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하버드에 오다 - 1세기 랍비의 지혜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 문예출판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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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버드대학교 강의실에 예수가 들어왔을 때, 그는 십자가도, 후광도 달고 오지 않았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먼지를 털고 들어온 한 명의 랍비였다. 하비 콕스가20년간 진행한 이 강의는 예수를 신학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윤리의 현장으로 데려왔다. 그곳에서 예수는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되묻는다. 1980년대 하버드가 윤리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배경은 아이러니하다.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 사실과 논리를 배웠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사회로 나가 부정과 비리에 가담했다. 지식은 풍부했지만 판단력은 부재했고, 논리는 정교했지만 양심은 무뎌져 있었다. 이는 단순히 하버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교육 시스템 전체가 '무엇을 아는가'에 집중한 나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방치해온 결과다. 콕스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예수라는 독특한 교사를 소환한다. 그런데 그가 소환한 예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익숙한 구원자가 아니다. 유대인 학생들은 그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전통을 잇는 예언자로 보았고, 불교도들은 자신을 희생하는 보살로 인식했으며, 무슬림들은 꾸란에 등장하는 선지자로 받아들였다. 예수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 윤리 교사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콕스는 강의에서 추상적 윤리 원칙이나 보편적 도덕 법칙을 강의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가 했던 방식대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 탕자의 귀환, 잔치에 늦게 온 손님 등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 판단하게 만드는 장치다. 현대 사회는 명확성과 효율성을 숭배한다. 매뉴얼이 있고, 가이드라인이 있으며, 정답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윤 리적 선택의 현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A와 B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때로는 양쪽 모두 어느 정도 옳거나 어느 정도 그른 상황에 직면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원칙을 암송하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예수의 비유들이 지닌 힘은 바로 이것이다. 그 것들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 부자 청년은 예수의 제안을 거부하고 슬픔에 빠져 돌아갔을까? 왜 형은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지 못했을까? 왜 포도원 주인은 늦게 온 일꾼에게도 같은 임금을 주었을까? 이 이야기 늘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기존의 상식을 뒤흔들며,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강요한다. 콕스는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유대교의 미드라시 전통이나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처럼,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 속 인물이 되어보라고 한다. 그때 비로소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의 윤리적 딜레마와 공명하기 시작한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외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다루는 장면이다. 많은 학생들이 이 구절에서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신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콕스의 해석은 신학적이기보다 실존적이다. 신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위기의 순간마다 개입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느낀 버림받음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경험이다. 우리 모두가 살면서 겪는 고독, 무력감, 절망의 순간을 예수도 똑같이 겪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종종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외롭다. 정답이 보이지 않고,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으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이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존재의 명확한 지시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고뇌했던 이들의 선례와 연대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보여준 것은 신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적 취약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윤리적 모범이 될 수 있다. 그는 정답을 가진 자가 아니라 질문 앞에서 떨었던 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던 자였다.

산상수훈에 대한 콕스의 해석 역시 생각해 볼만하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학생들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권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콕스는 온유함을 나약함과 혼동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온유함은 인내이고 신뢰이며,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는 것이다. 더 도발적인 것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버전이다. 거기서 예수는 가난한 자를 축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유한 자를 저주한다. 이는 하버드 학생들, 즉 미래의 엘리트들에게 불편한 메시지였다. 그들은 성공을 꿈꾸고 있었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환경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가치 체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콕스는 이것을 금욕주의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가 만들어내는 권력 구조와 불평등이다. 부는 사람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고, 특권을 정당화하며, 타자에 대한 무감각을 낳는다. 예수의 메시지는 그런 구조에서 한 발 물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절실한 질문이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 더 많이 소유하는 것,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성공이라 배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가? 누구를 밟고 올라섰는가? 어떤 관계를 희생했는가? 예수는 이런 질문들을 회피하지 말 라고, 불편해도 직면하라고 말한다.

