다. 어떤 집은 들어서는 순간 편안함을 주고, 어떤 공간은 이유 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현대 건축과 도시계획도 이런 장소의 힘을 인정한다. 채광, 통풍, 조망권, 녹지율 같은 개념들은 결국 사람이 특정 환경에서 더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풍수가 말하는 '배산임수'는 이런 환경심리학적 원리를 수천 년 전에 이미 직관적으로 파악한 것일 수 있다. 등 뒤에 산이 있으면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앞에 물이 있으면 시야가 트여 개방감을 준다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관찰이다. 문제는 이를 개인의 운명이나 국가의 흥망과 직결시킬 때 발생한다. 청와대 터가 명당이 아니어서 대통령들이 불행했다는 주장, 삼성 창업주 묘의 위치가 그룹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분석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는 정치적 판단, 시대적 상황, 우연한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재벌의 흥망도 경영 전략, 기술 혁신, 시장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가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어쩌면 좋은 환경이 심리적 안정을 주고, 그것이 더 나은 의사결정으로 이어지며, 장기적으로는 성공 확률을 높이는 간접적 영향은 있을 수 있다. 명당에 묻혔다는 믿음이 후손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그것이 실제로 더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이어진다면, 이것도 일종의 '효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저자가 40년간 연구한 결과를 집대성했다는 사실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전통 지식을 계승하고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특히 도선 대사로부터 이어진다는 ' 신안계물형설 '이 한국 고유의 풍수 전통이라는 점은 문화사적으로 중요하다. 중국에서 유입된 지식을 한반도의 지형과 문화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라면, 모방이 아닌 창조적 수용의 역사다. 그러나 전통을 보존하는 것과 그것을 절대적 진리로 주장하는 것은 다르다. 저자는 석가, 공자, 예수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대자연 활용법'이 노벨상급 발견이라고 주장한 다. 이런 과도한 자신감은 오히려 풍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 풍수는 하나의 문화적 렌즈이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만능 이론이 아니다. 더 생산적인 접근은 풍수를 환경 인문학의 한 갈래로 보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땅을 어떻게 읽었고,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그것이 삶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말이다. 현대의 환경 위기 시대에 자연을 단순한 자원이 아닌 생명력 있는 존재로 보는 풍수적 관점은 생태 주의와 접점을 찾을 수 있다.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가 심각한 지금, '대자연 활용법'이라는 개념은 새롭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이해하고 조화롭게 사는 방법. 단기적 이익이 아니라 장기적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는 태도. 이런 방향으로 풍수 사상을 재조명한다면, 21세기에도 충분히 의미 있는 지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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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는 힘 - 일을 끝내고 성장을 시작하는 끝맺음의 기술
양은우 지음 / 경이로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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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상 서랍을 열면 반쯤 쓴 노트들이 나온다. 첫 페이지는 언제나 깔끔하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색색의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열심히 기록한 흔적들. 하지만 5페이지, 길어야 10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나머지는 백지다. 새해 다짐으로 샀던 다이어리도 마찬가지다. 1월은 빼곡하지만 2월부터 성기고, 3월이면 아예 공백이다. 이런 풍경이 나만의 것은 아닐 거라 확신한다. 우리는 모두 '시작의 천재'이자 '완성의 초보자'다.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의 설렘은 누구나 안다. 문제는 그 설렘이 식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또 다른 시작을 꿈꾸며, 이전의 미완성을 애써 잊으려 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들은 정말 잊혔을까? 아니다. 끝내지 못한 일들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은근히 우리를 괴롭힌다. 보이지 않는 짐처럼 어깨를 짓누른다.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마다 "이번에도 어차피.."라는 속삭임이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흔히 '끝'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 성공 아니면 실패. 완수 아니면 포기. 하지만 현실의 끝맺음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어떤 일은 성공적으로 완료되기도 하지만, 어떤 일은 의도적으로 중단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일은 그냥 흐지부지 사라지기도 한다. 문제는 세 번째 경우다. 명확한 중단의 선언 없이, 그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것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형태의 '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환상을 남겨두면서, 동시에 지금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가 일주일 만에 그만둔 경험이 많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루를 넘기고, 그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된다. 결국 운동화는 현관 구석에서 먼지만 쌓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는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다. 이렇게 애매하게 남겨진 일들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정신적 여유 공간은 좁아진다. 컴퓨터로 치면 백그라운드에서 계속 돌아가는 프 로그램 같은 것이다. 겉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리소스를 소모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끝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완벽주의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100%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70%쯤 진행된 일도 "이 정도로는 부족해"라며 멈춰버린다. 하지만 여기엔 역설이 있다. 완벽을 추구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하는 것과, 불완전하더라도 하나를 끝내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을까? 후자가 훨씬 가치 있다. 왜냐하면 끝을 내본 경험 자체가 다음 시도의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초고는 쓰레기여도 괜찮다." 중요한 건 일 단 끝까지 써내는 것이다. 고치고 다듬는 건 그다음이다. 완성되지 않은 글은 아무리 좋은 문장이 들어있어도 글이 아니다. 반면 서툴더라도 끝맺음이 있는 글은 최소한 글의 형태를 갖춘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불완전한 실행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행 과정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머릿속 계획은 아무리 정교해도 실제 세계의 변수를 담아낼 수 없다. 부딪혀보고, 넘어져보고, 그래도 끝까지 가본 사람 만이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다.

