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권력 - 네 말이 아니라 내 말로 살기로 했다
박비주 지음 / 힘찬북스(HCbooks)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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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침묵을 미덕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말을 아끼는 것이 성숙함이라 믿었고, 참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번에 <언어 권력>을 읽으며 깨달았다. 내가 지켜온 것은 관계가 아니라 불균형이 었고, 내가 선택한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패배 선언이었다. 책은 독자의 자기 위로를 가차없이 깨뜨린다. "착한 게 아니고 호구였다"는 선언은 수많은 사람들이 '배려'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갉아먹어 온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조차 "내가 예민한가?"라고 스스로를 의심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타인의 무례함은 그들의 솔직함으로 포장되고, 나의 정당한 불편함은 유난으로 치부된다. 이런 관계 속에서 침묵은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존재를 지우는 행위에 가깝다. 저자가 말하는 '감정 배출구'라는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자처해 온 시간들이 있었다.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 우정이라 믿었고, 상사의 불합리한 요구에 "네"라고 답하는 것이 직장 생활의 기본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은 어디에도 자리하지 못했다. 분노는 삼켜야 했고, 억울함은 혼자 삭혀야 했으 며, 상처는 아물기도 전에 덧나곤 했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개념은 '감정을 번역한다'는 표현이었다. 감정을 참거나 폭발시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그 것을 정확한 언어로 옮기는 작업.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의사소통의 핵심이다. "나는 지금 네 말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구조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내 존재를 명확히 드러낸다. 이는 감정 표현이 곧 싸움을 의미한다고 배워온 우리에게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실제로 나는 최근 이 방식을 시도해 보았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별다른 사과 없이 농담으로 넘기려는 지인에게, 예전 같으면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아"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약속 시간은 나에게 중요해. 다음부터는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알려줬으면 좋겠어"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상대는 잠시 당황했지만, 관계는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후 약속에서 그는 시간을 더 잘 지켰고, 나는 그 관계를 더 편하게 여기게 되었다. 감정 번역의 핵심은 '나 전달법(1-message)'에 있다. "너는 왜 맨날 그래?"가 아니라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느껴"로 말하는 것. 이 미묘한 차이가 대화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 전자는 비난과 방어의 악순환을 만들지만, 후자는 상대에게 나의 경험을 이해할 기회를 준다. 물론 이것이 항상 통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에 관심이 없거나, 자기 기준만을 절대시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단호함'이다.

책에서 강조되는 개념이 '경계 설정'이다. "그건 네 기준이지, 난 다르다" 타인의 잣대를 거부하고 나만의 기준을 선언하는 행위다. 우리 사회는 유독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원래 그런 거야", "다들 그렇게 하는데"라는 말로 개인의 기준을 무력화시킨다. 하지만 '원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들'이라는 주체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단지 자기 기준을 강요하기 위한 수사일 뿐이다. 나는 직장에서 이런 경험을 자주 한다. 야근이 당연시되는 문화 속에서 정시 퇴근을 하면 열정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말 회식을 거절하면 "팀워크가 부족하다"는 낙인이 찍힌다. 이런 분위기에서 경계를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선을 긋지 않으면 결국 선을 넘는 사람에게 당한다. 경계가 없는 관계는 존중이 아니라 침해를 낳는다. 단호함이 곧 무례함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명확히 밝히는 것을 공격적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싫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나를 긍정하는 행위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함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아는 성숙함이다. 이런 언어들은 관계를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 계의 질을 높인다. 서로의 경계를 존중할 때 비로소 진짜 소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말은 세게가 아니라 정확하게"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나는 많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강한 어조를 쓰는 것이 힘 있는 언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진짜 힘은 감정의 크기가 아니라 논리의 명료함에서 나온다. 상대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며,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대화를 정리하는 능력. 이것이 언어 권력의 실체다. "그건 네 해석이야"라는 것이 좋은 예다. 누군가 나의 행동을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려 할 때, 해석의 주체를 다시 나에게 돌려놓는다. ”너는 항상 그래"라는 일반화된 비난에 대해서는 "그건 네가 본 일부일 뿐이야"라고 응수할 수 있다. 이런 언어들은 감정적으로 맞대응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프레임을 거부한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는 사람은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는 사람이라는 저자의 통찰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책의 조언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한계도 있을 것 같다. 모든 관계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사와 부하, 부모와 자녀, 갑과 을의 관계에서 정확한 말 만으로 균형을 맞추기는 어렵다. 권력 구조가 언어보다 강할 때가 분명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단호함은 때로 불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자기 보호를 위해 말은 필요하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자기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수단이 될 수는 있다.

책이 말하는 '언어 권력'의 본질은 타인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이다.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며, 필요할 때 명확히 거절하고, 관계의 경계를 스스로 정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언어로부터 시작된다. 책을 읽으며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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