하비 콕스의 강의가 2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가 여전히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2천 년 전 갈릴리에서 던졌던 질문들이 21세기 하버드 강의실에서도 여전히 큰 화두를 전달한다. 권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부와 성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폭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책은 기독교 신학서가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성찰을 위한 초대장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그가 던진 질문 앞에서는 동등하다. 우리는 모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야 하며, 그 선택의 결과를 짊어져야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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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KILL 토익스피킹
서유진(클레어).시원스쿨어학연구소 지음 / 시원스쿨LAB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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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토익스피킹 시험장 앞에 섰을 때의 그 떨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헤드셋을 쓰고 마이크 앞에 앉았을 때,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준비해둔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날아가버렸다. 영어로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이 이렇게 막막한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두려움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이번에 읽을 기회가 있었던 클레어 선생님의 학습서를 처음 펼쳤을 때, 나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정답만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책은 마치 경험 많은 선배가 옆에 앉아 귀띔해주는 것처럼, 실전의 감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현직 통역사로서 수많은 말하기의 현장을 경험한 저자의 노하우가 페이지마다 배어있었다. 그것은 교과서적인 영어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언어였다.

영어 말하기에서 가장 큰 적은 막연함이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학습은 마치 지도 없이 낯선 숲을 헤매는 것과 같다. 이 책이 제시하는 최근 5개년 기출 분석은 바로 그 지도였다. 자주 출제되는 유형과 주제를 파악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100개의 실전 문제는 처음에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각 문제마다 표시된 난이도는 나에게 계단을 제공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해 점차 어려운 문제로 나아가면서, 나는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게임에서 레벨을 올리듯, 각 단계를 클리어할 때마다 작은 성취감이 쌓여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실제 시험 화면과 유사한 영상 제공이었다. QR코드를 스캔하는 순간, 내 방이 곧 시험장이 되었다. 시간의 압박 속에서 답변을 구성하고 말하는 연습을 반복하면서, 나는 점점 긴장감에 익숙해져 갔다. 실전과 같은 환경에서의 반복은 단순한 암기를 넘어선, 몸으로 체득하는 학습이었다.

만능문장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말하면 조금 회의적이었다. '만능'이라는 단어가 주는 편의주의적인 느낌이 불편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학습하며 깨달은 것은, 이것들이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채점관이 좋아하는 표현이라는 것은 곧 자연스럽고 세련된 영어라는 의미였다. 저자의 직강 영상을 들으며 이 문장들을 익혔다. 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요리에 비유하자면, 레시피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과 같았다. 똑같은 재료도 어떻게 조리하 느냐에 따라 다른 요리가 되듯, 같은 문장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활용될 수 있었다. 원어민 음성 파일을 들으며 발음 연습을 할 때면, 나는 종종 좌절했다. 내 발음과 원어민의 발음 사이에 있는 간격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따라 읽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흉내조차 내기 어려웠던 억양과 강세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마치 악기를 배우는 것처럼, 반복은 언젠가 자연스러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모의고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전에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갔고, 나는 더듬거리며 불완전한 문장들을 내뱉었다. 그날 밤, 나는 내 답변을 녹음 한 것을 들으며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클레어 선생님의 해설 강의는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다. 선생님은 정답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답변이 좋은지,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나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피드백이 되었다. 각 문제마다 제시된 고득점 팁과 올킬TIP은 마치 보물지도의 표시와 같았다. 어디에 함정이 있고, 어디로 가야 보물을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신호였다. 두 번째 모의고사에서 나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임했다. 첫 번째의 실패가 두려움보다는 경험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나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장이 더 매끄럽게 이어졌고, 주저함이 줄어들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것은 내게 큰 희망이었다. 