반대로, 때로는 중단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 모든 일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상황이 바뀌었거나,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확한 중단'이다. "이 일은 여기까지 한다. 왜냐하면.."이라는 선언이 필요하다. 그냥 흐지부지 놓아버리는 것과, 의식적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프로젝트를 중간에 그만둘 때도 마찬가지다. 실패했어, 창피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포기하는 대신, "이 프로젝트는 여기까지 진행했고, 이런 이유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정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고, 다음에는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지를 기록으로 남긴다. 이렇게 의식적인 마무리를 하면 두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그 일에 대한 미련이 깔끔하게 정리된다. 마음 한구 석에 찝찝함이 남지 않는다. 둘째, 실패에서도 의미를 건진다. 단순히 ’안 됐던 일'이 아니라, '이런 것을 배운 일'로 재정의된다.

거창한 목표의 완성만이 마무리는 아니다. 오히려 일상 속 작은 끝맺음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정리하는 것, 저녁에 설거지를 끝내고 싱크대를 닦는 것, 읽은 책을 제자리에 꽂는 것. 이런 사소한 행동 들이 쌓여 '마무리하는 습관'을 만든다. 작은 일을 끝내는 경험이 쌓이면 큰 일을 끝낼 수 있는 체력이 생긴다. 마치 근육을 키우는 것처럼, 마무리 근육도 훈련이 필요하다. 매일 조금씩, 작은 것들을 완결시키는 연습이 결국 큰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힘으로 이어진다. 또한 작은 마무리는 즉각적인 성취감을 준다. "오늘 할 일"을 모두 체크하고 하루를 마감할 때의 뿌듯함. 그 감정이 내일을 시작하는 에너지가 된다. 반대로 미완의 것들이 쌓이면 무기력이 찾아온다.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일까"라는 자책이 시작되고, 그 자책이 다시 실행력을 떨어뜨린다.