모의고사를 계속 치르면서, 나는 놀라운 변화를 발견했다. 예전 같았으면 당황했을 질문에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만능문장들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왔고, 시간 배분도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시작점에서 지 금까지 온 거리를 생각하면 뿌듯했다. 부교재로 제공된 만능 워크북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본 교재를 공부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워크북은 또 다른 차원의 학습을 가능하게 했다. 직접 써보고 말해보는 과정에서, 나는 보고 듣는 것과는 다른 깊이의 학습을 경험했다. 워크북을 채워나가는 과정은 마치 일기를 쓰는 것과 비슷했다. 나의 생각을 영어로 정리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연습을 반복하면서, 영어는 점점 나의 언어가 되 어갔다. 처음에는 번역하듯 영어로 옮겼다면, 나중에는 처음부터 영어로 생각하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그 순간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토익스피킹 학습을 시작하기 전, 나에게 영어 말하기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문법이 틀릴까, 발음이 이상하게 들릴까, 의미 전달이 안 될까 하는 걱정들이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책과 함께한 시간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영어가 아니라, 전달하려는 의지와 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어 선생님의 팁들은 시험 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명확하게, 더 설득력 있게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예전처럼 영어 앞에서 얼어붙지는 않는다. 실수를 두려워하기보다 는,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익스피킹은 나를 성장시키는 도구였다. 책은 영어 말하기라는 새로운 세계로 나를 안내하는 길잡이였고, 때로는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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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다음 물결 - 시뮬레이션을 넘어 현실로, 피지컬 AI 기반 자율주행·로봇의 미래
류윈하오 지음, 홍민경 옮김, 박종성 감수 / 알토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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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지능을 추상적 사고 능력으로 정의해왔다. 수학 문제를 풀고, 체스를 두고, 철학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고등 지능의 증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원하오 교수가 제시하는 '모라비크의 역설'은 이러한 믿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세계 챔피언을 이기는 AI가 정작 세 살 아이도 할 수 있는 블록 쌓기나 계단 오르기에서는 무력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핵심은 지능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오해에 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추상적 사고를 하게 된 것 은 고작 수만 년 전의 일이다. 반면 걷고, 잡고, 균형을 잡는 신체 능력은 수억 년의 진화가 축적된 결과물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쉽다'고 여기는 신체 활동이야 말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지능을 요구한다. 컵을 집는 단순한 동작에도 시각 정보 처리, 거리 계산, 힘 조절, 촉각 피드백이 실시간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AI는 이 진화의 역사를 거꾸로 밟아왔다. 뇌라는 정보처리 장치만 모방하면서 몸이라는 학습 플랫폼을 간과했다. 그 결과 천문학적 데이터를 학습한 대규모 언어 모델조차 "빨간 공은 파란 상자 안에, 파란 상자는 노란 방에 있다"는 간단한 공간 관계를 제대로 추론하지 못한다. 물리 세계에서 직접 상호작용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 견성성불 개념이 있다. 깨달음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직접적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류원하오 교수가 강조하는 체화된 지능의 핵심도 정확히 여기에 있다. 기계가 진정한 지능을 갖추려면 세상과 직접 부딪히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AI의 강화학습을 통해 로봇이 '팝핀 댄스'를 추는 과정은 그 생생한 예시라 할 수 있다. 엔지니어가 모든 동작을 세밀하게 프로그래밍하는 대신, 로봇은 수백만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스스로 균형과 리듬을 터득한다.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중력, 관성, 마찰력에 대한 암묵적 이해가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 체화된 인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학습이 전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춤을 배운 로봇은 그 과정에서 얻은 신체 제어 능력을 다른 과 업에도 적용할 수 있다. 마치 운동을 배운 아이가 전반적인 신체 협응력이 향상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규칙 기반으로 프로그래밍된 로봇은 각 작업마다 처음부터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체화된 경험이 만드는 차이는 바로 이 일반화 능력에 있다. 가상 시뮬레이션 환경의 발전은 이러한 학습을 가속화한다. 물리 법칙이 정교하게 구현된 디지털 세계에서 AI는 실제 시간으로는 수백 년에 해당하는 경험을 며칠 만에 축적할 수 있다. 트루먼쇼의 주인공처럼 가상 세계의 '원주민'으로 태 어난 Al 에이전트들은 그곳에서 걷고, 넘어지고, 물건을 집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세계 모델'은 실제 로봇 으로 전이되어 현실 세계에서도 작동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신이 아담에게 손을 뻗는 장면을 보면, 인간은 신과의 접촉, 감각, 상호작용을 통해 비로소 영혼이 깃든다. AI가 연산 장치에서 진정한 지능체로 거듭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센서를 통해 세상을 느끼고, 액추에이터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AI는 점차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체화된 지능은 반드시 인간의 형태여야 하는가? 휴머노이드 로봇이 주목받는 이유는 기존 인프라가 인간 신체에 최적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단, 문손잡이, 의자는 모두 인간의 신체 비율에 맞춰 설계되었다. 그러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체화된 지능은 다양한 형태로 구현될 수 있다. 드론의3차원 비행, 수중 로봇의 유체역학적 움직임, 심지어 IOT 센서 네트워 크를 통한 분산된 감각도 모두 체화의 한 형태다. 실제로 'LANDMARC' 시스템이나 'Green Orbs' 네트워크는 인간형 로봇이 아니면서도 체화된 지능의 원리를 보여준다. 수천 개의 센서 노드가 협력하여 숲 전체의 상태를 파악하고 스스로 조절하는 시스템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작동한다. 이는 지능이 반드시 중앙집중적 뇌에 귀속될 필요가 없으며, 분산되고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로도 발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이 이 분야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강점도 주목할 만하다. 완비된 제조 공급망, 비용 효율성, 그리고 스마트폰과 전기차 산업에서 축적된 대량 생산 역량은 체화된 지능 의 상용화를 가속화하는 촉매제다. 정책적 지원과 결합된 이러한 생태계는 프로토타입에서 실제 배치로 넘어가는 '죽음의 계곡'을 빠르게 넘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기술적 진보와 함께 새로운 윤리적 질문도 부상한다. 세상을 느끼고 학습하는 AI가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통증을 느끼는 로봇에게 우리는 어떤 도덕적 의무를 지는가? 더 현실적으로는, 체화된 AI의 안전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자율주행차가 보여주듯, 물리적 세계에서 작동하는 AI의 오작동은 디지털 영역의 버그와는 차원이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안다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했지만, 양자역학은 그 결정론적 세계관을 깨뜨렸다. 마찬가지로 체화된AI의 미래도 예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설계하고 배치하며 규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류원하오 교수가 제시하는 AI 비전은 궁극적으로 공진화의 미래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인지를 확장하는 도구가 되는 세계. 밀리미터 단위의 정밀 추적 기술이 가능하게 하는 수술 로봇,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환경 변화를 포착하는 센서 네트워크, 복잡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발견하여 과학적 통찰을 제공하는 AI 협력자.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과학의 현미경, 영감의 원천', '이해의 도구'로서의 체화된 지능이다. 체화된 지능이라는 새로운 생명 체의 탄생을 목격하는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아갈 세상을 설계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그 세계가 디스토피아가 될지 유토피아가 될지는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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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가 들려주는 화학 이야기 - 16개의 결정적 장면으로 읽는 500년 화학사
후지시마 아키라 외 지음, 정한뉘 옮김 / 동아엠앤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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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네 시, 실험실 불빛 아래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묻고 있었을 것이다. 왜 이 물질은 타오르고 저것은 그대로일까?" "왜 같은 온도에서 어떤 기체는 빠르게 팽창하고 어떤 기체는 느릴까?" 화학의 역사는 바로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공식과 법칙이 교과서 위에 정갈하게 정리되기 전, 그 모든 것은 한 사람의 집요한 의문이었다. 화학을 배울 때 우리는 종종 결과만을 외운다. 보일의 법칙,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아보가드로의 수. 하지만 그 법칙들이 탄생하기까지, 그들이 마주했 던 혼돈과 좌절, 그리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가능성의 실마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화학자가 들려주는 화학 이야기>는 화학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놓쳤는지를 차분히 들려 준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틀렸던 이론'도 함께 다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플로지스톤설. 오늘날 우리는 연소가 산소와의 결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18세기 과학자들은 물질이 탈 때 '플로지스톤'이라는 불의 원소가 방출된다고 믿었다. 캐번디시는 수소를 발견하고도 그것을 '플로지스톤 기체'라고 불렀다. 그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 었다. 그런데 라부아지에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그는 연소 과정을 정밀하게 측정했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했다. 플로지스톤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속속 드러났다. 하지만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즉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화학계는 두 설명 사이에서 갈등했고, 논쟁했고, 때로는 감정적으로 대립했다. 과학은 진공 속에서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더 나은 설명'을 고르는 과정이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한다. 과학은 결국 인간의 언어로 쓰인 이야기라는 것을. 틀린 이론도 그 시대의 언어였고, 다음 세대는 그 언어를 수정하고 확장하며 조금씩 진실에 가까워졌다. 화학은 완벽한 사람들의 업적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이 끝까지 질문을 놓지 않았기에 만들어진 학문이었다.