마무리는 자기 신뢰의 문제다. 내가 시작한 일을 내가 끝낼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이 있어야 새로운 도전도 가능하다. 끝내지 못한 일들이 많아지면 스스로를 믿기 어려워진다. "어차피 나는 해도 안 돼"라는 패배주의가 자리 잡는다. 그러면 시도 자체를 꺼리게 된다.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실패할 일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악순환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성공할 기회도 없다. 그리고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쌓여야 자신감이 생긴다. 그 자신감이 다시 더 큰 도전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필요한 건 '끝내는 연습'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결과가 아니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가 나와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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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권력 - 네 말이 아니라 내 말로 살기로 했다
박비주 지음 / 힘찬북스(HCbooks)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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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침묵을 미덕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말을 아끼는 것이 성숙함이라 믿었고, 참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번에 <언어 권력>을 읽으며 깨달았다. 내가 지켜온 것은 관계가 아니라 불균형이 었고, 내가 선택한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패배 선언이었다. 책은 독자의 자기 위로를 가차없이 깨뜨린다. "착한 게 아니고 호구였다"는 선언은 수많은 사람들이 '배려'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갉아먹어 온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조차 "내가 예민한가?"라고 스스로를 의심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타인의 무례함은 그들의 솔직함으로 포장되고, 나의 정당한 불편함은 유난으로 치부된다. 이런 관계 속에서 침묵은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존재를 지우는 행위에 가깝다. 저자가 말하는 '감정 배출구'라는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자처해 온 시간들이 있었다.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 우정이라 믿었고, 상사의 불합리한 요구에 "네"라고 답하는 것이 직장 생활의 기본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은 어디에도 자리하지 못했다. 분노는 삼켜야 했고, 억울함은 혼자 삭혀야 했으 며, 상처는 아물기도 전에 덧나곤 했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개념은 '감정을 번역한다'는 표현이었다. 감정을 참거나 폭발시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그 것을 정확한 언어로 옮기는 작업.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의사소통의 핵심이다. "나는 지금 네 말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구조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내 존재를 명확히 드러낸다. 이는 감정 표현이 곧 싸움을 의미한다고 배워온 우리에게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실제로 나는 최근 이 방식을 시도해 보았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별다른 사과 없이 농담으로 넘기려는 지인에게, 예전 같으면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아"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약속 시간은 나에게 중요해. 다음부터는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알려줬으면 좋겠어"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상대는 잠시 당황했지만, 관계는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후 약속에서 그는 시간을 더 잘 지켰고, 나는 그 관계를 더 편하게 여기게 되었다. 감정 번역의 핵심은 '나 전달법(1-message)'에 있다. "너는 왜 맨날 그래?"가 아니라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느껴"로 말하는 것. 이 미묘한 차이가 대화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 전자는 비난과 방어의 악순환을 만들지만, 후자는 상대에게 나의 경험을 이해할 기회를 준다. 물론 이것이 항상 통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에 관심이 없거나, 자기 기준만을 절대시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단호함'이다.

책에서 강조되는 개념이 '경계 설정'이다. "그건 네 기준이지, 난 다르다" 타인의 잣대를 거부하고 나만의 기준을 선언하는 행위다. 우리 사회는 유독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원래 그런 거야", "다들 그렇게 하는데"라는 말로 개인의 기준을 무력화시킨다. 하지만 '원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들'이라는 주체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단지 자기 기준을 강요하기 위한 수사일 뿐이다. 나는 직장에서 이런 경험을 자주 한다. 야근이 당연시되는 문화 속에서 정시 퇴근을 하면 열정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말 회식을 거절하면 "팀워크가 부족하다"는 낙인이 찍힌다. 이런 분위기에서 경계를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선을 긋지 않으면 결국 선을 넘는 사람에게 당한다. 경계가 없는 관계는 존중이 아니라 침해를 낳는다. 단호함이 곧 무례함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명확히 밝히는 것을 공격적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싫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나를 긍정하는 행위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함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아는 성숙함이다. 이런 언어들은 관계를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 계의 질을 높인다. 서로의 경계를 존중할 때 비로소 진짜 소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말은 세게가 아니라 정확하게"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나는 많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강한 어조를 쓰는 것이 힘 있는 언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진짜 힘은 감정의 크기가 아니라 논리의 명료함에서 나온다. 상대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며,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대화를 정리하는 능력. 이것이 언어 권력의 실체다. "그건 네 해석이야"라는 것이 좋은 예다. 누군가 나의 행동을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려 할 때, 해석의 주체를 다시 나에게 돌려놓는다. ”너는 항상 그래"라는 일반화된 비난에 대해서는 "그건 네가 본 일부일 뿐이야"라고 응수할 수 있다. 이런 언어들은 감정적으로 맞대응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프레임을 거부한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는 사람은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는 사람이라는 저자의 통찰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책의 조언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한계도 있을 것 같다. 모든 관계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사와 부하, 부모와 자녀, 갑과 을의 관계에서 정확한 말 만으로 균형을 맞추기는 어렵다. 권력 구조가 언어보다 강할 때가 분명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단호함은 때로 불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자기 보호를 위해 말은 필요하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자기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수단이 될 수는 있다.

책이 말하는 '언어 권력'의 본질은 타인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이다.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며, 필요할 때 명확히 거절하고, 관계의 경계를 스스로 정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언어로부터 시작된다. 책을 읽으며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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