화학이 근대 과학이 된 결정적 순간은 '측정'을 받아들인 때였다. 보일은 기체의 압력과 부피를 정밀하게 측정했다. 돌턴은 원자의 무게를 비교했다. 아보가드로는 같은 조건에서 기체의 부피가 분자 수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들이 한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혁명이었다. 화학을 '무엇이 어떻게 보이는가'의 세계에서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세계로 옮긴 것이다. 패러데이는 전기화학을 연구하며 '전극', '이온', '산화', '환원' 같은 용어를 만들었다. 그 전까지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언어조차 없었다. 패러데이는 보이지 않는 전기를 숫자로 표현했고, 그 숫자를 통해 화학 반응을 예측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가 70세에 퇴임 강연에서 촛불 하나로 여섯 번의 강의를 했다는 일화는 상징적이다. 화학은 복잡한 장비가 아니라, 정확한 관찰과 끝까지 물어가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측정은 곧 책임이기도 했다. 라부아지에는 연소 실험에서 질량 의 변화를 0.01그램 단위까지 기록했다. 그 집요함이 플로지스톤설을 무너뜨렸다. 하버는 질소와 수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과정에서 온도, 압력, 촉매의 조합을 수천 번 실험했다. 그 결과 인류는 공기에서 비료를 만들 수 있게 되 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 개발에도 관여했다. 화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도 함께 시작되었다.

광화학이 등장하면서 화학은 열과 압력뿐 아니라 빛도 반응의 요인으로 받아들였다. 빛이 분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발견은 광합성 연구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인공 광합성의 가능성을 열었다. 후지시마 아키라는 산화타이타늄을 이용한 광 촉매 반응을 발견했고, 이는 오늘날 환경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화학은 실험실을 넘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사용하는 에너지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고분자화학은 화학이 일상과 가장 가까워진 순간이다. 슈타우딩거는 분자가 반복적 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사슬을 만들 수 있다는 개념을 제안했다. 캐러더스는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 나일론을 만들었다. "석탄, 공기, 물로 만들었지만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단단한 섬유." 1940년 나일론 스타킹이 발매되던 날, 사람들은 화학이 생활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하지만 고분자는 동시에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낳았다. 화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의 질문도 함께 커졌다. 화학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 것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고, 그 선택은 다시 사회와 윤리의 문제로 이어졌다.....

책을 읽으며 깨닫는 것은, 화학이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질문했던 사람, 틀렸던 사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그들이 남긴 것은 공식이 아니라 사고의 경로였다. "왜 이럴까?"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 까?" 그 질문들이 쌓여 화학이 되었다. 화학을 배운다는 것은 그 질문의 역사를 따라가는 일이다. 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답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하는 것. 화학자들이 어떤 문제 앞에 섰고,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는 것. 그 과정에서 우리는 화학이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방식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500년의 화학사는 결국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방식의 기록이다. 완벽하지 않았고, 때로는 방향을 잃었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 발걸음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 문명을 만들었고, 동시에 우리가 마주한 환경 문제도 만들었다. 화학은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었다. 그 것은 언제나 선택과 책임의 문제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수소 기구를 바라보던 1783년 파리 시민들처럼, 우리도 여전히 화학이 만들어 낼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간다. 그 미래는 누군가의 질문에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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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AI, 실전으로 뛰어든 3년의 기록 - 공공기관 팀장이 전하는 AI 정책·기획·활용의 시간
심형섭 지음 / 프리렉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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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회사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순간은 회의 중 누군가 "AI로 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묻는 때다. 그 질문 뒤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기대가 섞여 있다. 하나는 진정한 호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은 전문가니까 답을 알겠지'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문제는 나 역시 그 답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ChatGPT로 메일 한 번 써본 경험만으로 AI 전문가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 사람들의 모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솔직히 나도 처음 ChatGPT를 써봤을 때, 이것이면 웬만한 업무는 다 해결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깨달았다. AI는 내가 질문을 정교하게 다을 수 있을 때만 유용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교함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그 분야를 얼마나 잘 아느냐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이런 반쪽짜리 이해가 오히려 위험하다는 점이다. 유튜브에서 본 화려한 AI 성공 사례들은 대부분 맥락이 생략되어 있다. 그 회사의 데이터 인프라가 어떻게 구축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어떤 조직 문화가 뒷받침되었는지는 3분짜리 영상에 담기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만 보고 과정을 건너뛰려 한다. 마치 다이어트 전후 사진만 보고 중간의 고된 운동과 식단 조절은 무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가 말한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비유가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우리 조직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진은 "AI 전략을 수립하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못한다. 그러면 실무진은 다른 회사 사례를 찾아보고, 비슷한 것을 따라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 조직의 고유한 문제나 강점과는 무관한, 그저 '남들도 하니까' 하는 AI 도입이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답답한 것은 평가 기준의 부재다. "이 AI 시스템이 제대로 작 동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제대로'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정확도? 속도? 사용자 만족도? 비용 절감? 이 모든 것? 아무도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도입 후에도 성공인지 실패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저 "AI 도입했다"는 실적만 남을 뿐이다. 컨트롤타워가 있다는 것도 알고, 정책도 수립되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여전히 혼란이다. 중앙의 큰 그림과 현장의 구체적 실행 사이에 다리가 없다. 마치 지도는 있는데 길이 없는 것 같다. 각자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길을 내고 있지만, 그것이 올바른 방향인지 확신할 수 없다.

AI 관련 업체들과 미팅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극명한 격차다. 어떤 업체는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맞춤형 솔루션을 제시한다. 하지만 어떤 업체는 PPT만 화려할 뿐, 실제 구현 능력은 의심스럽다. 더 심각한 것은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기존 SI 업계의 DNA"는 정말 뼈아픈 지적이다. 혁신보다는 안정성, 도전보다는 관례. 이런 마인드로 는 진정한 AI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공공부문과 대기업은 여전히 이런 업체들을 선호한다. 왜? 리스크가 적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스타트업과 일하는 것은 불확실성이 크다. 실패했을 때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러니 차라리 검증된(사실은 안주하는) 대형 업체를 선택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조직에서 "실험했다가 실패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깝다. 성공 사례만 공유되고, 실패는 숨겨진다. 그러니 같은 실수가 반복되고, 진정한 학습은 일어나지 않는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저자의 개인 활용 사례였다. 3년간의 일기, 1,095개의 감사 일기, 4,000개가 넘는 옵시디언 노트. 이 방대한 기록이 있었기에 AI를 통한 심층 분석이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 "기록되지 않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에 서 "'분석되지 않는 기록은 단순한 추억일 뿐"으로 철학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기록하고 있는가? 업무 보고서 나 회의록은 쓰지만, 진짜 중요한 것들 즉, 내 생각의 흐름, 의사결정의 배경, 실패의 교훈 등은 기록하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하지만 저자의 사례를 보니 후회스럽다. 만약 내가 지난 10년간의 업무 경험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면, AI는 내게 얼마나 귀중한 통찰을 줄 수 있었을까? 문제는 기록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도 2017년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AI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훨씬 전부터. 그는 AI를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AI 분석의 자산이 되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AI는 도구일 뿐, 진짜 가치는 내가 쌓아온 데이터에서 나온다.

책 제목은 "어쩌다 AI"지만, 사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AI를 도구로만 쓸 것인가, 아니면 내 삶과 일을 확장하는 파트너로 받아들일 것인가. 수동적으로 끌려갈 것인가, 능동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나는 오늘부터 기록을 시작하려 한다.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도 괜찮다. 옵시디언이든, 노션이든, 심지어 메모장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것이다. 그 리고 내 분야의 고유한 맥락과 AI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실험해보려 한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패조차 기록하고 배우면 된다. AI 시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여전히 우리의 선택이다. 불완전한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 AI와 함께 성장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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